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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의 글씨가 남겨진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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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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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맹흠, 「김생의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서풍 연구」,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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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0일 (일) 17:1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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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내용

김생의 글씨가 남겨진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조선시대에는 이미 김생의 진적(眞蹟)이 귀해져 이광사(李匡師)의 『원교서결(圓嶠書訣)』에서 그의 진적은 절무하다고 할 정도였다. 김생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필적으로는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奉化 太子寺 朗空大師塔碑)가 가장 중요하다. 이 비의 비문 글씨는 954년(고려 광종 5)에 승려 단목(端目)이 김생의 행서(行書)를 집자(集字)한 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왕희지, 구양순류의 단정하고 미려한 글씨와 달리 활동적인 운필(運筆)로 서가(書家)의 개성을 잘 표출시키고 있다.[1]

이 탑비의 측면에는 1509년(조선 중종 4)에 영천군수 이항(李沆)이 탑비를 태자사지로부터 영천의 자민루(字民樓)로 옮겨온 사실이 박눌(朴訥)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2]

Quote-left.png 내가 어릴 때 김생(金生)의 필적(筆蹟)을 비해당집[3]고첩(匪懈堂集古帖)에서 얻어보니, 그 필법(筆法)이 마치 용이 날뛰고 호랑이가 누워있는 것과 같아서, 그 기세(氣勢)를 보고 크게 좋아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전함이 많지 않음을 한탄하여 오던 중 근래(近來)에 영주(榮州)의 이웃인 봉화현(奉化縣)에 김생(金生) 글씨의 비석이 홀로 고사(古寺)의 유허(遺墟)에 남아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이와 같은 희세(希世)의 보배가 초망지간(草莽之間)에 매몰되어 있으나 수호하는 사람이 없어 야우((野牛)의 뿔에 부딪쳐 상하거나, 목동들의 불장난 등이 모두 염려되었다. 그리하여 군인(郡人)인 전참봉(前叅奉) 권현손(權賢孫)과 공모(共謀)하여 자민루(字民樓) 아래에 이전하여 안치하고 사방(四方)으로 난함(欄檻)을 둘러 출입을 통제하였다. 탁본(托本)하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출입을 금하였으니, 함부로 만져 손상이 생길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김생(金生)의 필적(筆蹟)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그 후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감상하러 찾아 들었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3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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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21-22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2. 김응현,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안평대군의 문집.
  4.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우리나라 서예 법 세운 '김생 특별전'", 『아주경제』, 2011년 12월 25일.
  5. 이동국,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17)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上)", 『경향신문』, 2014년 1월 24일.
  6. 이동국, "서예로 찾은 우리 미학(17)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下)", 『경향신문』, 2014년 2월 7일.

참고문헌

  • 박맹흠, 「김생의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서풍 연구」,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