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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송시열 복건.jpg
 
|사진=송시열 복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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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1607(선조 40)∼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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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선조 40)∼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내용==
 
==내용==
==={{PAGENAME}}의 가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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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가계에 대해서===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봉사(奉事) 송구수(宋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송갑조(宋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로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봉사(奉事) 송구수(宋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송갑조(宋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로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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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NAME}}의 생애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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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생애와 활동===
===={{PAGENAME}}의 어린시절과 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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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어린시절과 학업====
 
충청도 옥천군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주자(朱子)]]·[[이이|이이(李珥)]]·[[조광조|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충청도 옥천군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주자(朱子)]]·[[이이|이이(李珥)]]·[[조광조|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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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NAME}}의 초기 관직생활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낙향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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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초기 관직생활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낙향생활====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조선 효종|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조선 효종|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조선 효종|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조선 효종|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조선 효종|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조선 효종|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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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효종|효종]]의 즉위와 {{PAGENAME}}의 활약상 그러나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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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효종|효종]]의 즉위와 [[송시열]]의 활약상 그러나 좌절====
1649년 [[조선 효종|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PAGENAME}}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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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9년 [[조선 효종|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송시열]]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PAGENAME}}이 올린 「[[기축봉사|기축봉사(己丑封事)]]」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중화(中華)를 명나라로 이적(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조선 효종|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PAGENAME}}을 포함한 [[산당|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효종 6)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鄕里)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조선 효종|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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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기축봉사(己丑封事)]]」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중화(中華)를 명나라로 이적(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조선 효종|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효종 6)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鄕里)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조선 효종|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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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과 [[조선 현종|현종]] 시기의 활약====
 
