"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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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계 장군이 1370년 옛날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오녀산성(五女山城 : 卒本城)을 향하여 편전(片箭)에 아기화살을 덧걸어 70발을 쏘아 적군의 안면을 적중시켰다. 군량미 보급을 책임지고 있던 부보상들도 그 광경을 지켜보고 환호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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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70(공민왕 19)년 1월 동북면(함경도) 병마사인 이성계 장군이 기병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에서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원나라의 잔당인 이오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李原景)가 지키고 있는 압록강 중류지역 환인시(桓仁市)에 위치한 우라산성(于羅山城 : 亏羅山城 兀剌山城 五老山城 五女山城)을 공격했다. 우라산성은 사면이 절벽으로서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인 바위산성이었다. 해발 820m인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산성에서 전투를 치른 것은 믿기 힘들 정도이다. 이성계 장군의 신출귀몰한 편전술과 기마술의 승리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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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전을 사용할 수 있는 병사는 100명 중 한두 명에 불과하다. 편전의 사정거리는 317m로서 일반화살의 225m보다 100m가량 더 멀리 나간다. 편전의 초속은 71.8m로 일반화살의 59.8m를 크게 상회한다. 고속화살일수록 관통력이 우수한 것이다. 이성계 장군은 편전을 사용할 수 있는 신묘한 사격술(射擊術)을 구사하여 우라산성을 함락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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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계 장군은 전쟁터에 나가야 할 새벽에 수행하는 부관들에게 건너편의 장대한 나무를 가리키면서 다섯 개의 가지를 지목하게 한 다음 다섯 개의 화살을 동시에 장전하여 시위를 당기면 각각 목표점을 명중한다. 만약 한 개라도 명중되지 않으면 병사들의 출진을 보류시켰다. 장군이 스스로의 몸 상태를 점검하는 방법이었다. 모든 화살이 목표지점을 명중시키게 되면 장군은 군사들을 총지휘 감독하면서 출진하고 병사들의 사기는 충천하여 필승을 거두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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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계 장군의 출진에 따라 공민왕은 동쪽의 두만강 너머 간도지역과 서쪽의 요동 심장부인 요성까지 원나라를 내쫓고 옛 땅을 되찾는 북벌을 성공리에 마무리지었다. 공민왕은 만주가 우리 땅임을 선포하고 군대를 철수했다. 공민왕의 만주수복으로 인하여 조선은 두만강 유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공민왕의 북벌은 만주가 우리 역사의 무대라는 점을 새삼 확인했던 것이다. ← 대한경영사론 (졸저 45쪽 참조) | ||
==='''작품 속 사건'''=== | ==='''작품 속 사건'''=== |
2017년 4월 4일 (화) 17:26 판
동령부 오라산성의 공함 | |
작가 | 김태 |
---|---|
제작연도 | 1975년 |
규격 | 300호(197x290.9cm) |
유형 | 전쟁 |
분류 | 유화 |
소장처 | 전쟁기념관 |
목차
정의
이성계 지휘하의 고려군이 동녕부 오녀산성을 함락시키는 장면을 재현한 이 작품은 정확한 인체묘사와 인물들의 표정, 의상과 배경에 대한 작가의 세심한 배려 등이 돋보이는 수작들 가운데 하나이다.[1]
설명
작품 속 인물
이성계 장군이 1370년 옛날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오녀산성(五女山城 : 卒本城)을 향하여 편전(片箭)에 아기화살을 덧걸어 70발을 쏘아 적군의 안면을 적중시켰다. 군량미 보급을 책임지고 있던 부보상들도 그 광경을 지켜보고 환호했다.
1370(공민왕 19)년 1월 동북면(함경도) 병마사인 이성계 장군이 기병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에서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원나라의 잔당인 이오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李原景)가 지키고 있는 압록강 중류지역 환인시(桓仁市)에 위치한 우라산성(于羅山城 : 亏羅山城 兀剌山城 五老山城 五女山城)을 공격했다. 우라산성은 사면이 절벽으로서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인 바위산성이었다. 해발 820m인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산성에서 전투를 치른 것은 믿기 힘들 정도이다. 이성계 장군의 신출귀몰한 편전술과 기마술의 승리이었다.
편전을 사용할 수 있는 병사는 100명 중 한두 명에 불과하다. 편전의 사정거리는 317m로서 일반화살의 225m보다 100m가량 더 멀리 나간다. 편전의 초속은 71.8m로 일반화살의 59.8m를 크게 상회한다. 고속화살일수록 관통력이 우수한 것이다. 이성계 장군은 편전을 사용할 수 있는 신묘한 사격술(射擊術)을 구사하여 우라산성을 함락했다.
이성계 장군은 전쟁터에 나가야 할 새벽에 수행하는 부관들에게 건너편의 장대한 나무를 가리키면서 다섯 개의 가지를 지목하게 한 다음 다섯 개의 화살을 동시에 장전하여 시위를 당기면 각각 목표점을 명중한다. 만약 한 개라도 명중되지 않으면 병사들의 출진을 보류시켰다. 장군이 스스로의 몸 상태를 점검하는 방법이었다. 모든 화살이 목표지점을 명중시키게 되면 장군은 군사들을 총지휘 감독하면서 출진하고 병사들의 사기는 충천하여 필승을 거두었다.
이성계 장군의 출진에 따라 공민왕은 동쪽의 두만강 너머 간도지역과 서쪽의 요동 심장부인 요성까지 원나라를 내쫓고 옛 땅을 되찾는 북벌을 성공리에 마무리지었다. 공민왕은 만주가 우리 땅임을 선포하고 군대를 철수했다. 공민왕의 만주수복으로 인하여 조선은 두만강 유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공민왕의 북벌은 만주가 우리 역사의 무대라는 점을 새삼 확인했던 것이다. ← 대한경영사론 (졸저 45쪽 참조)
작품 속 사건
작품 속 공간
작품 구도
해당 작품은 승자와 패자의 극명한 대립, 즉 대각선으로 나뉘는 화면 상단과 하단이라는 위치선정, 아래를 내려다보고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의 대립, 기세등등한 포즈와 무릎을 꿇은 굴욕적인 포즈의 대립, 완전한 정면상은 아닐지라도 정면을 보여주고 있는 아군과 등을 보이고 있는 적군이라는 전통적인, 또는 도식화된 이분법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승리라는 메시지를 일차원적으로 전달할 따름이다.[2]
시각적 안내
관련 민족기록화
1019년 이용환-귀주대첩
1107년 안재후-여진정벌
1270년 김서봉-삼별초의 대몽항전
1356년 문학진-쌍성수복
1376년 박창돈-최영장군의 홍산전투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김태 |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 | A는 B를 그렸다 | 1975년 |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 | 이성계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 | 동녕부정벌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 | 오녀산성 |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975년 | 김태가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를 제작하였다. |
1991년 1월 8일-1992년 1월 7일 | 국회사무처가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를 대여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32103 | 126.914133 |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이 국회사무처에 대여되었다. |
37.532103 | 126.914133 |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이 전쟁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