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표준영정"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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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의 외모에 대한 기록)
(김유신의 외모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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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외모에 대한 기록===
 
===김유신의 외모에 대한 기록===
인물의 외모에 대한 기록 : 역사 문헌에 기록된 내용 직접 인용 또는 그러한 내용을 정리한 2차 자료의 서술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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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화랑세기』]]에는 서기 540년부터 681년까지 재임한 역대 풍월주 32명 15명의 외모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제15대 풍월주인 [[김유신]]의 외모에 대해서는 "태양과 같았다"고 묘사되어 있다.http://www.k-heritage.tv/brd/board/275/L/CATEGORY/325/menu/251?brdCodeField=CATEGORY&brdCodeValue=325&bbIdx=1784&brdTy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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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안광선, "[http://m.kado.net/?mod=news&act=articleView&idxno=693136 설화 속 인물 다시 보기: 20. 강감찬 외모(하)]", 『강원도민일보』, 2014년 08월 08일.</ref>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 문헌에서는 '형체와 외모가 작고 못생겼으며 옷은 때가 묻고 헤져서 볼품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민간 설화에 전하는 강감찬의 인물은 '얼굴이 얽구 천하 박색', '남들과 섞여 있을 정도도 안되고',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요' 등 천하 박색이다. 더욱이 체구가 왜소하여 엎드리면 마치 여우가 기어가는 듯했고, 키는 다섯자, 혹은 석자 등 난장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는 것. 한 자가 30.3cm 이니 계산해 보면 151cm 정도이다. 그나마 얼굴은 잘생겼던 모양이다. 그런데 강감찬은 그 점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남아 대장부의 얼굴이 아니라며 손님을 불러 얼굴을 곰보로 만들었다. 손님은 마마신 즉, [[천연두]]를 의미한다. 두 번의 시도에도 얼굴이 미색이자 세 번째는 보다 강하게 얼굴을 얽은 뒤에야 '장부의 얼굴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고 만족했다고 한다.<ref>안광선, "[http://m.kado.net/?mod=news&act=articleView&idxno=693136 설화 속 인물 다시 보기: 20. 강감찬 외모(하)]", 『강원도민일보』, 2014년 08월 08일.</ref>
 
 
 
서기 540년부터 681년까지 재임한 역대 풍월주 32명의 외모에 관한 필사본 <화랑세기>의 묘사를 정리하면 표와 같다. 표 속의 내용은, 32명의 풍월주들의 특성을 요약한 부분 중에서 외모에 관한 표현만 따로 발췌한 것이다.
 
 
 
1 위화 얼굴은 백옥 같고, 입술은 붉은 연지 같고, 눈동자는 맑고, 이는 하얗다 17 염장 풍채가 좋았다.
 
2 미진부 아름다웠다. 18 춘추 얼굴이 백옥 같았다.
 
3 모랑 미모를 갖고 있었다. 19 흠순 ---
 
4 이화 피부는 옥처럼 기름지고, 눈은 미소짓는 꽃 같다. 20 예원 ---
 
5 사다함 아버지보다 풍모가 컸다. 21 선품 용모가 절묘했다.
 
6 세종 단아하고 풍모가 아름다웠다. 22 양도 ---
 
7 설원 풍채가 아름다웠다. 23 군관 ---
 
8 문노 --- (언급 없음) 24 천광 얼굴이 꽃처럼 아름답다.
 
9 비보 --- 25 춘장 ---
 
10 미생 얼굴이 아름다웠다. 26 진공 풍채가 있었다.
 
