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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고려시대 탑터와 석불좌상 4구, 보감국사묘응탑비 귀부와 이수, 보감국사부도, 광배가 모여 있다. 이 유물들은 사지 인근에 흩어져 있었는데, 모두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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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 천태 불은사 중흥기’에 따르면 의선 스님은 1323년부터 영원사 주지를 하고 있는 동안 원나라에 들어가 1336년 귀국할 때까지 법호에 영원사 주지라는 말이 따라 다녔다. 또 영원사를 ‘연이기사위전대국통하산소(然以其寺爲前代國統下山所)’라고 표현한 것을 볼 때 고려시대 때 교권을 장악하는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지방사원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려국 천태 불은사 중흥기’에 따르면 의선 스님은 1323년부터 영원사 주지를 하고 있는 동안 원나라에 들어가 1336년 귀국할 때까지 법호에 영원사 주지라는 말이 따라 다녔다. 또 영원사를 ‘연이기사위전대국통하산소(然以其寺爲前代國統下山所)’라고 표현한 것을 볼 때 고려시대 때 교권을 장악하는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지방사원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017년 9월 22일 (금) 14:13 판

밀양 영원사지
(密陽 瑩源寺址)
대표명칭 밀양 영원사지
한자 密陽 瑩源寺址
경내문화재 밀양 영원사지 보감국사 부도, 밀양 영원사지 보감국사묘응탑비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었던 영원사(瑩源寺)의 절터.

내용

이곳에는 고려시대 탑터와 석불좌상 4구, 보감국사묘응탑비 귀부와 이수, 보감국사부도, 광배가 모여 있다. 이 유물들은 사지 인근에 흩어져 있었는데, 모두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고려국 천태 불은사 중흥기’에 따르면 의선 스님은 1323년부터 영원사 주지를 하고 있는 동안 원나라에 들어가 1336년 귀국할 때까지 법호에 영원사 주지라는 말이 따라 다녔다. 또 영원사를 ‘연이기사위전대국통하산소(然以其寺爲前代國統下山所)’라고 표현한 것을 볼 때 고려시대 때 교권을 장악하는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지방사원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선종에 몸담고 있었던 탄연 스님이 광명사로 옮긴 뒤 영원사의 주지는 천태종 스님인 원각국사 덕소(圓覺國師 德素, 1108~ 1174)가 맡게 된다. 이 때 선종사찰인 영원사는 천태종 사찰로 바뀌었다.

원각국사는 대각국사가 천태종을 개창한 이후 천태종 계열의 스님으로서는 최초로 왕사가 된 인물이다. 원각국사는 “영원사에 있을 때 일찍이 이르기를 영원사는 선가의 고찰”이라고 했다. 이는 영동 영국사에 있는 원각국사비에 적혀 있다. 이 비는 1180년 고려 문신 한문준(韓文俊, ?~1190)이 썼다고 전한다.

‘국청사금당주불석가여래사리영이기(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에는 천태종 만덕산 백련사 출신인 무외정오(無畏丁午, ?~1318) 스님이 충선왕의 명에 따라 1310년 영원사에 주석하면서 금당과 낭무를 중수했다.

정오 스님은 1313년 11월 충숙왕으로부터 국통(國統)의 직위를 받아 당시의 교계를 통솔하다 1314년 영원사를 떠났다. 이후 일연 스님의 제자인 보감국사 혼구(寶鑑國師 混丘, 1250~1322)대사가 영원사에 주석하면서 선종사찰로 복구되었다.

영원사의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밀주지에 “비석은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다. 절을 폐한 그 터에다 덕성서원을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1567년(조선 명종 22)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로선 영원사지의 규모 또한 알 수 없다. 다만 남아있는 유물과 역사사료를 참고할 때 사세가 컸음을 짐작할 뿐이다. 남아있는 유물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호 영원사지보감국사부도와 13호 보감국사묘응탑비, 불상 4구, 광배, 주춧돌, 기와 파편 등이 전부다.[금강신문]

혜근과 밀양 영원사에 얽힌 이야기

나옹선사는 1347년 중국 연경의 법원사에서 4년여간 머물며 지공선사로부터 수학한 고승이다. 공민왕의 명으로 신광사, 회암사 등에서 후학 지도를 하거나 절을 중창했고, 문수회 법회(뛰어난 지혜의 공덕을 지녔다는 문수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법회)를 열었다. 고려말 불교계 중심 인물로 살았다. 1371년에 공민왕은 나옹선사에게 금란가사ㆍ내외법복ㆍ바리 등을 하사하고,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王師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普濟尊者)’를 봉했다. 하지만 공민왕 사후에 왕위에 오른 우왕은 그를 내쳤다. 우왕은 제위 2년째인 1376년 나옹선사에게 밀양 영원사로 갈 것을 명했고, 영원사로 가던 나옹은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했다. 불과 57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그의 제자 무학대사가 조선 건국과 함께 왕사로 책봉돼 나옹의 불교를 이어갔지만, 나옹선사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비운이었다. [전북일보]

관련 문화재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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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