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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임숙(任叔), 호는 월봉(月峰)이다. [[효령대군|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이다. 풍덕군수 [[이광윤|이광윤(李光胤)]]의 중손이며 할아버지는 위장(衛將) 이간(李幹)이다. 아버지는 목사 완령부원군(完寧府院君) [[이경록|이경록(李慶祿)]]이며, 어머니는 감찰 [[이학증|이학증(李學曾)]]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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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임숙(任叔), 호는 월봉(月峰)이다. [[효령대군|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이며 풍덕군수 [[이광윤|이광윤(李光胤)]]의 중손이다. 할아버지는 위장(衛將) 이간(李幹)이며 아버지는 목사 완령부원군(完寧府院君) [[이경록|이경록(李慶祿)]]이며, 어머니는 감찰 [[이학증|이학증(李學曾)]]의 딸이다.
 
<ref> 차용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650 이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 중앙연구원.</ref>
 
<ref> 차용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650 이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 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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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년(광해군 7)년에는 곡산 군수가 되었다. 하지만 대신들이 그럴 능력이 안된다고 상소하는 일이 있었으나 파직되는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광해군]]의 인정을 받아 1616년(광해군 8)에는 호랑이를 잡은 공으로 가선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1615년(광해군 7)년에는 곡산 군수가 되었다. 하지만 대신들이 그럴 능력이 안된다고 상소하는 일이 있었으나 파직되는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광해군]]의 인정을 받아 1616년(광해군 8)에는 호랑이를 잡은 공으로 가선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ref>『광해군일기(정초본)』권104, 광해8년(1616) 6월 2일 신축,[http://sillok.history.go.kr/id/kob_10806002_013 호랑이를 잡은 곡산 군수 이서에게 가선 자급을 더해 주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의원회. </ref>
 
<ref>『광해군일기(정초본)』권104, 광해8년(1616) 6월 2일 신축,[http://sillok.history.go.kr/id/kob_10806002_013 호랑이를 잡은 곡산 군수 이서에게 가선 자급을 더해 주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의원회. </ref>
2년 후 1617년(광해군 9)에는 한 포도 대장이 공로가 많은 부장 [[고대근]]이 포상을 받지 못했다고 논상을 청하였는데, 당시 [[고대근]]의 종사관 이었던 {{PAGENAME}}의 공적도 들어나 포상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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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 1617년(광해군 9)에는 한 포도 대장이, 공로가 많은 부장 [[고대근]]이 포상을 받지 못했다고 논상을 청하였다. 당시 [[고대근]]의 종사관 이었던 {{PAGENAME}}의 공적도 들어나 포상을 받게 되었다.  
 
<ref>『광해군일기(정초본)』권119, 광해9년(1617) 9월 11일 계유,[http://sillok.history.go.kr/id/kob_10909011_003 포도 대장이, 공로가 많은데도 은전을 못받은 고대근의 논상을 청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의원회.</ref>  
 
<ref>『광해군일기(정초본)』권119, 광해9년(1617) 9월 11일 계유,[http://sillok.history.go.kr/id/kob_10909011_003 포도 대장이, 공로가 많은데도 은전을 못받은 고대근의 논상을 청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의원회.</ref>  
1618년(광해군 10) 대북파에서 폐모론이 일어나자 무인으로는 유일하게 {{PAGENAME}}만 동조하지 않아 대북파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들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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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광해군 10) 대북파에서 폐모론이 일어나자 무인으로는 유일하게 {{PAGENAME}}만 동조하지 않아 대북파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보였으며
 
<ref> 차용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650 이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 중앙연구원.</ref>
 
<ref> 차용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650 이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 중앙연구원.</ref>
이후 1621년(광해군 13)에는 장단 부사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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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년(광해군 13)에는 장단 부사에 임명되었다.  
  
 
===[[조선 인조|인조]]시기 {{PAGENAME}}의 활동===
 
===[[조선 인조|인조]]시기 {{PAGENAME}}의 활동===
1623년(인조 1)  [[김류]] [[이귀]]와 함께 의거를 공모하였고, 부임지인 장단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한양으로 들어와 [[이괄]]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인조반정]]을 일으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공로로 {{PAGENAME}}은 호조 판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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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인조 1)  [[김류]] [[이귀]]와 함께 의거를 공모하였고, 부임지인 장단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한양으로 들어와 [[이괄]]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인조반정]]을 일으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공로로 {{PAGENAME}}은 호조 판서에 올랐다.  
 
