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기록화관 개관

"철릭"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잔글 (내용)
 
15번째 줄: 15번째 줄:
  
 
=='''내용'''==
 
=='''내용'''==
몽골족의 옷에서 유래하였으며, 몽골어의 ‘Terlig’을 음차한 것이기 때문에 한자로 ‘天益’, ‘天翼’, ‘帖裏’, ‘粘裏’, ‘添里’, ‘綴翼’ 등 다양한 표기가 나타난다. 상의와 치마[下裳]를 따로 재단한 다음 치마 윗부분에 주름을 잡아서 상의에 꿰매 이은 옷으로, [[주립|주립(朱笠)]], [[광다회|광다회(廣多繪)]], [[화|화(靴)]]와 함께 일습을 이루어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왕]]의 행행(行幸)이나 전쟁에 착용하였다. 양쪽 소매 혹은 한쪽 소매에 매듭단추를 달아 소매를 떼었다 붙였다할 수 있도록 만들어 활동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철릭]]의 상의 부분과 치마 부분의 길이 비율이 달라져 두 부분을 열견하는 허리선의 위치는 [[철릭]]의 시대를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상의와 하상의 비율을 보면 15세기에는 상의가 하상보다 길었고, 16세기에는 상의와 하상의 비례가 비슷해지면서 하상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18세기에는 상의의 길이가 많이 길어졌으며, 19세기와 20세기의 조선후기로 갈수록 상의에 비해 하상의 길이가 길어진다. 소매는 조선시대 복식의 흐름과 같이 후대로 갈수록 소매통이 넓어진다. 소매는 분리되지 않고 연속으로 붙어 있는형태와 분리형이 있는데, 시침과 단추, 끈 등으로 소매를 연결한다. 헤지기 쉬운 어깨에 천을 덧대는 어깨바대는 모양에 따라 H형, U형, 一형이 있다. 치마의 허리부분 주름은 0.2㎝ 내외로 가늘게 잡기도 하고, 2~3㎝ 정도로 넓게 잡기도 한다.<ref>금종숙, 「朝鮮時代 철릭」,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132~143쪽.</ref>  
+
몽골족의 옷에서 유래하였으며, 몽골어의 ‘Terlig’을 음차한 것이기 때문에 한자로 ‘天益’, ‘天翼’, ‘帖裏’, ‘粘裏’, ‘添里’, ‘綴翼’ 등 다양한 표기가 나타난다. 상의와 치마[下裳]를 따로 재단한 다음 치마 윗부분에 주름을 잡아서 상의에 꿰매 이은 옷으로, [[주립|주립(朱笠)]], [[광다회|광다회(廣多繪)]], [[화|화(靴)]]와 함께 일습을 이루어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왕]]의 행행(行幸)이나 전쟁에 착용하였다. 양쪽 소매 혹은 한쪽 소매에 매듭단추를 달아 소매를 떼었다 붙였다할 수 있도록 만들어 활동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후대로 갈수록 [[철릭]]의 상의 부분과 치마 부분의 길이 비율이 달라져 두 부분을 열견하는 허리선의 위치는 [[철릭]]의 시대를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15세기에는 상의가 하상보다 길었고, 16세기에는 상의와 하상의 비례가 비슷해지면서 하상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18세기에는 상의의 길이가 많이 길어졌으며, 19세기와 20세기의 조선후기로 갈수록 상의에 비해 하상의 길이가 길어진다. 소매는 조선시대 복식의 흐름과 같이 후대로 갈수록 소매통이 넓어진다. 소매는 분리되지 않고 연속으로 붙어 있는형태와 분리형이 있는데, 시침과 단추, 끈 등으로 소매를 연결한다. 헤지기 쉬운 어깨에 천을 덧대는 어깨바대는 모양에 따라 H형, U형, 一형이 있다. 치마의 허리부분 주름은 0.2㎝ 내외로 가늘게 잡기도 하고, 2~3㎝ 정도로 넓게 잡기도 한다.<ref>금종숙, 「朝鮮時代 철릭」,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132~143쪽.</ref>  
 
<br />
 
<br />
 
<br />
 
<br />

2017년 12월 18일 (월) 20:40 기준 최신판


철릭
(帖裏)
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
대표명칭 철릭
한자표기 帖裏
이칭별칭 天益, 天翼, 粘裏, 添里, 綴翼
구분 의복
착용신분 , 왕세자, 백관
착용성별 남성



정의

조선시대 , 왕세자, 백관이 군대와 군사에 관한 일이 있을 때 주로 착용한 포(袍)로, 백관의 공복에 받침옷 혹은 백관의 편복으로 착용하는 옷이다.[1]

