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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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악(樂)·사()·어(御)·서(書)·수(數)로 나뉘는 육례(六藝)의 하나인 사(射)로, 활쏘기 의례이다.<ref>[http://hanja.naver.com/search?query=%E5%85%AD%E8%97%9D 육예]", 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한자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네이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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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례]]는 [[왕]]과 [[백관]]들의 활쏘기를 의식으로 양식화한 것이다. 고대에 [[젤{|제례(祭禮)]]를 위해 집사관(執事官)을 뽑을 때 활쏘기를 통해 과녁을 많이 맞춘 사람을 쓰던 데서 유래한다.
  
 
=='''내용'''==
 
=='''내용'''==
예(禮)는 '예용(禮容)', (樂)은 '음악(音樂), ()'활쏘기', 어(御)는 '말타기', 서()는 '그림', ()는 '수학(數學)'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3108&cid=40942&categoryId=31732 육예]", 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활쏘기는 고대의 의례를 이어받아 조선시대에도 군신과 사대부의 수양을 위한 의례로, 향사례(鄕射禮)와 더불어 중요한 의례로 [[국조오례의]]에도 정리되어 있다. [[대사례]]에서는 [[왕]]이 참석하는 활쏘기이기 때문에 '대()'붙인다. [[왕]][[백관]]이 함께 활을 쏘고, 활쏘기 시험으로 우수한 인재를 뽑았던 국가 의례였다. [[영조]]에 앞서 [[중종]]은 1534년(중종 29) 8월에 [[대사례]]를 거행했고, 200여년이 지난 후에 [[영조]]에 의해 다시 [[대사례]]가 이루어졌다. [[영조]]는 4발을 쏘아 3발을 맞추었는데, [[중종]]과 같이 맞춘 것에 기뻐하기도 했다. [[왕]]이 활을 쏜 뒤 [[백관]]들도 이어서 활쏘기를 하였고 과녁을 맞힌 결과에 따라 상과 벌주를 주었다.<ref>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 대사례와 향사례』, 국립민속박물관, 2009, 9~1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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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례의 유래와 상징'''<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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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활쏘기 의례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었다. 고대로부터 덕()이 많은 사람이 화살을 많이 명중시킨다는 관념 아래 발전한 의례였고, 나라에서 큰 제사를 지낼 때면 미리 활쏘기를 하여 많이 명중시킨 사람을 제사에 참여하도록[助祭者]하였다. 이러한 의식이 대사례로 발전한 것이다. 이런 관념 때문에 화살을 명중시키는 여부는 단순한 기예를 넘어서서, 활 쏘는 이의 덕행(德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에서는 [[중종]]때 [[대사례]]가 거행되었고, 1743년(영조 19)에 다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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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때 대사례와 『대사례의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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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3년(영조19) 윤4월 7일 [[영조]][[대사례]]를 거행한 후, 그 의식의 전모를 [[대사례의궤|『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규장각 소장)에 상세히 기록하였다. [[대사례]]는 [[성균관]]에서 거행되었는데, 본의식 전인 4월에 궁에서 세차례 습의(習儀: 예행연습)를 거행하고 마지막 습의는 [[영조]]가 친히 관람한다. 