11 하종 --- 27 흠돌 ---
 
12 보리 --- 28 오기 ---
 
13 용춘 --- 29 원선 ---
 
14 호림 --- 30 천관 ---
 
15 유신 태양과 같았다. 31 흠언 ---
 
16 보종 얼굴은 관옥(冠玉) 같았다. 32 신공 ---
 
 
 
표에 따르면, 외모에 관한 기록이 남은 풍월주는 총 15명이다. 외모에 관한 기록이 남았다는 것은 해당 풍월주의 외모가 꽤 준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2명 가운데에 15명의 외모가 준수했다면, 풍월주들의 절반가량은 꽃미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꽃미남 풍월주 15명의 외모에 관한 기록을 읽다 보면, 우리는 크게 4가지의 인상적인 표현에 접하게 된다. 첫째는 옥(제1세·제4세·제16세·제18세), 둘째는 꽃(제4세·제24세), 셋째는 풍채(제5세·제6세·제7세·제17세·제26세), 넷째는 태양(제15세)이다.
 
제15세 풍월주인 김유신의 외모가 "태양과 같았다"는 표현은 그의 얼굴이 잘 생겼다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풍모가 태양처럼 빛났다는 뜻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태양’을 ’풍채’에 포함시켜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라인들이 남자의 외모를 평가할 때에 사용한 표현 중에서 옥·꽃·풍채라는 요소가 가장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http://www.k-heritage.tv/brd/board/275/L/CATEGORY/325/menu/251?brdCodeField=CATEGORY&brdCodeValue=325&bbIdx=1784&brdType=R
 
  
 
===표준영정에 묘사된 강감찬의 모습===
 
===표준영정에 묘사된 강감찬의 모습===

2017년 8월 12일 (토) 16:25 판

형태 : 초상화_인물명_유형명_하위구분명(지정 or 제작연도, 소장처, 작가 등).jpg 예1 : 초상화_강감찬_표준영정_1974.jpg 예2 : 초상화_고종_어진_국립중앙박물관.jpg 예3 : 초상화_지눌_진영_송광사.jpg 사진 크기 : 세로 기준 최소 500픽셀 이상 @ 표준영정 지정년도 1977년.


김유신 표준영정
한자명칭 金庾信 標準影幀
작가 장우성
제작시기 1972년
소장처 진천 길상사
유형 표준영정
크기(세로×가로) 187×98㎝


정의

고려의 명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년)의 모습을 그린 국가표준영정.

내용

강감찬 표준영정 도난 및 모작 대체 사건

누가 그렸고(작가), 언제 그려졌으며(제작 시기), 어디서 보관하고 있고(소장 사항), 어떻게 그려졌으며 어떻게 전승되어 왔고(제작 맥락과 전승 내력), 현 시점에서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훼손이나 보존처리 상태와 문화재로서의 가치 및 원본/이모본 여부)


현재 강감찬 표준영정은 서울 관악구 낙성대(落星垈)에 있는 안국사(安國祠)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현재 모셔져 있는 영정은 1974년 월전 장우성 화백에 의해 그려진 작품이 아니라 금광복 화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1998년 낙성대에서 소장하고 있던 장우성 화백의 표준영정을 도난당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의 한겨레신문 기사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관악구청쪽은 영정을 도둑맞은 뒤 1974년 낙성대 준공에 맞춰 이 영정을 그린 한국화가 월전 장우성 화백에게 부탁해 다시 그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장 화백이 "나이가 들어 힘이 부친다"며 사양하자 다른 화가에게 부탁해 새로 영정을 그려 모셔 놓았다. 도둑맞은 영정은 높이 212cm, 너비 121cm 크기로, 이를 그린 장 화백이 서울대 미대 초대학장과 국전심사위원장을 지낸 대표적인 한국화가여서 상당히 값이 나가리라 미술계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충남 현충사이순신 장군과 독립기념관 유관순 열사의 영정도 장 화백의 작품이다.[1]

