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기록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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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관]]은 반원형태로 대나무살이나 금속실을 엮어 그 틀을 만든 후 그 위에 온갖 장식을 올린 후 [[금비녀|금비녀[金簪]]]와 금으로 만든 꿩 장식[金翟] 등을 꽂아서 고정하였다. 금적은 '결자(結子)'라고 하는 화려한 구슬 꾸러미를 물고 있다. 관의 가장 아래 부분은 비취의 깃털로 장식된 구권(口圈)을 두르고, 구권 위에는 여러 개의 보전화(寶鈿花)를 올렸는데, 이와 같은 양식은 [[대수|대수(大首)]]의 장식인 [[대요반자]]에서도 발견된다.<ref>김지연·홍나영, 「조선시대 적관(翟冠)에 관한 연구」『服飾』60권 7호, 한국복식학회, 2010, 8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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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관]]은 반원형태로 대나무살이나 금속실을 엮어 그 틀을 만든 후 그 위에 온갖 장식을 올린 후 [[금비녀|금비녀[金簪]]]와 금으로 만든 꿩 장식[金翟] 등을 꽂아서 고정하였다. 금적은 '결자(結子)'라고 하는 화려한 구슬 꾸러미를 물고 있다. 관의 가장 아래 부분은 비취의 깃털로 장식된 구권(口圈)을 두르고, 구권 위에는 여러 개의 보전화(寶鈿花)를 올렸는데, 이와 같은 양식은 [[대수|대수(大首)]]의 장식인 [[대요반자]]에서도 발견된다.<ref>김지연·홍나영, 「조선시대 적관(翟冠)에 관한 연구」,『服飾』 60권 7호, 한국복식학회, 2010, 8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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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1403년(태종3)에 처음으로 [[왕비의 대례복]] 일습이 사여되면서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을 받았고 이를 시작으로 [[세종]], [[연산군]], [[인종]]대를 제외하고, 1625년(인조 3)까지 사여되었다.<ref>김지연·홍나영, 「조선시대 적관(翟冠)에 관한 연구」『服飾』60권 7호, 한국복식학회, 2010, 79쪽.</ref>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더 이상 관복을 사여 받을 수 없게 되면서 적관 대신 체발과 비녀를 이용하여 [[대수|대수(大首)]]로 정착되었다. 조선시대에 명으로부터 사여받은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은 7마리의 꿩장식으로 꾸며져있고, 대한제국시기의 구룡사봉관(九龍四鳳冠) 9마리의 용과 4마리 봉황으로 꾸며져 있으며 [[사모]]의 뿔과 같은 형태의 박빈(博鬢)이 더해져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시기에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대한예전』에는 중국 황후의 관모 제도와 같은 구룡사봉관(九龍四鳳冠)을 착용하도록 새로 제정하였으나 시행 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ref>김지연·홍나영, 「조선시대 적관(翟冠)에 관한 연구」『服飾』60권 7호, 한국복식학회, 2010, 7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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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1403년(태종3)에 처음으로 [[왕비의 대례복]] 일습이 사여되면서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을 받았고 이를 시작으로 [[세종]], [[연산군]], [[인종]]대를 제외하고, 1625년(인조 3)까지 사여되었다.<ref>김지연·홍나영, 「조선시대 적관(翟冠)에 관한 연구」『服飾』60권 7호, 한국복식학회, 2010, 79쪽.</ref>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더 이상 관복을 사여 받을 수 없게 되면서 적관 대신 체발과 비녀를 이용하여 [[대수|대수(大首)]]로 정착되었다. 조선시대에 명으로부터 사여받은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은 7마리의 꿩장식으로 꾸며져있고, 대한제국시기의 구룡사봉관(九龍四鳳冠) 9마리의 용과 4마리 봉황으로 꾸며져 있으며 [[사모]]의 뿔과 같은 형태의 박빈(博鬢)이 더해져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시기에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대한예전』에는 중국 황후의 관모 제도와 같은 구룡사봉관(九龍四鳳冠)을 착용하도록 새로 제정하였으나 시행 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ref>김지연·홍나영, 「조선시대 적관(翟冠)에 관한 연구」, 『服飾』 60권 7호, 한국복식학회, 2010, 75쪽.</ref>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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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5일 (수) 00:19 판


