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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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은 전면에 2개, 후면에 1개 등 모두 3개의 내용으로 구분되어 일반적인 비문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세 부분의 명문이 모두 동일한 건립 연대를 나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부분의 찬자(撰者)와 서자(書者)가 모두 다른 것은 비석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한 시점부터 모금 기간과 공사 기간을 합쳐 21년이라는 긴 기간이 걸렸기 때문으로 보인다.<ref>최연식, "[http://yeongam.grandculture.net/Contents?local=yeongam&dataType=99&contents_id=GC04400622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영암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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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전면 상단에는 전서체로 “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라 제액을 만들었으며, 당시 형조판서인 김광욱(金光煜)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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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좌측 비문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지었으며, 글씨는 예조판서 오준(吳竣)이 썼다. 비제(碑題)는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병서(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幷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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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의 비문은 비면 상하를 모두 채운 것이 아니고 비면 중간에서 시작하였다. 찬자는 [[이경석|이경석(李景奭)]]이며, 글씨는 홍문관 제학 [[오준|오준(吳竣)]]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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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2017년 6월 18일 (일) 23:17 판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靈巖 道岬寺 道詵國師 守眉禪師碑)
BHST Dogapsa Doseon-Sumi stele.jpg
대표명칭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영문명칭 Stele for State Preceptor Doseon and Master Sumi of Dogapsa Temple, Yeongam
한자 靈巖 道岬寺 道詵國師 守眉禪師碑
이칭 도갑사도선수미양대사비(道岬寺道詵守眉兩大師碑)
주소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사로 306, 도갑사 (도갑리)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1395호
문화재 지정일 2004년 1월 26일
찬자 이경석(李景奭), 정두경(鄭斗卿), 이수인(李壽仁)
서자 오준(吳竣)
각자 미상
서체 해서(楷書)
승려 도선(道詵), 수미(守眉)
건립연대 1653년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사(道岬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선각국사 도선(先覺國師 道詵, 827-898)과 조선시대의 승려인 묘각화상 수미(妙覺和尙 守眉)탑비.

내용

개요

전체 높이 약 4.8m, 폭 1.42m. 탑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를 모두 갖춘 형태로, 도갑사(道岬寺)의 부도전(浮屠田) 부근에 건립된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1]

보통 비는 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데 반해 이 비는 비명이 도선국사수미선사 두 사람의 공동명의로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주로 도선국사에 관한 것이며, 수미선사에 대해서는 1457년에 도갑사를 중창한 내용이 전하고 있다.[2]

이 비는 1636년(인조 14) 4월에 건립을 시작하여 17년 후인 1653년(효종 4) 4월에 완료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본래 이곳에 도선(道詵)의 고비(古碑)가 있었는데 비바람으로 글자가 마멸되고 귀부의 머리가 결락되는 등 훼손이 심하여 다시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영암 도갑사를 중창한 옥습대사(玉習大師)가 3년에 걸쳐 각 사찰에 다니면서 찬조를 구하는 한편, 신도들로부터 모금하고 한양까지 가서 비문을 청탁하였다. 비석에 사용된 돌은 전라도 관찰사의 도움으로 부역을 통해 여산(礪山)에서 운반해 왔으며, 돌이 도착한 이후 7개월 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한다.[3]

귀부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튼 형태인데 입에는 상·하 8개의 이빨로 여의주를 꽉 물고 있는 형상이다. 등에는 전형적인 귀갑문 대신 평행 사선문(斜線紋)으로 정연하게 음각하였다. 비신은 귀부이수와는 달리 대리석으로 조성했다. 비신의 양 측면에는 운룡문(雲龍紋)이 가득 양각되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마치 살아 있는 쌍룡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수에는 운문 위에 2마리의 용이 각각 이수의 양끝을 물고 있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4]

비문

비문은 전면에 2개, 후면에 1개 등 모두 3개의 내용으로 구분되어 일반적인 비문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세 부분의 명문이 모두 동일한 건립 연대를 나타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부분의 찬자(撰者)와 서자(書者)가 모두 다른 것은 비석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한 시점부터 모금 기간과 공사 기간을 합쳐 21년이라는 긴 기간이 걸렸기 때문으로 보인다.[5]

전면

비 전면 상단에는 전서체로 “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라 제액을 만들었으며, 당시 형조판서인 김광욱(金光煜)이 썼다.

비의 좌측 비문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지었으며, 글씨는 예조판서 오준(吳竣)이 썼다. 비제(碑題)는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병서(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幷序)”이다.

우측의 비문은 비면 상하를 모두 채운 것이 아니고 비면 중간에서 시작하였다. 찬자는 이경석(李景奭)이며, 글씨는 홍문관 제학 오준(吳竣)이 썼다.

후면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영암 도갑사 A는 B에 있다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도선 A는 B를 위한 비이다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수미 A는 B를 위한 비이다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이경석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정두경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오준 A는 B가 비문을 썼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최인선, "도갑사도선수미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최인선, "도갑사도선수미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최연식,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5. 최연식, "영암 도갑사 도선 국사·수미 선사비",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