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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돌아가심에 있어서는, 경복 2년(893, 진성왕 7) 5월 4일, 문도들을 불러 이르되 "죽음이 장차 이르려 하니 나는 가고자 하노라. 너희는 힘써 노력하라. 마땅히 부처의 뜰에서 노닐어, (아무리)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비가 …하며, 앉은 자리에서 뜬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더라도, 모름지기 밝은 달은 동에서 서로 감을 알아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돌아가시니 향년이 79이고, 법랍이 58이었다. 시작한 것은 …이고, 마친 것은 …이었다. … 이상하도다. … 푸른 연꽃 핀 절에서 …하니, 속세의 인연이 돌아가심을 듣자 형원사에 머물며 … 남겨진 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 {{Blockquote|돌아가심에 있어서는, 경복 2년(893, 진성왕 7) 5월 4일, 문도들을 불러 이르되 "죽음이 장차 이르려 하니 나는 가고자 하노라. 너희는 힘써 노력하라. 마땅히 부처의 뜰에서 노닐어, (아무리)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비가 …하며, 앉은 자리에서 뜬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더라도, 모름지기 밝은 달은 동에서 서로 감을 알아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돌아가시니 향년이 79이고, 법랍이 58이었다. 시작한 것은 …이고, 마친 것은 …이었다. … 이상하도다. … 푸른 연꽃 핀 절에서 …하니, 속세의 인연이 돌아가심을 듣자 형원사에 머물며 … 남겨진 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 ||
+ | |출처=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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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철]]이 입적하자, 진성여왕은 봉식랑(奉食郞)인 왕로(王輅)에게 명하여 위문하도록 하고, 시호를 추증하여 '수철(秀撤)'이라 하고, 탑호는 '능가보월(楞加寶月)'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실 차원에서 직접 재(齋)에 필요한 차와 향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후 제자인 관휴(款休)가 행장을 정리하여 탑비가 건립되고 비문이 찬술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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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ckquote|유훈을 받아 … 수철이라는 시호와 능가보월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그 뒤에 여덟번의 재를 올리고 100일의 예를 갖추었으니, 차와 향 같은 것들은 모두 왕부(王府)에서 나왔다. 대중의 목마름을 고르게 적시지 않음이 없었고 덕의 향기를 멀리 드날렸으며 스승을 존중하는 도리는 … 재상은 재상의 집안에서 나는 것이니, 문인 관휴(款休)는 해를 좇아 바다를 건널 만큼 훌륭하여 능히 구름 … 멀리 내다보는 안목으로 붓을 가다듬어 용과 같은 행장을 정리하여 성스러운 거북의 신령스러움을 천추만세에 보였다. | ||
|출처=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출처=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
2017년 4월 3일 (월) 02:56 판
수철(秀澈)() | |
대표명칭 | 수철(秀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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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 817년(헌덕왕 9)-893년(진성여왕 7) |
시호 | 수철(秀澈) |
탑호 | 능가보월(楞加寶月) |
성씨 | 김씨(金氏) |
승탑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 |
승탑비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수철(秀澈)은 815년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가 소판(蘇判)[1]을 지낸 진골(眞骨) 가문이었으나, 조부와 부친에 이르러서는 중앙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증조의 위(位)는 소판으로 혈족이 진골로 빼어나 경사로움이 법신(法身)에까지 넉넉했고, 조부는 일신(日新)이고 부친은 수정(修靜)인데 벼슬하려 하지 않고 대대로 자손을 위한 좋은 계책을 전해주어 가문이 온전하였으니 세상을 피하여 보전한 맑은 것이 있었다.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수철(秀澈)은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여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일찍이 출가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입도(入道)함에 있어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돌아보니 헛된 꿈임을 깨달아, 눈먼 거북이 판자조각 만나는 듯한 인연을 언뜻 듣고 부처를 보자 지체하지 않았다.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출가수행
수철(秀澈)은 15세경에 연허(緣虛) 율사에게 출가하고[2], 천종(天縱) 대덕에게 수학하였다.