장군 영정을 도둑 맞은 때는 1998년 1월 11일 밤과 12일 새벽 사이로, 누군가 사당에 침입해 면도칼로 영정을 도려내 훔쳐간 것을 숙직을 끝낸 관리직원이 발견했다. 구청쪽은 곧바로 장 화백에게 영정을 다시 그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나이를 이유로 거절하자, 화가 금광복(40, 관악구 신림동)씨에게 160만원과 함께 영정 사진을 건네주며 그대로 그려 달라고 부탁해 새 영정을 마련했다. 금씨는 "그림을 다 그리고 표구점에 맡겼더니 구청쪽에서 나도 몰래 영정을 찾아갔다"며 "새로 영정을 모실 때에는 제(祭)로 예를 갖춰야 하는데도 지난 3월 그냥 걸어 놓았다"고 말했다. 주영근 관악구청 공원녹지과장은 "장 화백의 영정은 장군을 모시는 무속인이 훔쳐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는 또 "해마다 음력 8월에 인헌제(仁憲祭)를 하는데 두 번씩이나 경비를 지출할 필요가 없어 제를 지내지 않았다"고 해명했다.[2]

관악경찰서는 "도난당한 영정이 월전 선생 작품이라는 말을 듣지 못해 무명 화가가 그린 것으로 알았다"며 "그때 작품 가치가 없다고 보고 수사를 종결했다"고 말했다.[3]

김유신의 외모에 대한 기록

『화랑세기』에는 서기 540년부터 681년까지 재임한 역대 풍월주 32명 중 15명의 외모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제15대 풍월주인 김유신의 외모에 대해서는 "태양과 같았다"고 묘사되어 있다.http://www.k-heritage.tv/brd/board/275/L/CATEGORY/325/menu/251?brdCodeField=CATEGORY&brdCodeValue=325&bbIdx=1784&brdType=R [4]

표준영정에 묘사된 강감찬의 모습

초상화에 묘사된 모습의 특징 : 학술논문에서 언급되는 초상화(진영, 어진, 공신 초상)의 기초 형식을 참고하여 작성자가 직접 서술하는 것 가능


강감찬 영정은 전신 입상으로서 얼굴은 좌안 9분면이며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갑주를 착용하고 투구를 썼으며 허리에 찬 칼을 왼손으로 잡고 호피 위에 서 있다. 치켜 올라간 눈과 검은 구레나룻과 수염이 용맹과 위엄을 갖춘 무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장우성은 고려시대 노국대장공주 정릉의 왼쪽 무인상을 토대로 강감찬의 갑주와 투구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갑주의 경우, 허리 양 옆에 댄 상상갑의 모양과 대퇴부에 댄 네모난 하상갑 그리고 좌우 하상갑 사이 앞쪽에 위치한 전상갑 등의 모습을 하고 있다.[5]

표준영정제도가 제정된 이래 70년대와 80년대 초까지 이순신, 강감찬, 을지문덕, 김유신 등 무인들이 다수 제작되었음에도 무구에 대한 고증은 작가에 일임되었다. 이 때문에 고증이 쉽지 않았다. 1986년 11월에는 영정동상심의위원으로 무구전문가를 추가하여 장군 등의 동상이나 영정을 제작할 때 무구에 대한 고증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짧은 제작 기간에 인문학적 지식이 부족한 작가가 전적으로 고증을 했기 때문에 표준영정 및 동상에 고증 논란이 늘 뒤따랐으며 이중 무구, 갑옷 등에 논란이 많았다.[6]


충청북도 진천군(김유신이 태어난 만노군이 바로 오늘날의 진천군이다.)의 김유신 사당인 길상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 역시 장우성 화백 작품. 이 영정을 그릴 때 김해 김씨 남성 50여 명의 얼굴을 보고 이를 기준으로 그렸다고 한다. https://namu.wiki/w/%EA%B9%80%EC%9C%A0%EC%8B%A0#fn-1

김유신 장군의 影幀(영정)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이 영정을 그릴 당시 김유신 장군의 원래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손들의 생긴 모습 중 특징 부분을 합성해서 그렸다고 합니다. 1972년에 그린 작품입니다.http://chogabje.com/board/view.asp?C_IDX=12102&C_CC=BJ