<ref>『인조실록』권1, 인조1년(1623) 3월 17일 정미,[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7_010 이서·정홍익·민여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의원회.</ref>
 
<ref>『인조실록』권1, 인조1년(1623) 3월 17일 정미,[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7_010 이서·정홍익·민여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의원회.</ref>
  
그리고 반정에 의해 정국이 어수선 하였고, 서북쪽 방어를 담당해야 하는 장수가 비어있었다. 당시 도원수 [[장만]]은 서북 부원수 자리로 두 사람을 천거했는데 바로 {{PAGENAME}} 과 [[이괄]] 이었다. 결국 [[이괄]]이 서북 부원수가 되었고 {{PAGENAME}}은 호조판서 직함으로 한양에서 활동을 이어간다. 그해 10월 18일에는 녹훈이 내려저 정국 공신에 임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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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반정에 의해 정국이 어수선 하였고, 서북쪽 방어를 담당해야 하는 장수가 비어있었다. 당시 도원수 [[장만]]은 서북 부원수 자리로 두 사람을 천거했는데 바로 {{PAGENAME}} 과 [[이괄]] 이었다. 결국 [[이괄]]이 서북 부원수가 되었고 {{PAGENAME}}은 호조판서 직함으로 한양에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그해 10월 18일에는 녹훈이 내려저 정국 공신에 임명된다.  
 
1년 후 1624년(인조 2) 공신 녹훈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반란을 일으키고 {{PAGENAME}}은 경기 관찰사로 전임 되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이괄]]을 추격하여 송도에 이르렀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추격을 못하였다. 그 여파로 관직에서 파직이 되나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복직되어 완풍군이란 작위를 받는다.  
 
1년 후 1624년(인조 2) 공신 녹훈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반란을 일으키고 {{PAGENAME}}은 경기 관찰사로 전임 되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이괄]]을 추격하여 송도에 이르렀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추격을 못하였다. 그 여파로 관직에서 파직이 되나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복직되어 완풍군이란 작위를 받는다.  
그리고 그해(1624)년에 여러가지 군사 재편과 전략에 대한 건의를 [[조선 인조|인조]]에게 하였으며 [[남한산성]] 형세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남한산성]]을 쌓는데 필요성을 주장하고 산성을 증축 하였는데 훗날 [[병자호란]] 시기에 이 산성이 큰역할을 하였다. 1628(인조 6)년에는 형조 판서가 되었고, 1632(인조 10)년에는 공조 판서가 되어 각처에 산성을 쌓아서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634년(인조 12)에는 판 의금부사를 겸하고, 1636년(인조 14)에는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조선 인조|인조]]를 호위하여 [[남한산성]]에서 청나라군과 대치하다가 과로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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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해(1624)년에 여러가지 군사 재편과 전략에 대한 건의를 [[조선 인조|인조]]에게 하였으며 [[남한산성]] 형세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남한산성]]을 쌓는데 필요성을 주장하고 산성을 증축 하였는데 훗날 [[병자호란]] 시기에 이 산성이 큰 역할을 하였다. 1628(인조 6)년에는 형조 판서가 되었고, 1632(인조 10)년에는 공조 판서가 되어 각처에 산성을 쌓아서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634년(인조 12)에는 판 의금부사를 겸하고, 1636년(인조 14)에는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조선 인조|인조]]를 호위하여 [[남한산성]]에서 청나라군과 대치하다가 과로로 병사했다.  
 
<ref> 차용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650 이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 중앙연구원.</ref>
 
<ref> 차용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4650 이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 중앙연구원.</ref>
  
무과에 급제하여 무인의 길을 걸었지만, 문인의 성품도 지니고 있는 양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취미가 독서 였고, 병서에 관심이 많았다. [[인조반정]]시기 장단에서 군을 움직여 반정에 가담할때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PAGENAME}}을 따랐음으로, 성품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주요 저작으론 [[화포식언해]] [[마경언해]] [[신전자취염초방]]등 주로 병서를 저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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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에 급제하여 무인의 길을 걸었지만, 문인의 성품도 지니고 있는 양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취미가 독서 였고, 병서에 관심이 많았다. [[인조반정]]시기 장단에서 군을 움직여 반정에 가담할때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PAGENAME}}을 따랐음으로, 성품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주요 저작으론 [[화포식언해]] [[마경언해]] [[신전자취염초방]]등 주로 병서를 저술 하였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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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정초본)』권119, 광해9년(1617) 9월 11일 계유,[http://sillok.history.go.kr/id/kob_10909011_003 포도 대장이, 공로가 많은데도 은전을 못받은 고대근의 논상을 청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의원회.
 
**『광해군일기(정초본)』권119, 광해9년(1617) 9월 11일 계유,[http://sillok.history.go.kr/id/kob_10909011_003 포도 대장이, 공로가 많은데도 은전을 못받은 고대근의 논상을 청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의원회.
 
**『인조실록』권1, 인조1년(1623) 3월 17일 정미,[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7_010 이서·정홍익·민여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의원회.
 
**『인조실록』권1, 인조1년(1623) 3월 17일 정미,[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7_010 이서·정홍익·민여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의원회.
[[분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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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인물]]
 
[[분류:이창섭]]
 
[[분류:이창섭]]

2017년 7월 21일 (금) 21:43 판

틀:인물정보2

정의

조선 광해군, 인조시기 무신이다.