활쏘기 참여자는 [[영조]] 외에 종친 및 왕의 사위인 [[의빈(儀賓)]] 10명, 문관 10명, 무관 10명 등 총30명이다. 행사 당일, [[백관]]들은 [[창경궁 집춘문]] 밖에서 [[영조]]를 기다렸다가, [[왕]]이 나오면 그 뒤를 따라 [[성균관]]까지 이동한다. [[성균관]]에서는 먼저 [[대성전|대성전(大成殿)]]에서 성현께 [[문묘 작헌례의|작헌례(酌獻禮]]를 올리고, [[명륜당]]에서 문과시험을 치렀으며, 이어 [[하연대|하연대(下輦臺)]]에서 [[대사례]]를 하고, 그 자리에서 무과시험을 치른 후, 문무과 합격자 명단을 공개하는 [[문무과방방의|방방의(放榜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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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례 본의식'''<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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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3년(영조19) 윤4월 7일 거행된 [[대사례]]의 본의식은 [[성균관]] [[하연대|하연대(下輦臺)]]에서 있었다. [[하연대]]는 3단으로 되어있는데, 가장 윗단은 [[왕]]의 악차를 앞이 트이도록 설치하고, 그 아랫단은 [[왕]]이 활을 쏘는 어사위(御射位)이며, 마지막단은 [[백관]]들이 활을 쏘는 시사위(侍射位)이다. 사위에서 90보 거리에 과녁[帿壇]을 설치하는데 [[왕]]은 곰의 머리[熊帿], [[백관]]은 사슴의 머리[麋帿]그린다. 본의식은 [[왕]]이 활을 쏘는 어사례(御射禮), [[백관]]이 쏘는 시사례(侍射禮), 성적에 따라 신하에게 상벌을 주는 시사관상벌(侍射官賞罰)의 순서로 진행된다. 시사관 상으로는 옷감, 활, 화살 등이 차등적으로 주어지고, 한 발도 못맞춘 사람에게는 벌주(罰酒)가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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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례 참여자복식'''<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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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3년(영조19) 윤4월 7일 거행된 [[대사례]]에서 [[영조]]는 의식의 진행에 따라 각기 다른 복식을 착용한다. 사전 습의(習儀: 예행연습)에는 [[왕의 조복|익선관복(翼善冠服)]] [[익선관]]에 [[곤룡포]], [[대사례]] 당일 출궁(出宮)할 때는 [[왕의 상복|원유관복(遠遊冠服)]]인 [[원유관]]에 [[강사포]], [[대성전]]에서 [[문묘 작헌례의|작헌례]]를 올릴 때는 [[왕의 대례복|면복(冕服)]], 이후 [[명륜당]]과 [[하연대]]에서 진행한 문무과 시험과 활쏘기에는 [[왕의 조복|익선관복]]을 입었다. 신하들은 집에서 나올 때 4품 이상은 [[백관의 조복|조복(朝服)]], 5품 이하는 [[단령|흑단령(黑團領)]]을 입는다. [[성균관]]에 도착한 후 [[문묘 작헌례의|작헌례]]의 집사자는 [[백관의 제복|제복(祭服)]]을 입고 나머지는 본래의 차림 그대로이며, [[문묘 작헌례의|작헌례]]가 끝난 후 모두 [[사모|사모(紗帽)]][[단령|흑단령]]을 입고 문무과의와 활쏘기에 참여한다. 활쏘기를 할 때는 [[왕]][[백관]] 모두 활을 잡은 쪽 손목에 습(拾)을 두르고, 활시위를 당기는 엄지손가락에 깍지[角指: 扳指]를 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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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교 전통의상학과 교수 최연우-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7년 10월 1일 (일) 00:07 판