====[[예송논쟁]]과 [[조선 현종|현종]] 시기의 활약====
그러나 1659년 5월 [[조선 효종|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조선 현종|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조선 현종|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PAGENAME}}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PAGENAME}}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조선 효종|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PAGENAME}}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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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659년 5월 [[조선 효종|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조선 현종|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조선 현종|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송시열]]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조선 효종|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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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NAME}}의 [[조선 숙종|숙종]] 시기 활동과 죽음을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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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조선 숙종|숙종]] 시기 활동과 죽음을 맞이하다====
1682년(숙종 8) [[김석주|김석주(金錫胄)]]·[[김익훈|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술삼고변|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장희빈|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PAGENAME}}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PAGENAME}}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 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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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2년(숙종 8) [[김석주|김석주(金錫胄)]]·[[김익훈|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술삼고변|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장희빈|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 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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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예송 논쟁과 {{PAGE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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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 논쟁과 [[송시열]]===
====[[예송논쟁|1차 예송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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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예송]]====
*1659년 5월 [[조선 효종|효종]]이 죽자, 계모인 [[자의대비|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의 상복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 만 1년)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조선 인조|인조]]의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조선 효종|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차자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이 때 [[윤휴|윤휴(尹鑴)]]는 『[[의례|의례(儀禮)]]』 상복편의 소설(疏說)인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 ”는 근거에 의하여 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속이 참최(斬衰)를 입는다는 설에 의하여 참최를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PAGENAME}}은 『[[의례|의례(儀禮)]]』의 소설에 “서자(庶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 ”는 예외 규정[四種說]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서자는 첩자(妾子)의 칭호이기도 하고,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국왕의 상에 친속들이 3년복을 입는 것은 신하로서의 복을 입는 것인데, 어머니인 대비는 아들인 왕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윤휴의 참최설을 배척하였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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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년 5월 [[조선 효종|효종]]이 죽자, 계모인 [[자의대비|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의 상복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 만 1년)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조선 인조|인조]]의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조선 효종|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차자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이 때 [[윤휴|윤휴(尹鑴)]]는 『[[의례|의례(儀禮)]]』 상복편의 소설(疏說)인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 ”는 근거에 의하여 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속이 참최(斬衰)를 입는다는 설에 의하여 참최를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의례|의례(儀禮)]]』의 소설에 “서자(庶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 ”는 예외 규정[四種說]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서자는 첩자(妾子)의 칭호이기도 하고,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국왕의 상에 친속들이 3년복을 입는 것은 신하로서의 복을 입는 것인데, 어머니인 대비는 아들인 왕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윤휴의 참최설을 배척하였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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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태화|정태화(鄭太和)]] 등 대신들은 『[[의례|의례(儀禮)]]』에 근거한 두 설을 다 취하지 않고, 『[[대명률|대명률(大明律)]]』과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에 장자·차자 구분없이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즉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1660년 3월 [[허목|허목(許穆)]]이 또 차장자설을 주장하여 3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리고 [[윤선도|윤선도(尹善道)]]는 기년설이 “[[조선 효종|효종]]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적통과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드는 설”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PAGENAME}}과 [[송준길]]은 ‘참최는 두 번 입지 않는다(不貳斬)’는 설과 서자가 첩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설을 논증하고, 차장자설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제1자가 죽고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간주하는 경우는 제1자가 미성년에 죽었을 때뿐이라고 단정하였다.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으나 기년설은 번복되지 않았고, 윤선도 등 [[남인]]들은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축출되었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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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태화|정태화(鄭太和)]] 등 대신들은 『[[의례|의례(儀禮)]]』에 근거한 두 설을 다 취하지 않고, 『[[대명률|대명률(大明律)]]』과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에 장자·차자 구분없이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즉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1660년 3월 [[허목|허목(許穆)]]이 또 차장자설을 주장하여 3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리고 [[윤선도|윤선도(尹善道)]]는 기년설이 “[[조선 효종|효종]]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적통과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드는 설”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참최는 두 번 입지 않는다(不貳斬)’는 설과 서자가 첩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설을 논증하고, 차장자설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제1자가 죽고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간주하는 경우는 제1자가 미성년에 죽었을 때뿐이라고 단정하였다.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으나 기년설은 번복되지 않았고, 윤선도 등 [[남인]]들은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축출되었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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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2차 예송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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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예송]]====
*1674년(현종 15) 2월에는 [[조선 효종|효종]]의 비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의 죽음으로 [[자의대비]]의 복제가 또 한 번 문제가 되었는데, 이것이 2차 예송인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이다. 역시 이전의 예송과 같은 구도로 서인은 9개월 설을, [[남인]]은 1년 설을 주장한 가운데 [[조선 현종|현종]]이 이번에는 [[남인]]의 예설이 옳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리고 곧 [[조선 현종|현종]]이 승하하고 [[조선 숙종|숙종]]이 즉위하였다. {{PAGENAME}}은 다시 서울로 올라갔으나 그의 예설이 종통의 순서를 어지럽힌다며 엄한 처벌을 주장하는 [[곽세건|곽세건(郭世楗)]]을 비롯한 [[남인]]들의 비판으로 결국 유배되었다. 이 유배지에서 {{PAGENAME}}은 주자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을 편찬하였다. <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6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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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현종 15) 2월에는 [[조선 효종|효종]]의 비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의 죽음으로 [[자의대비]]의 복제가 또 한 번 문제가 되었는데, 이것이 2차 예송인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이다. 역시 이전의 예송과 같은 구도로 서인은 9개월 설을, [[남인]]은 1년 설을 주장한 가운데 [[조선 현종|현종]]이 이번에는 [[남인]]의 예설이 옳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리고 곧 [[조선 현종|현종]]이 승하하고 [[조선 숙종|숙종]]이 즉위하였다. [[송시열]]은 다시 서울로 올라갔으나 그의 예설이 종통의 순서를 어지럽힌다며 엄한 처벌을 주장하는 [[곽세건|곽세건(郭世楗)]]을 비롯한 [[남인]]들의 비판으로 결국 유배되었다. 이 유배지에서 [[송시열]]은 주자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을 편찬하였다. <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6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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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NAME}}은 ‘예를 그르친 죄’를 입고 파직 삭출되었다가 변방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PAGENAME}}의 예론은 『[[의례(儀禮)]]』에 근거를 두고 전개되기는 했으나, 대체로 “제왕가의 예도 사서인(士庶人)과 다르지 않다.”는 성리학적 보편주의 예학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에 즉위, 종묘를 주관했던 [[조선 효종|효종]]의 제왕적 특수성과는 관계없이 차자라는 출생의 차서만이 중시되었다. 이 때문에 {{PAGENAME}}의 본의와는 달리 왕실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두 갈래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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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은 ‘예를 그르친 죄’를 입고 파직 삭출되었다가 변방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송시열]]의 예론은 『[[의례(儀禮)]]』에 근거를 두고 전개되기는 했으나, 대체로 “제왕가의 예도 사서인(士庶人)과 다르지 않다.”는 성리학적 보편주의 예학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에 즉위, 종묘를 주관했던 [[조선 효종|효종]]의 제왕적 특수성과는 관계없이 차자라는 출생의 차서만이 중시되었다. 이 때문에 [[송시열]]의 본의와는 달리 왕실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두 갈래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0898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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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효종|효종]] 과 {{PAGENAME}}의 [[북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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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효종|효종]] 과 [[송시열]]의 [[북벌론]]===  
  