적관
(翟冠)
『대한예전』
대표명칭 적관
한자표기 翟冠
구분 관 및 쓰개
착용신분 왕비, 왕세자빈
착용성별 여성



정의

조선시대 왕비왕세자빈혼례책례 등의 국가 행사에 적의를 입을 때 쓰는 관이다.[1]

내용

적관은 반원형태로 대나무살이나 금속실을 엮어 그 틀을 만든 후 그 위에 온갖 장식을 올린 후 금비녀[金簪]와 금으로 만든 꿩 장식[金翟] 등을 꽂아서 고정하였다. 금적은 '결자(結子)'라고 하는 화려한 구슬 꾸러미를 물고 있다. 관의 가장 아래 부분은 비취의 깃털로 장식된 구권(口圈)을 두르고, 구권 위에는 여러 개의 보전화(寶鈿花)를 올렸는데, 이와 같은 양식은 대수(大首)의 장식인 대요반자에서도 발견된다.[2]

조선시대에는 1403년(태종3)에 처음으로 왕비의 대례복 일습이 사여되면서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을 받았고 이를 시작으로 세종, 연산군, 인종대를 제외하고, 1625년(인조 3)까지 사여되었다.[3]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더 이상 관복을 사여 받을 수 없게 되면서 적관 대신 체발과 비녀를 이용하여 대수(大首)로 정착되었다. 조선시대에 명으로부터 사여받은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은 7마리의 꿩장식으로 꾸며져있고, 대한제국시기의 구룡사봉관(九龍四鳳冠) 9마리의 용과 4마리 봉황으로 꾸며져 있으며 사모의 뿔과 같은 형태의 박빈(博鬢)이 더해져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시기에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대한예전』에는 중국 황후의 관모 제도와 같은 구룡사봉관(九龍四鳳冠)을 착용하도록 새로 제정하였으나 시행 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왕비 적관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왕세자비 적관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왕세손빈 적관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왕비의 대례복 적관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A dcterms:hasPart B
왕세자빈의 대례복 적관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A dcterms:hasPart B
왕세손빈의 대례복 적관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A dcterms:hasPart B
적관 의궤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A ekc:mentions B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강순제·김미자·김정호·백영자·이은주·조우현·조효숙·홍나영, 『한국복식사전』, 민속원, 2015, 614쪽.
  2. 김지연·홍나영, 「조선시대 적관(翟冠)에 관한 연구」,『服飾』 60권 7호, 한국복식학회, 2010, 85쪽.
  3. 김지연·홍나영, 「조선시대 적관(翟冠)에 관한 연구」『服飾』60권 7호, 한국복식학회, 2010, 79쪽.
  4. 김지연·홍나영, 「조선시대 적관(翟冠)에 관한 연구」, 『服飾』 60권 7호, 한국복식학회, 2010, 75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강순제·김미자·김정호·백영자·이은주·조우현·조효숙·홍나영, 『한국복식사전』, 민속원, 2015.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 金貞振 白英子, 「조선시대 嘉禮都監儀軌의 班次圖에 나타난 服飾 硏究」, 『한국의류학회지 14권 2호』, 한국의류학회, 1990.
  • 김지연·홍나영, 「조선시대 적관(翟冠)에 관한 연구」, 『服飾』 60권 7호, 한국복식학회, 2010.
  • 유희경, 「李朝末 女子禮服에 대한 小考」, 『대한가정학회지』 9권 1호, 대한가정학회, 1971.
  • 李京子, 「嘉禮都監儀軌의 服飾 硏究」, 『服飾』 1권, 한국복식학회, 1977.

더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