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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집의 편찬과 망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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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박훈평, 「새로 발견된 조선전기 의학서 《胎産集要》 연구」, 『장서각』36, 2016, 26쪽.</ref>
 
<ref>박훈평, 「새로 발견된 조선전기 의학서 《胎産集要》 연구」, 『장서각』36, 2016, 26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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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집]]의 저자===
기존 연구에서 『[[태산요록|태산요록(胎産要錄)]]』과 『{{PAGENAME}}(胎産集)』는 같은 책으로 여겨졌고, 당연히 『{{PAGENAME}}』의 저자도 [[노중례|노중례(盧重禮)]]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PAGENAME}}』가 활용되던 당시의 문헌 기록이 [[노중례]] 저작 설을 부정한다. 『[[경국대전주해|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는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의 주해서로 1553년(명종 9)에 완성되고 1554년(명종 10)에 간행되었다. 규장각 소장본이 유일본으로 알려져 있다가 1971년 일본 동양문고의 소장본 청주판본이 새롭게 알려졌다. 이 청주판본에서 전의감, 관상감 등 여러 기술직 관청의 관리선발에서 사용된 책들을 설명하는데, 여기에 “『[[창진집|창진집(瘡疹集)]]』과 『{{PAGENAME}}』는 우리나라의 [[임원준]]이 간행했다.”고 하여 『{{PAGENAME}}』의 저자를 [[임원준]]으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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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요록|태산요록(胎産要錄)]]』과 『[[태산집|태산집(胎産集)]]』은 같은 책으로 여겨졌다. 규장각 소장본이 유일본으로 알려져 있다가 1971년 일본 동양문고의 소장본 청주판본이 새롭게 알려졌다. 이 청주판본에서 전의감, 관상감 등 여러 기술직 관청의 관리선발에서 사용된 책들을 설명하는데, 여기에 “『[[창진집|창진집(瘡疹集)]]』과 『[[태산집]]』은 우리나라의 [[임원준]]이 간행했다.”고 하여 『[[태산집]]』의 저자를 [[임원준]]으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ref>박훈평, 「새로 발견된 조선전기 의학서 《胎産集要》 연구」, 『장서각』36, 2016, 11쪽.</ref>
 
<ref>박훈평, 「새로 발견된 조선전기 의학서 《胎産集要》 연구」, 『장서각』36, 2016, 1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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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NAME}}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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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NAME}}』는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저술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전문 분과의서이다. 『{{PAGENAME}}』 외에도 『産書』를 비롯한 산과 전문의서가 관주도로 여러 차례 간행된 것은 세종~중종 시기의 [[구급방]]과 [[창진방]]을 다룬 전문 의서들의 간행과 함께 눈여겨볼 점이다. 이들 의서를 통해 『[[의방유취|의방유취(醫方類聚)]]』에 축적된 지식을 원천으로 하여 분과의학이 발전해나가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또한 허준이 3종의 언해서를 간행하기이전, 즉 『[[의방유취|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 시기에 이미 '태산(胎産)', '구급(救急)', '창진(瘡疹:두창)'의 세 가지 분과의학이 국가에서 중요시하는 의학의 지위를 누리고 있음도 엿볼 수 있다.
 
『{{PAGENAME}}』는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저술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전문 분과의서이다. 『{{PAGENAME}}』 외에도 『産書』를 비롯한 산과 전문의서가 관주도로 여러 차례 간행된 것은 세종~중종 시기의 [[구급방]]과 [[창진방]]을 다룬 전문 의서들의 간행과 함께 눈여겨볼 점이다. 이들 의서를 통해 『[[의방유취|의방유취(醫方類聚)]]』에 축적된 지식을 원천으로 하여 분과의학이 발전해나가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또한 허준이 3종의 언해서를 간행하기이전, 즉 『[[의방유취|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 시기에 이미 '태산(胎産)', '구급(救急)', '창진(瘡疹:두창)'의 세 가지 분과의학이 국가에서 중요시하는 의학의 지위를 누리고 있음도 엿볼 수 있다.

