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유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PAGENAME}}과 예송논쟁)
28번째 줄: 28번째 줄:
 
이 책 권6의 상에는 시(詩), 부(賦) 등이, 하에는 '가사(歌辭)'라는 표제 아래 75수의 시조가 실려 있다. [[산중신곡|산중신곡(山中新曲)]], [[산중속신곡|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고금영|고금영(古琴詠)]], [[어부사시사|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산중신곡]], [[산중속신곡]] 등은 [[윤선도]]가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영덕에서 2년간의 유배를 마친 뒤, 고향인 전라도 [[해남 금쇄동]]에 은거할 당시 지은 작품이다. 그 뒤 [[병자호란]] 당시 발견했던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를 짓고 은거하였다. 그 때에 지은 것이 만년의 절창 [[어부사시사]]이다.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윤선도]]는 벼슬길에서 벗어나 짐짓 어부의 생활을 했고, 그 결과로 남겨진 많은 작품이 '고산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조선 사대부층의 자연관을 이해하는 데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조선의 강호문학은 [[이현보|이현보(李賢輔)]]와 [[송순|송순(宋純)]]에 의해 정립되었고, [[윤선도]]에 이르러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45쪽.</REF>
 
이 책 권6의 상에는 시(詩), 부(賦) 등이, 하에는 '가사(歌辭)'라는 표제 아래 75수의 시조가 실려 있다. [[산중신곡|산중신곡(山中新曲)]], [[산중속신곡|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고금영|고금영(古琴詠)]], [[어부사시사|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산중신곡]], [[산중속신곡]] 등은 [[윤선도]]가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영덕에서 2년간의 유배를 마친 뒤, 고향인 전라도 [[해남 금쇄동]]에 은거할 당시 지은 작품이다. 그 뒤 [[병자호란]] 당시 발견했던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를 짓고 은거하였다. 그 때에 지은 것이 만년의 절창 [[어부사시사]]이다.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윤선도]]는 벼슬길에서 벗어나 짐짓 어부의 생활을 했고, 그 결과로 남겨진 많은 작품이 '고산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조선 사대부층의 자연관을 이해하는 데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조선의 강호문학은 [[이현보|이현보(李賢輔)]]와 [[송순|송순(宋純)]]에 의해 정립되었고, [[윤선도]]에 이르러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45쪽.</REF>
  
==={{PAGENAME}}과 [[예송논쟁]]===
+
===고산유고와 [[예송논쟁]]===
 
1791년(정조 15) 전라감사 [[서유린|서유린(徐有隣)]]이 왕의 명을 받고 간행하였다. 그 뒤 1798(정조 22) 전라감사 [[서정수|서정수(徐鼎修)]]가 [[윤선도]]의 본가에 간직된 목판본을 대본으로 하여 개편, 간행한 것이 오늘날 전하고 있는 {{PAGENAME}}이다.
 
1791년(정조 15) 전라감사 [[서유린|서유린(徐有隣)]]이 왕의 명을 받고 간행하였다. 그 뒤 1798(정조 22) 전라감사 [[서정수|서정수(徐鼎修)]]가 [[윤선도]]의 본가에 간직된 목판본을 대본으로 하여 개편, 간행한 것이 오늘날 전하고 있는 {{PAGENAME}}이다.
 
이책의 저자 [[윤선도]](1587년-1671년)는 조선후기 문신으로, [[인조]]에서 [[숙종]]까지 3명의 왕을 걸치면서 조선후기 사상사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특히 [[예송논쟁]]에서 정적인 [[송시열]]과 맞선 사람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 책에 실려있는 「[[논예소]]」는 그가 73세 되는 1660년(현종 1)에 씌어졌다. 그 전해 1659년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후(繼母后)인 [[자의대비 조씨|자의대비 조씨(慈懿大妃 趙氏)]]의 복(服)에 대해서 [[남인]] [[윤선도]]와 [[서인]] [[송시열]]이 논쟁을 일으키며 [[예송논쟁|1차 예송논쟁]]이 발발한다.  
 
이책의 저자 [[윤선도]](1587년-1671년)는 조선후기 문신으로, [[인조]]에서 [[숙종]]까지 3명의 왕을 걸치면서 조선후기 사상사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특히 [[예송논쟁]]에서 정적인 [[송시열]]과 맞선 사람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 책에 실려있는 「[[논예소]]」는 그가 73세 되는 1660년(현종 1)에 씌어졌다. 그 전해 1659년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후(繼母后)인 [[자의대비 조씨|자의대비 조씨(慈懿大妃 趙氏)]]의 복(服)에 대해서 [[남인]] [[윤선도]]와 [[서인]] [[송시열]]이 논쟁을 일으키며 [[예송논쟁|1차 예송논쟁]]이 발발한다.  