[[조선 효종|효종]]은 즉위 이래 [[청나라]]를 실질적으로 정벌하기 위해 군사적 준비에 몰두하였다. 현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북벌’의 이미지는 바로 [[조선 효종|효종]]이 추진한 북벌이었다. 그러나 {{PAGENAME}}이 생각하는 북벌은 [[조선 효종|효종]]의 그것과는 달랐다. {{PAGENAME}}이 보기에 [[청나라|청]]을 무력으로 치는 것은 올바른 복수의 방법이 아니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민생의 고통이 극심한 상태에서의 군비확충은 확실히 왕도정치가 아닌 패도정치였다. {{PAGENAME}}은 유가의 정치문화에서 이상적인 시대로 여기는 중국 삼대로 상징되는 왕도정치를 위한 내수외양, 즉 민생을 먼저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북벌론의 핵심이자, 춘추대의를 실천하는 방법이었다. {{PAGENAME}}의 이와 같은 생각은 1657년(효종 8) 8월 사직소의 형식으로 올린 「[[정유봉사]]」에 잘 드러나 있다.<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6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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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효종|효종]]은 즉위 이래 [[청나라]]를 실질적으로 정벌하기 위해 군사적 준비에 몰두하였다. 현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북벌’의 이미지는 바로 [[조선 효종|효종]]이 추진한 북벌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생각하는 북벌은 [[조선 효종|효종]]의 그것과는 달랐다. [[송시열]]이 보기에 [[청나라|청]]을 무력으로 치는 것은 올바른 복수의 방법이 아니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민생의 고통이 극심한 상태에서의 군비확충은 확실히 왕도정치가 아닌 패도정치였다. [[송시열]]은 유가의 정치문화에서 이상적인 시대로 여기는 중국 삼대로 상징되는 왕도정치를 위한 내수외양, 즉 민생을 먼저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북벌론의 핵심이자, 춘추대의를 실천하는 방법이었다. [[송시열]]의 이와 같은 생각은 1657년(효종 8) 8월 사직소의 형식으로 올린 「[[정유봉사]]」에 잘 드러나 있다.<ref>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6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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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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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6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이민정,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6 송시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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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6일 (일) 23:36 기준 최신판


송시열(宋時烈)
"송시열 초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송시열
한자표기 宋時烈
생몰년 1607년-1689년
본관 은진(恩津)
이칭 성뢰(聖賚)
시호 문정(文正)
우암(尤菴) , 우재(尤齋)
영보(英甫)
시대 조선시대
국적 조선
대표저서 주자대전차의
대표직함 좌의정
송갑조(宋甲祚)
성격 문신
유형 문인



정의

1607(선조 40)∼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내용

송시열의 가계에 대해서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봉사(奉事) 송구수(宋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로 봉사 곽자방(郭自防)의 딸이다.[1]

송시열의 생애와 활동

송시열의 어린시절과 학업

충청도 옥천군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2]

송시열의 초기 관직생활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낙향생활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3]

효종의 즉위와 송시열의 활약상 그러나 좌절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송시열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중화(中華)를 명나라로 이적(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효종 6)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鄕里)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4]

예송논쟁현종 시기의 활약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송시열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5]

송시열숙종 시기 활동과 죽음을 맞이하다

1682년(숙종 8)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 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6]

예송 논쟁과 송시열

기해예송

  • 1659년 5월 효종이 죽자,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의 상복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 만 1년)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인조의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을 적장자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차자로 간주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이 때 윤휴(尹鑴)는 『의례(儀禮)』 상복편의 소설(疏說)인 “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 ”는 근거에 의하여 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속이 참최(斬衰)를 입는다는 설에 의하여 참최를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의례(儀禮)』의 소설에 “서자(庶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 ”는 예외 규정[四種說]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서자는 첩자(妾子)의 칭호이기도 하고,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국왕의 상에 친속들이 3년복을 입는 것은 신하로서의 복을 입는 것인데, 어머니인 대비는 아들인 왕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윤휴의 참최설을 배척하였다.[7]