2017년 10월 1일 (일) 03:31 판

태산집(胎産集)
"400년만에 찾은 조선시대 산과 의학서 '태산집요'", 『연합뉴스』online, 연합뉴스, 2016년 11월 6일.
대표명칭 태산집
한자표기 胎産集
이칭 태산집요
유형 고서
저자 임원준
간행시기 1472년
시대 조선


정의

1472년에 간행된 임원준이 산부인과에 대해 저술한 의서이다.

내용

태산집의 편찬과 소실

1434년 의관 노중례에 의해 『태산요록(胎産要錄)』편찬되었다. 이 책은 산모 당사자나 조산원 같은 보조 인력이 알아야 할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다.『태산요록』이 전문서로서 내용이 부족하여 『태산집』이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485년에 『경국대전』에서 의과시험 과목의 하나로 채택된다. 허준의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발문」을 보면 임진왜란을 거치며 소실된 의서 중 하나로 언급된다. [1] 『태산집』은 허준이 저술한 『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로 의료인을 위한 산과 전문의서라는 성격과 지위가 계승되었다. 그러나 허준은 『태산집』의 원문 자체를 인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

태산집의 저자

태산요록(胎産要錄)』과 『태산집(胎産集)』은 같은 책으로 여겨졌다. 규장각 소장본이 유일본으로 알려져 있다가 1971년 일본 동양문고의 소장본 청주판본이 새롭게 알려졌다. 이 청주판본에서 전의감, 관상감 등 여러 기술직 관청의 관리선발에서 사용된 책들을 설명하는데, 여기에 “『창진집(瘡疹集)』과 『태산집』은 우리나라의 임원준이 간행했다.”고 하여 『태산집』의 저자를 임원준으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3]

태산집의 의의

『태산집』는 조선시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저술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전문 분과의서이다. 『태산집』 외에도 『産書』를 비롯한 산과 전문의서가 관주도로 여러 차례 간행된 것은 세종~중종 시기의 구급방창진방을 다룬 전문 의서들의 간행과 함께 눈여겨볼 점이다. 이들 의서를 통해 『의방유취(醫方類聚)』에 축적된 지식을 원천으로 하여 분과의학이 발전해나가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또한 허준이 3종의 언해서를 간행하기이전, 즉 『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 시기에 이미 '태산(胎産)', '구급(救急)', '창진(瘡疹:두창)'의 세 가지 분과의학이 국가에서 중요시하는 의학의 지위를 누리고 있음도 엿볼 수 있다. [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태산집 언해태산집요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임원준 태산집 A는 B를 저술하였다 1472년
허준 언해태산집요 A는 B를 저술하였다 1608년
의방유취 태산집 A는 B와 관련이 있다
태산요록 태산집 A는 B와 관련이 있다
노중례 태산요록 A는 B를 저술하였다
태산집 경국대전 A는 B에 언급된다
경국대전주해 경국대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임원준 경국대전주해 A는 B에 언급된다
태산집 경국대전주해 A는 B에 언급된다
구급방 경국대전주해 A는 B에 언급된다
창진집 경국대전주해 A는 B에 언급된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472년 임원준 태산집을 저술하였다
1608년 허준이 『언해태산집요』를 저술하였다

주석

  1. 박훈평, 「새로 발견된 조선전기 의학서 《胎産集要》 연구」, 『장서각』36, 2016, 9-10쪽.
  2. 박훈평, 「새로 발견된 조선전기 의학서 《胎産集要》 연구」, 『장서각』36, 2016, 26쪽.
  3. 박훈평, 「새로 발견된 조선전기 의학서 《胎産集要》 연구」, 『장서각』36, 2016, 11쪽.
  4. 박훈평, 「새로 발견된 조선전기 의학서 《胎産集要》 연구」, 『장서각』36, 2016, 22쪽.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