내용

몽골족의 옷에서 유래하였으며, 몽골어의 ‘Terlig’을 음차한 것이기 때문에 한자로 ‘天益’, ‘天翼’, ‘帖裏’, ‘粘裏’, ‘添里’, ‘綴翼’ 등 다양한 표기가 나타난다. 상의와 치마[下裳]를 따로 재단한 다음 치마 윗부분에 주름을 잡아서 상의에 꿰매 이은 옷으로, 주립(朱笠), 광다회(廣多繪), 화(靴)와 함께 일습을 이루어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의 행행(行幸)이나 전쟁에 착용하였다. 양쪽 소매 혹은 한쪽 소매에 매듭단추를 달아 소매를 떼었다 붙였다할 수 있도록 만들어 활동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후대로 갈수록 철릭의 상의 부분과 치마 부분의 길이 비율이 달라져 두 부분을 열견하는 허리선의 위치는 철릭의 시대를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15세기에는 상의가 하상보다 길었고, 16세기에는 상의와 하상의 비례가 비슷해지면서 하상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18세기에는 상의의 길이가 많이 길어졌으며, 19세기와 20세기의 조선후기로 갈수록 상의에 비해 하상의 길이가 길어진다. 소매는 조선시대 복식의 흐름과 같이 후대로 갈수록 소매통이 넓어진다. 소매는 분리되지 않고 연속으로 붙어 있는형태와 분리형이 있는데, 시침과 단추, 끈 등으로 소매를 연결한다. 헤지기 쉬운 어깨에 천을 덧대는 어깨바대는 모양에 따라 H형, U형, 一형이 있다. 치마의 허리부분 주름은 0.2㎝ 내외로 가늘게 잡기도 하고, 2~3㎝ 정도로 넓게 잡기도 한다.[2]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9세기에는 백관의 군복융복이 존재하나 군(軍)과 융(戎)의 의미가 동일하여 구분할 필요가 없으니, 소매가 넓은 철릭을 없애자는 상소문이 등장한다.[3] 임진왜란 전 행행(行幸)에는 융복을 착용했는데, 정조대에는 군복을 입은 기록이 있어 융복군복으로 대체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4] 순조대에는 융복과 군복 중 버려야한다면 군복을 폐지하자고 하였고,[5] 고종대에는 융복을 군복으로 대체하라는 기록도 있다.[6] 철릭백관의 융복이자 상복단령의 받침옷으로, 의 행차나 시위(侍衛) 시에 착용하였고 비상시에는 단령 등의 관복에 받쳐 입다 단령을 벗고 전투복으로서의 기능을 했던 옷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종대에 들어와 서양식 군복을 착용하면서 철릭도 사라지게 되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철릭 A는 B를 착용한다 A ekc:wears B
왕세자 철릭 A는 B를 착용한다 A ekc:wears B
백관 철릭 A는 B를 착용한다 A ekc:wears B
왕의 융복 철릭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A dcterms:hasPart B
왕세자의 융복 철릭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A dcterms:hasPart B
백관의 융복 철릭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A dcterms:hasPart B
철릭 주립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A ekc:goesWith B
철릭 사모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A ekc:goesWith B
철릭 목화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A ekc:goesWith B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금종숙, 「朝鮮時代 철릭」,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132쪽.
  2. 금종숙, 「朝鮮時代 철릭」,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132~143쪽.
  3. 『正祖實錄』 17년(1793) 10월 8일: 「兵曹參判林濟遠上疏」
  4. 『正祖實錄』 24년(1800) 3월 17일: 「禮曹判書李晩秀啓言」
  5. 『純祖實錄』 34년(1834) 4월 29일: 「左議政沈象奎啓言」
  6. 『高宗實錄』 20년(1883) 1월 28일: 「敎」
  7. 국립민속박물관(http://www.nfm.go.kr/) 소장.
  8.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museum.dankook.ac.kr/) 소장.
  9.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정사공신 신경유공 묘 출토복식』,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8, 20쪽.
  10.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museum.dankook.ac.kr/) 소장.
  11.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 금종숙, 「朝鮮時代 철릭」,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 금종숙, 「조선시대 철릭의 형태 및 바느질법 연구-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김지혜ㆍ최정욱, 「철릭의 디자인 현대화에 관한 연구」, 『한복문화』 제11권 3호, 한복문화학회, 2008.
  • 金贊珠, 「철릭에 關한 服飾史的 硏究」,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0.
  • 文明姬, 「帖裏에 關한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
  • 이순자, 「帖裏에 관한 再考論」, 『복식문화연구』 9권 2호, 복식문화학회, 2001.
  • 이은주, 「철릭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한국의류학회지』 13권 4호, 한국의류학회, 1989.
  • 이은주, 「철릭의 명칭에 관한 연구」, 『한국의류학회지』 12권 3호, 한국의류학회, 1988.
  • 李恩珠, 「16세기 전기 철릭의 구성법 일례 -金欽祖(1461~1528)분묘 출토의 철릭을 중심으로-」, 『복식문화연구』 7권 2호, 복식문화학회, 1999.
  • 장인우, 「조선시대 첩리의 명칭과 유형에 관한 연구」, 『대한가정학회지』 제35권 1호, 대한가정학회, 1997.
  • 장인우, 「조선중기 솜텰릭(帖裏) 구성에 대하여 –순천김씨묘 갈색명주 솜누비 털릭 중심으로-」, 『服飾』 52권 8호, 한국복식학회, 2002.
  • 홍나영, 「출토복식을 통해서 본 조선시대 남자 편복포의 시대구분」, 『服飾』 58권 5호, 한국복식학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