15살 남짓에 불법을 배우고자 하여 연허율사(緣虛律師)에게서 머리를 깎고 천종대덕(天縱大德)에게 경전을 배웠다.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이후 수철(秀澈)은 동원경(東原京) 복천사(福泉寺)에서 윤법(潤法) 대덕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동원경(東原京)[3] 복천사(福泉寺)[4]에 이르러 윤법대덕(潤法大德)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활동
수철은 실상산문을 개창한 승려인 홍척(洪陟)의 제자가 되었다.[5]
또한 수철은 명산을 찾아다니며 선(禪)을 닦는 여가에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하였다.[6]
이미 이치를 풀어냈으니 (정해진) 거처가 있겠는가. 이름난 산과 경치 좋은 곳의 탑을 일삼아 예배하였으며 … 선(禪)의 동산에서 꽃잎을 드날리고 화엄을 만나 향기를 피어 올렸다.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명산승지의 순례를 마친 이후 수철은 지리산 지실사(知實寺)를 사축(私築)하고 가르침을 펼쳤으며[7], 정법대덕(正法大德) 홍□(弘□), 승정(僧正) 순□(順□), 종자선사(宗子禪師)와 같은 당대의 뛰어난 승려들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수철의 행적 중 특징적인 것은 그가 신라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다. 먼저 수철은 태사(太師)로 추증된 경문왕(景文王, 재위:861∼875)에 의해 경주의 팔각당(八角堂)으로 초빙되어 선교(敎禪)의 같고[同] 다름[異]에 대한 질의를 받았다. 이에 수철은 경문왕에게 선교병립적(禪敎竝立的)인 방향을 제시해주었고, 경문왕은 화답하며 법호를 내려주었다.[8]
경문왕에 이어서 헌강왕(憲康王, 재위:875년~886)대에도 수철은 왕실을 방문하였으며 왕실과 관련된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또한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887~897)대에는 수철은 심원사(深遠寺)에서 주석하게 되었는데, 이 절은 왕의 명령에 의해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가 기증한 절이었다. [9]
특별히 단의장옹주에게 명하여 심원사에 선사를 머물게 청하여 미혹한 세상을 널리 구체하게 하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데, 마음의 땅을 밝히는 것이니 어찌 영□(瑩□)로 일컫겠는가.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그러나 수철은 심원사가 도성과 가깝다는 이유로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으며, 제자인 수인(粹忍)과 의광(義光)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법운사(法雲寺)로 거처를 옮겼다. 수철은 그곳에서 『십지경(十地境)』[10]을 저술하는 등의 교화활동을 하였으며, 입적하기 전까지 머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머문지 얼마 안되어 여기는 도성에서 너무 가깝다고 여겨 내와 바위가 있는 맑은 곳으로 … 제자 수인(粹忍)·의광(義光)이 각각 남악의 북쪽 들에 거처했는데 … 경치가 아주 뛰어나서 법운(法雲)이라 [이름붙여…] 마음이 따르는 대로 집을 정하여 이름이 드러난 바가 있었다. 『십지경(十地境)』을 지어 삼산(三山)[11]을 누른 것은 그에 감응함을 보인 것이다. … 능히 … 그윽한 설법과 목격한 것은 [祥書로 빼곡했다.] 이것이 후학을 더욱 채찍질할 만하여 … 대사는 말이 없이 근세의 마음 공부 … 괴력난신에 보탬이 될 것은 드물었으니 … 그러니 너희들은 옛것을 상고하여 … 마땅히 멀리 뿌리가 있는 곳까지 … 복덕과 지혜가 모두 엄청하니 어머니는 반드시 하늘에 나실 것이다.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입적
수철은 893년 5월 4일 입적하였으며, 세속의 나이는 79세, 승랍은 58세였다. 그의 입적 소식에 심원사에 머물던 이들도 슬퍼하였다고 한다.[12]
수철이 입적하자, 진성여왕은 봉식랑(奉食郞)인 왕로(王輅)에게 명하여 위문하도록 하고, 시호를 추증하여 '수철(秀撤)'이라 하고, 탑호는 '능가보월(楞加寶月)'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실 차원에서 직접 재(齋)에 필요한 차와 향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후 제자인 관휴(款休)가 행장을 정리하여 탑비가 건립되고 비문이 찬술되었다.