내용

이서과 집안에 대해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임숙(任叔), 호는 월봉(月峰)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이며 풍덕군수 이광윤(李光胤)의 중손이다. 할아버지는 위장(衛將) 이간(李幹)이며 아버지는 목사 완령부원군(完寧府院君) 이경록(李慶祿)이며, 어머니는 감찰 이학증(李學曾)의 딸이다. [1]

광해군시기 이서의 활동

1603년(선조 36)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행사용(行司勇)·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2] 그후 1611년(광해군 3)에는 남포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형벌을 엄하게 하여 백성들이 힘들게 하고, 과부와 정을 통하였다는 상소를 받아 파직 당했다. [3] 그러나 1년 후에는 다시 복직되어 장련 현감이 되었으며, [4] 1615년(광해군 7)년에는 곡산 군수가 되었다. 하지만 대신들이 그럴 능력이 안된다고 상소하는 일이 있었으나 파직되는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광해군의 인정을 받아 1616년(광해군 8)에는 호랑이를 잡은 공으로 가선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5] 2년 후 1617년(광해군 9)에는 한 포도 대장이, 공로가 많은 부장 고대근이 포상을 받지 못했다고 논상을 청하였다. 당시 고대근의 종사관 이었던 이서의 공적도 들어나 포상을 받게 되었다. [6] 1618년(광해군 10) 대북파에서 폐모론이 일어나자 무인으로는 유일하게 이서만 동조하지 않아 대북파와 다른 정치적 입장을 보였으며 [7] 1621년(광해군 13)에는 장단 부사에 임명되었다.

인조시기 이서의 활동

1623년(인조 1) 김류 이귀와 함께 의거를 공모하였고, 부임지인 장단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한양으로 들어와 이괄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인조반정을 일으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공로로 이서은 호조 판서에 올랐다. [8]

그리고 반정에 의해 정국이 어수선 하였고, 서북쪽 방어를 담당해야 하는 장수가 비어있었다. 당시 도원수 장만은 서북 부원수 자리로 두 사람을 천거했는데 바로 이서 과 이괄 이었다. 결국 이괄이 서북 부원수가 되었고 이서은 호조판서 직함으로 한양에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그해 10월 18일에는 녹훈이 내려저 정국 공신에 임명된다. 1년 후 1624년(인조 2) 공신 녹훈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반란을 일으키고 이서은 경기 관찰사로 전임 되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이괄을 추격하여 송도에 이르렀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추격을 못하였다. 그 여파로 관직에서 파직이 되나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복직되어 완풍군이란 작위를 받는다. 그리고 그해(1624)년에 여러가지 군사 재편과 전략에 대한 건의를 인조에게 하였으며 남한산성 형세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남한산성을 쌓는데 필요성을 주장하고 산성을 증축 하였는데 훗날 병자호란 시기에 이 산성이 큰 역할을 하였다. 1628(인조 6)년에는 형조 판서가 되었고, 1632(인조 10)년에는 공조 판서가 되어 각처에 산성을 쌓아서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634년(인조 12)에는 판 의금부사를 겸하고, 1636년(인조 14)에는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를 호위하여 남한산성에서 청나라군과 대치하다가 과로로 병사했다. [9]

무과에 급제하여 무인의 길을 걸었지만, 문인의 성품도 지니고 있는 양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취미가 독서 였고, 병서에 관심이 많았다. 인조반정시기 장단에서 군을 움직여 반정에 가담할때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이서을 따랐음으로, 성품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주요 저작으론 화포식언해 마경언해 신전자취염초방등 주로 병서를 저술 하였다.

주석

  1. 차용걸, 이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 중앙연구원.
  2. 차용걸, 이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 중앙연구원.
  3. 『광해군일기(정초본)』권39, 광해3년(1611) 3월 22일 임술,사헌부에서 임숙영의 용납과 남포 현감 이서의 포학을 논하니 이서를 파직하게 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의원회.
  4. 『광해군일기(정초본)』권51, 광해4년(1612) 3월 10일 갑진,이후·이서·임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의원회.
  5. 『광해군일기(정초본)』권104, 광해8년(1616) 6월 2일 신축,호랑이를 잡은 곡산 군수 이서에게 가선 자급을 더해 주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의원회.
  6. 『광해군일기(정초본)』권119, 광해9년(1617) 9월 11일 계유,포도 대장이, 공로가 많은데도 은전을 못받은 고대근의 논상을 청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의원회.
  7. 차용걸, 이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 중앙연구원.
  8. 『인조실록』권1, 인조1년(1623) 3월 17일 정미,이서·정홍익·민여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의원회.
  9. 차용걸, 이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 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유용한 자료

  • 차용걸, 이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 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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