대사례
(大射禮)
대표명칭 대사례
한자표기 大射禮
유형 의례
관련개념 군례



정의

대사례백관들의 활쏘기를 의식으로 양식화한 것이다. 고대에 [[젤{|제례(祭禮)]]를 위해 집사관(執事官)을 뽑을 때 활쏘기를 통해 과녁을 많이 맞춘 사람을 쓰던 데서 유래한다.

내용

대사례의 유래와 상징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활쏘기 의례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었다. 고대로부터 덕(德)이 많은 사람이 화살을 많이 명중시킨다는 관념 아래 발전한 의례였고, 나라에서 큰 제사를 지낼 때면 미리 활쏘기를 하여 많이 명중시킨 사람을 제사에 참여하도록[助祭者]하였다. 이러한 의식이 대사례로 발전한 것이다. 이런 관념 때문에 화살을 명중시키는 여부는 단순한 기예를 넘어서서, 활 쏘는 이의 덕행(德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에서는 중종대사례가 거행되었고, 1743년(영조 19)에 다시 거행되었다.

영조때 대사례와 『대사례의궤』
1743년(영조19) 윤4월 7일 영조대사례를 거행한 후, 그 의식의 전모를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규장각 소장)에 상세히 기록하였다. 대사례성균관에서 거행되었는데, 본의식 전인 4월에 궁에서 세차례 습의(習儀: 예행연습)를 거행하고 마지막 습의는 영조가 친히 관람한다. 활쏘기 참여자는 영조 외에 종친 및 왕의 사위인 의빈(儀賓) 10명, 문관 10명, 무관 10명 등 총30명이다. 행사 당일, 백관들은 창경궁 집춘문 밖에서 영조를 기다렸다가, 이 나오면 그 뒤를 따라 성균관까지 이동한다. 성균관에서는 먼저 대성전(大成殿)에서 성현께 작헌례(酌獻禮를 올리고, 명륜당에서 문과시험을 치렀으며, 이어 하연대(下輦臺)에서 대사례를 하고, 그 자리에서 무과시험을 치른 후, 문무과 합격자 명단을 공개하는 방방의(放榜儀)를 했다.

대사례 본의식
1743년(영조19) 윤4월 7일 거행된 대사례의 본의식은 성균관 하연대(下輦臺)에서 있었다. 하연대는 3단으로 되어있는데, 가장 윗단은 의 악차를 앞이 트이도록 설치하고, 그 아랫단은 이 활을 쏘는 어사위(御射位)이며, 마지막단은 백관들이 활을 쏘는 시사위(侍射位)이다. 사위에서 90보 거리에 과녁[帿壇]을 설치하는데 은 곰의 머리[熊帿], 백관은 사슴의 머리[麋帿]를 그린다. 본의식은 이 활을 쏘는 어사례(御射禮), 백관이 쏘는 시사례(侍射禮), 성적에 따라 신하에게 상벌을 주는 시사관상벌(侍射官賞罰)의 순서로 진행된다. 시사관 상으로는 옷감, 활, 화살 등이 차등적으로 주어지고, 한 발도 못맞춘 사람에게는 벌주(罰酒)가 주어진다.

대사례 참여자복식
1743년(영조19) 윤4월 7일 거행된 대사례에서 영조는 의식의 진행에 따라 각기 다른 복식을 착용한다. 사전 습의(習儀: 예행연습)에는 익선관복(翼善冠服) 익선관곤룡포, 대사례 당일 출궁(出宮)할 때는 원유관복(遠遊冠服)원유관강사포, 대성전에서 작헌례를 올릴 때는 면복(冕服), 이후 명륜당하연대에서 진행한 문무과 시험과 활쏘기에는 익선관복을 입었다. 신하들은 집에서 나올 때 4품 이상은 조복(朝服), 5품 이하는 흑단령(黑團領)을 입는다. 성균관에 도착한 후 작헌례의 집사자는 제복(祭服)을 입고 나머지는 본래의 차림 그대로이며, 작헌례가 끝난 후 모두 사모(紗帽)흑단령을 입고 문무과의와 활쏘기에 참여한다. 활쏘기를 할 때는 백관 모두 활을 잡은 쪽 손목에 습(拾)을 두르고, 활시위를 당기는 엄지손가락에 깍지[角指: 扳指]를 끼웠다.

-단국대학교 전통의상학과 교수 최연우-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대사례의궤 대사례 A는 B를 기록하였다 A ekc:documents B
대사례 거가출궁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대사례 문묘 작헌례의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대사례 문과시취의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대사례 대사례의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대사례 무과시취의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대사례 무과시취의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대사례 문무과방방의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대사례 거가환궁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대사례 A는 B를 거행하였다 A ekc:participates B
백관 대사례 A는 B를 참여하였다 A ekc:participates B
영조 대사례 A는 B를 거행하였다 A ekc:participates B
밀창군 이직 대사례 A는 B를 참여하였다 A ekc:participates B
이익정 대사례 A는 B를 참여하였다 A ekc:participates B

시간정보

시간 내용
1743년 영조성균관 하연대에서 대사례를 거행하였다

공간정보

공간 내용
1743년 영조성균관 대성전에서 대사례를 거행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國朝五禮儀』
  • 『世宗實錄五禮儀』
  • 대사례의궤
  •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 대사례와 향사례』, 국립민속박물관, 2009.
  • 신병주, 「영조대 대사례의 실시와 『대사례의궤』」, 『한국학보』 28권 1호, 일지사(한국학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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