관련항목
주석
- ↑ 신라시대의 관등. 17등 관계 중의 제3등 관계로,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관등이었으며 공복(公服)의 빛깔은 자색(紫色)이었다. "잡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 비문에서는 이 시기를 지학(志學)이라고 표현하였다.("年餘志學學佛是圖落采於緣虛律師") 따라서 수철은 대략 829년 경에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
- ↑ 김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처용가에서 경주를 동경이라 하여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음. 고려시대의 동원경 용례를 참고하여 명주로 보기도 함.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16쪽 각주33번.
- ↑ 官壇이 있어 郎空大師도 여기서 구족계를 받음(「太子師 郎空大師塔碑」). 구체적 위치는 미상이지만 명주 관내에 있었다고 보기도 함.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16쪽 각주34번.
- ↑ 수철이 처음으로 홍척을 만난 장소에 대해서는 비문의 해석에 따라 ①설악산, ②실상사, ③경주로 보는 견해가 있다. ①설악산으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추만호, 「심원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의 금석학적 분석」, 『역사민속학』제1책, 한국역사민속학회, 1991.로, 비문에서 언급된 "실상선정(實相禪庭)"을 "실상선정국사"라는 홍척의 호칭으로 해석하여, 수철은 설악산에서 홍척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②실상사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로, 비문에서 언급된 "실상선정(實相禪庭)"을 실상사라는 장소로 해석하여 수철은 실상사에서 홍척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③경주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정선종, 「실상사 수철화상탑비의 음기와 중건에 대하여」, 『불교문화연구』제11책, 남도불교문화연구회, 2009.로, 비문에서 언급된 "□□□師"(8행 17~20열)를 홍척을 가리키는 "證覺□師"로 판독하여, 수철은 홍척이 도읍인 경주에 왔을 때 처음으로 만났다고 주장한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지실사(知實寺)를 지금의 실상사(實相寺)로 비정하고, 수철에 의해 실상사의 사역이 확장되었다는 의미에서 사축(私築)을 해석하기도 한다.(추만호, 「심원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의 금석학적 분석」, 『역사민속학』제1책, 한국역사민속학회, 1991., 정동락, 「수철화상(815~893)과 신라왕실」, 『한국고대사탐구』제3책,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09.)
- ↑ 정동락, 「수철화상(815~893)과 신라왕실」, 『한국고대사탐구』제3책,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09, 102쪽.
- ↑ 단의장옹주에 의해 기증된 절은 연구자에 따라 '영원사(瑩原寺)'로 판독하기도 한다.(최경선, 「「영원사수철화상비」의 판독과 찬자·서자에 대한 검토-신라 마 당 관제의 수용과 정치운영과 관련하여-」, 『역사와현실』제101책, 한국역사연구회, 2016, 211쪽.)
- ↑ 『화엄경(華嚴經)』의 십지품(十地品)에 해당하는 같은 내용을 다룬 단일 불교경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십지경"
- ↑ 신라시대 국가제사 가운데 대사(大祀)의 대상이 되었던 왕도 및 주변의 세 개의 산으로, 습비부(習比部: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의 동쪽 및 동남쪽)의 나력(奈歷, 또는 奈林), 절야화군(切也火郡: 지금의 경상북도 永川)의 골화(骨火), 대성군(大城郡: 지금의 경상북도 淸道로 추정)의 혈례(穴禮)가 그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라삼산") 그러나 비문에서 언급된 삼산이 이 삼산을 가리키는지는 명확하지 않다.(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18쪽, 주85번.)
- ↑ 수철이 입적한 곳이 법운사인지 심원사인지 분명하지 않은데, 비문 내용으로 보아 법운사로 보이지만, 비제(碑題)에 '심원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철의 입적 소식을 들은 심원사에 머물던 이들이 추모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것으로 보아, 법운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보인다.(정동락, 「수철화상(815~893)과 신라왕실」, 『한국고대사탐구』제3책,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09, 1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