표준 영정은 김해김씨 50명의 얼굴을 인터넷으로 집자하듯이 그려서 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http://chogabje.com/board/view.asp?C_IDX=12102&C_CC=BJ 우리 대한민국에 김유신 장군을 모신 주요 사당이 열두 군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진천에 있는 영정을 표준 영정이라고 해서 김유신 장군 영정을 그릴 때 여기 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린다고 합니다. 영정은 1972년 월전 장우성 화백께서 그리셨는데 1976년도에 사적 정리사업을 하면서 이쪽으로 모셨습니다. 당시 300만원 정도의 사업비를 들였다고 하는데 지금 가치로는 약 3억 원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여기 사당의 위치는 네 번째 옮기면서 자리한 곳입니다. 당초에는 김유신 장군 탄생지인 상계리 뒷산인 길상산에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관리가 안돼 옮기고 옮기다가 이쪽으로 옮긴 것은 1926년입니다. 한 50년 후인 1976년, 사적지 정리사업을 함으로써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께서 태어나신 곳은 사적으로 지적된 곳입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곳에서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하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왜 잘못 알려졌느냐 하면 지금 남아있는 고전 중에서 三國史記 列傳 제일 앞 부분에 써있는 글 때문입니다. 거기에 뭐라고 써 있느냐 하면 ‘김유신은 경주 사람이다’라고 기록돼 있기 때문에 잘못 알려지게 된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김유신 장군께서 경주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김유신 장군께서는 사후 160년 후 흥덕왕 10년(835년)에 흥무대왕으로 追贈(추증)되셨습니다. 김유신 장군처럼 죽어서 왕으로 追贈된 신하는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 왕은 神과 같은 존재로 백성하고 신은 분류됐기 때문에 추증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死後 160년 후에 追贈되신 겁니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강감찬 표준영정(1974) 표준영정 A는 B에 해당한다
강감찬 표준영정(1974) 강감찬 A는 B를 묘사하였다
강감찬 표준영정(1974) 낙성대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강감찬 표준영정(1974) 장우성 A는 B에 의해 그려졌다
강감찬 표준영정(1974) 금광복 A는 B에 의해 모작되었다
강감찬 표준영정(1974) 강감찬 표준영정 도난사건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4년 강감찬 표준영정(1974)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시각자료

주석

  1. 김태경, "장우성 화백의 강감찬 장군 영정 도난 모작 대체하고 '시치미'", 『한겨레신문』, 1998년 07월 20일.
  2. 김태경, "장우성 화백의 강감찬 장군 영정 도난 모작 대체하고 '시치미'", 『한겨레신문』, 1998년 07월 20일.
  3. 김태경, "장우성 화백의 강감찬 장군 영정 도난 모작 대체하고 '시치미'", 『한겨레신문』, 1998년 07월 20일.
  4. 안광선, "설화 속 인물 다시 보기: 20. 강감찬 외모(하)", 『강원도민일보』, 2014년 08월 08일.
  5. 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117쪽.
  6. 이영미, 「한국표준영정연구 -제도의 제정과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44쪽.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

더 읽을거리

  • 전시도록
    • 문화체육부, 『표준영정도록-역사를 빛낸 선현』, 문화체육부, 1993.
    • 문화체육부, 『표준영정도록-역사를 빛낸 선현』, 문화체육부, 1999.
    •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월전의 붓끝, 한국화 100년의 역사』, 이천시립월전미술관, 2012.
  • 단행본
    • 장우성, 『월전회고록-화단풍상칠십년』, 미술문화, 2003.
  • 논문
    • 조인수, 「월전 장우성의 초상화」, 『제2회 월전학술포럼』발표자료집, 월전학술포럼, 2014, 1-12쪽.


임금 어진의 경우, 기사 제목에 어진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반영 고승 진영의 경우, 기사 제목에 진영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반영 공신 초상의 경우, 기사 제목에 도상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반영 현대에 제작된 표준영정의 경우, 기사 제목에 표준영정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반영 기타 사항의 경우, 기사 제목에 초상이라는 명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