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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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8일 (수) 19:04 판

김지선


여진정벌
안재후-여진정벌(윤관)-1975s.jpg
작가 안재후
제작연도 1975년
규격 300호(290.9x197cm)
유형 전쟁
분류 유화
소장처 전쟁기념관


개요

안재후-여진정벌(윤관)-1975s.jpg
민족기록화 작품 시각화 예시

내용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박정희 대통령 재임중인 1979년에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김태 화백의 작품이다. 현재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에 소장되어 있다.
해당 작품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겸 지리학자인 김정호가 답사를 통해 대동여지도를 제작하는 모습을 담았다.

1107년(예종2)에 윤관(尹瓘) 장군이 여진을 정벌하였던 모습을 담은 기록화(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234173&cid=51293&categoryId=51293)

윤관의 지휘하에 고려군이 동북계의 여진 부락을 소탕하고 성곽을 쌓는 장면을 묘사

전쟁을 소재로 한 대부분의 민족기록화들은 아군과 적군을 선 대 악, 승리 대 패배라는 고정된 틀에 따라 관계를 설정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며, 죽음에 대해서도 굴욕적이고 무의미한 적군 병사들의 죽음과 숭고하고 영웅적인 아군 병사와 지도자의 죽음의 대비로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화면의 전경을 비참하게 살해되어 여기저기 널브러진 여진족의 시체와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체념으로 채우고 이를 전투로 인해 불타오른 민가와 피폐해진 황량한 들판, 핏빛의 저녁노을과 대비시킴으로써 전쟁의 승리보다는 공포와 비참함, 비인간적인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관람자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모녀의 절망적인 표정과 죽은 아이를 껴안고 젖을 물리려는 듯 한 쪽 가슴을 드러낸 여인의 처절한 몸짓은 들라크루아의 <키오스섬의 학살>을 떠올리게 한다.[1]

관련 민족기록화

고려시대 전쟁 소재 작품

추출정보

작품정보 연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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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드 관계 노드
안재후-여진정벌 ~에 의해 그려지다 안재후
안재후-여진정벌 ~에 소장되어 있다 전쟁기념관
안재후-여진정벌 ~을 소재로 삼다 윤관
안재후-여진정벌 ~을 소재로 삼다 여진정벌

시간정보

중심 시간정보명 시간값
안재후-여진정벌 제작연도 1975년
안재후-여진정벌 국회사무처 대여기간 1991.01.08 ~ 1992.01.07
안재후-여진정벌 전쟁기념관 이전 연도 1998년

공간정보

중심 연결정보 공간정보이름 경도 위도
안재후-여진정벌 소장처 국회사무처 37.532103 126.914133
안재후-여진정벌 소장처 전쟁기념관 37.5369559 126.9749353

참고문헌

주석

  1.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3년, 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