  •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태화(鄭太和) 등 대신들은 『의례(儀禮)』에 근거한 두 설을 다 취하지 않고, 『대명률(大明律)』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장자·차자 구분없이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즉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1660년 3월 허목(許穆)이 또 차장자설을 주장하여 3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리고 윤선도(尹善道)는 기년설이 “효종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적통과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드는 설”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송준길은 ‘참최는 두 번 입지 않는다(不貳斬)’는 설과 서자가 첩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설을 논증하고, 차장자설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제1자가 죽고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간주하는 경우는 제1자가 미성년에 죽었을 때뿐이라고 단정하였다. 이 문제로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으나 기년설은 번복되지 않았고, 윤선도 등 남인들은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축출되었다.[8]

갑인예송

  • 1674년(현종 15) 2월에는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죽음으로 자의대비의 복제가 또 한 번 문제가 되었는데, 이것이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다. 역시 이전의 예송과 같은 구도로 서인은 9개월 설을, 남인은 1년 설을 주장한 가운데 현종이 이번에는 남인의 예설이 옳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리고 곧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였다. 송시열은 다시 서울로 올라갔으나 그의 예설이 종통의 순서를 어지럽힌다며 엄한 처벌을 주장하는 곽세건(郭世楗)을 비롯한 남인들의 비판으로 결국 유배되었다. 이 유배지에서 송시열은 주자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을 편찬하였다. [9]
  • 송시열은 ‘예를 그르친 죄’를 입고 파직 삭출되었다가 변방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송시열의 예론은 『의례(儀禮)』에 근거를 두고 전개되기는 했으나, 대체로 “제왕가의 예도 사서인(士庶人)과 다르지 않다.”는 성리학적 보편주의 예학의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에 즉위, 종묘를 주관했던 효종의 제왕적 특수성과는 관계없이 차자라는 출생의 차서만이 중시되었다. 이 때문에 송시열의 본의와는 달리 왕실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두 갈래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10]

효종송시열북벌론

효종은 즉위 이래 청나라를 실질적으로 정벌하기 위해 군사적 준비에 몰두하였다. 현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북벌’의 이미지는 바로 효종이 추진한 북벌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생각하는 북벌은 효종의 그것과는 달랐다. 송시열이 보기에 을 무력으로 치는 것은 올바른 복수의 방법이 아니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민생의 고통이 극심한 상태에서의 군비확충은 확실히 왕도정치가 아닌 패도정치였다. 송시열은 유가의 정치문화에서 이상적인 시대로 여기는 중국 삼대로 상징되는 왕도정치를 위한 내수외양, 즉 민생을 먼저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북벌론의 핵심이자, 춘추대의를 실천하는 방법이었다. 송시열의 이와 같은 생각은 1657년(효종 8) 8월 사직소의 형식으로 올린 「정유봉사」에 잘 드러나 있다.[11]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송갑조 송시열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서인 노론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서인 소론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서인 송시열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산당 송시열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북벌론 송시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북벌론 효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북벌론 김자점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북벌론 산당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장생 송시열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김집 송시열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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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예송 허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갑인예송 윤선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경신환국 숙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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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삼고변 김석주 A는 B를 주도하였다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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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삼고변 남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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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 송시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기사환국 숙의 장씨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기사환국 남인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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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예송 인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송시열 고산구곡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송시열 고산유고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송시열 분재 편지 송시열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곤범 송시열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우암계녀서 송시열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송시열 신간구황촬요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659년 송시열기해예송 과 관련이 있다
1674년 송시열2차 예송논쟁 과 관련이 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5.566411 127.512186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은 장소에 송시열 수명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이영춘, "송시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영춘, "송시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영춘, "송시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이영춘, "송시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이영춘, "송시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이영춘, "송시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이영춘, "송시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이영춘, "송시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이민정, "송시열",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0. 이영춘, "송시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이민정, "송시열",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정경훈,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남명조선생신도비(南冥曺先生神道碑)』 연구(硏究)」, 『南冥學硏究』, Vol 40, 2013, 95-117쪽.
    • 김문준, 「송시열의 춘추사상과 정몽주 추숭의 의의」, 『포은학연구』, Vol 17, 2016, 33-62쪽.
    • 김남이, 「17세기 사대부의 『주자가례』에 대한인식과 일상에서의 예 실천<우암 송시열의 경우를 중심으로> 」, 『정신문화연구』, Vol 29, 2006, 99-124쪽.
    • 방상근, 「17세기 조선의 예(禮) 질서의 재건(再建)과 송시열(宋時烈)」, 『동양정치사상사』, Vol 16, 2017, 123-154쪽.

유용한 정보

  • 이영춘, "송시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민정, "송시열",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