2017년 9월 12일 (화) 20:25 판

고산유고
한글팀 고산유고 01.png
한자명칭 孤山遺稿
영문명칭 A Collection of Yun Seondo's poems and writings
작자 윤선도
간행시기 1796년
청구기호 4-5758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32.4×21.0㎝
판본 목판본
수량 6冊
표기문자 한문, 한글



정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시와 글을 수록한 시문집.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이 책 권6의 상에는 시(詩), 부(賦) 등이, 하에는 '가사(歌辭)'라는 표제 아래 75수의 시조가 실려 있다. 산중신곡(山中新曲),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고금영(古琴詠),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산중신곡, 산중속신곡 등은 윤선도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경상도 영덕에서 2년간의 유배를 마친 뒤, 고향인 전라도 해남 금쇄동에 은거할 당시 지은 작품이다. 그 뒤 병자호란 당시 발견했던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를 짓고 은거하였다. 그 때에 지은 것이 만년의 절창 어부사시사이다.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윤선도는 벼슬길에서 벗어나 짐짓 어부의 생활을 했고, 그 결과로 남겨진 많은 작품이 '고산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조선 사대부층의 자연관을 이해하는 데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조선의 강호문학은 이현보(李賢輔)송순(宋純)에 의해 정립되었고, 윤선도에 이르러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다.[1]

고산유고와 예송논쟁

1791년(정조 15) 전라감사 서유린(徐有隣)이 왕의 명을 받고 간행하였다. 그 뒤 1798(정조 22) 전라감사 서정수(徐鼎修)윤선도의 본가에 간직된 목판본을 대본으로 하여 개편, 간행한 것이 오늘날 전하고 있는 고산유고이다. 이책의 저자 윤선도(1587년-1671년)는 조선후기 문신으로, 인조에서 숙종까지 3명의 왕을 걸치면서 조선후기 사상사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특히 예송논쟁에서 정적인 송시열과 맞선 사람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 책에 실려있는 「논예소」는 그가 73세 되는 1660년(현종 1)에 씌어졌다. 그 전해 1659년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후(繼母后)인 자의대비 조씨(慈懿大妃 趙氏)의 복(服)에 대해서 남인 윤선도서인 송시열이 논쟁을 일으키며 1차 예송논쟁이 발발한다. 송시열 등은 효종이 둘째 왕자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들어 체이부정설(體而不正說 : 왕위의 계승이 윤리적 질서로는 정당하나 혈통상으로는 정당하지 못하다는 설)에 해당하므로 기년복이 합당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남인윤선도는 「논예소」를 올리면서 허목(許穆), 윤휴(尹鑴) 등과 함께 이에 반대하여 3년설을 주장하였다. 윤선도는 종통(宗統)의 정당함을 내세워 3년복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세자였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은 뒤 부왕 생전에 효종이 다시 세자로 책립되어 왕위에 올랐음으로, 둘째 왕자라고는 하지만, 적장자(嫡長子)와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 왕위에 오른 현종은 기년설을 따랐음으로 남인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논예소」는 불살라지고, 윤선도는 함경도 삼수로 유배를 당하였다. [2]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윤선도 고산유고 A는 B를 저술했다
고산유고 산중신곡 A는 B를 포함한다
고산유고 산증속신곡 A는 B를 포함한다
고산유고 고금영 A는 B를 포함한다
고산유고 어부사시사 A는 B를 포함한다
고산유고 논예소 A는 B를 포함한다
이현보 강호문학 A는 B에 포함된다
송순 강호문학 A는 B에 포함된다
윤선도 강호문학 A는 B에 포함된다
윤선도 숙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윤선도 효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산중신곡 병자호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산증속신곡 병자호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윤선도 낙서재 A는 B에 있었다
윤선도 금쇄동 A는 B에 있었다
서유린 고산유고 A는 B를 간행하였다 1791년
서정수 고산유고 A는 B를 중간하였다 1798년
대구서씨 서유린 A는 B를 포함한다
대구서씨 서정수 A는 B를 포함한다
논예소 예송논쟁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송논쟁 자의대비 조씨 A는 B를 언급했다
예송논쟁 소현세자 A는 B를 언급했다
윤후 예송논쟁 A는 B와 관련이 있다
허목 예송논쟁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인 윤선도 A는 B를 포함한다
남인 허목 A는 B를 포함한다
남인 윤후 A는 B를 포함한다
송시열 예송논쟁 A는 B와 관련이 있다
서인 송시열 A는 B를 포함한다
고산유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A는 B에 소장되어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791년 고산유고은 서유린이 간행하였다
1798년 고산유고은 서정수가 중간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39197 127.054387 고산유고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45쪽.
  2. 최진원, 고산유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5월 14일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장동우, 「《속대전(續大典)》〈예전(禮典)〉과 《대전통편(大典通編)》 〈예전(禮典)〉에 반영된 "17세기 전례논쟁[예송(禮訟)]"의 논점에 대한 고찰」, 『한국실학연구』, Vol 9, 2005, 155-183쪽.
    • 김상준, 「조선시대의 禮訟과 모랄폴리틱」, 『한국사회학』, Vol 35, 2001, 205-236쪽.
    • 유한희, 「예송논쟁시기 천인 영남유소와 17세기 학자들의 정치문화」, 『한국사회학 사회학대회』, Vol 2015-12, 2015, 348-3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