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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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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원사
(密陽 瑩源寺)
대표명칭 밀양 영원사
한자 密陽 瑩源寺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활성동에 있었던 절.

내용

『고려국 천태 불은사 중흥기(高麗國 天台 佛恩寺 重興記)』에서 영원사(瑩源寺)를 ‘연이기사위전대국통하산소(然以其寺爲前代國統下山所)’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때 교권을 장악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지방 사원이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1]

선종(禪宗)에 몸담고 있던 탄연(坦然)광명사(廣明寺)로 옮긴 뒤 영원사의 주지는 천태종(天台宗) 스님인 원각국사 덕소(圓覺國師 德素, 1108-1174)가 맡았다. 이때 선종 사찰인 영원사는 천태종 사찰로 바뀌었다.[2]

「국청사금당주불석가여래사리영이기(國淸寺金堂主佛釋迦如來舍利靈異記)」에는 천태종 백련사(白蓮寺) 출신인 무외국통 정오(無畏國統 丁午, ?-1318)충선왕의 명에 따라 1310년 이 사찰에 주석하면서 금당(金堂)과 낭무(廊廡)를 중수했다.[3]

정오는 1313년 11월 충숙왕에게 국통(國統)의 직위를 받아 당시의 교계를 통솔하다가 1314년 영원사를 떠났다. 이후 일연(一然)의 제자인 보감국사 혼구(寶鑑國師 混丘, 1250-1322)가 이 절에 주석하면서 다시 선종 사찰로 복구되었다.[4]

영원사의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 수 없다만, 밀주지에 “비석은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다. 절을 폐한 그 터에다 덕성서원(德城書院)을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1567년(명종 22) 이전에 폐사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5]

혜근과 밀양 영원사에 얽힌 이야기

나옹선사 혜근(懶翁禪師 惠勤)공민왕의 총애로 고려 말 불교계 중심 인물로 살았다. 하지만 공민왕 사후에 왕위에 오른 우왕은 그를 내쳤다. 우왕은 재위 2년째인 1376년 혜근에게 밀양 영원사로 갈 것을 명했고, 영원사로 가던 혜근여주 신륵사(驪州 神勒寺)에서 열반했다. 불과 57세라는 아까운 나이였다. 그의 제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조선의 건국과 함께 왕사(王師)로 책봉돼 혜근의 불교를 이어갔지만, 혜근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비운이었다.[6]

관련 문화재

지식관계망

  • 밀양 영원사와 관련 있는 나옹 혜근의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밀양 영원사지 밀양 영원사 A는 B의 터이다 A edm:isRelatedTo B
밀양 영원사지 보감국사묘응탑비 혼구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밀양 영원사지 보감국사묘응탑비 밀양 영원사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밀양 영원사지 보감국사 부도 혼구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A ekc:isStupaOf B
밀양 영원사지 보감국사 부도 밀양 영원사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탄연 밀양 영원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덕소 밀양 영원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정오 밀양 영원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혼구 밀양 영원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혜근 밀양 영원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이강식, "③ 밀양 영원사지(瑩源寺址)", 『금강신문』online, 작성일: 2011년 3월 18일.
  2. 이강식, "③ 밀양 영원사지(瑩源寺址)", 『금강신문』online, 작성일: 2011년 3월 18일.
  3. 이강식, "③ 밀양 영원사지(瑩源寺址)", 『금강신문』online, 작성일: 2011년 3월 18일.
  4. 이강식, "③ 밀양 영원사지(瑩源寺址)", 『금강신문』online, 작성일: 2011년 3월 18일.
  5. 이강식, "③ 밀양 영원사지(瑩源寺址)", 『금강신문』online, 작성일: 2011년 3월 18일.
  6. 김재호, "인생", 『전북일보』online, 작성일: 2017년 2월 1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