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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8일 (월) 19:56 판

학봉 행장 언해
한글팀 학봉 행장 언해 01 표지.jpg
한자명칭 鶴峯行狀諺解
영문명칭 A Korean annotation of the behaviors of Kim Seongil written by Kim Juguk for his daughter
작자 김주국
간행시기 1770년
소장처 의성김씨 학봉종택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30.2×20.9㎝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표기문자 한글


정의

1770년(영조46)에 김주국(金柱國, 1710~1771)이 막내딸을 위하여 선조 학봉선생의 행장(行狀)을 한글로 번역하고 책으로 엮은 것이다.

내용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내용

1770년(영조46)에 김주국(金柱國, 1710~1771)이 막내딸을 위하여 선조 학봉선생의 행장(行狀)을 한글로 번역하고 책으로 엮은 것이다. 제목은『鶴峯先祖行狀』, 권수제는 『학봉김션장』이다. 표지 안의 면지에는 이 책의 편찬 경위에 관한 기록이 있다. “경인년 10월 19일에 책으로 장황하여 다섯째 딸 은실에게 주노라. 아비(着名). 소중한 행장이니 애중하고 함부로 내돌리지 말아라. 교정을 미처 못했으니 잘못 쓴 곳이 많으리라.”라는 내용이다. 이 기록에 포함된 착명(着名) 즉 오늘날의 서명(Sign)을 통해 글쓴이가 김주국임을 추정 할 수 있다. 다섯째 딸은 손성건(孫星建)에게 시집간 딸을 가리킨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경인년 1월 12일 진시 필서”라고 하여 한글로 필사한 시기를 기록해 두었다. 한글로 기록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행장은 1617년(광해군9) 10월에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지은 글을 번역한 것이다. [1]

행장(行狀)

행장(行狀)이란 한문 문체의 하나이다. 그 내용은 죽은 사람의 문생이나 친구, 옛날 동료, 아니면 그 아들이 죽은 사람의 세계(世系), 성명, 자호, 관향(貫鄕), 관작(官爵), 생졸연월, 자손록 및 평생의 언행 등을 서술하여 후일 사관(史官)들이 역사를 편찬하는 사료 또는 죽은 사람의 명문(銘文)·만장·비지·전기 등을 제작하는 데에 자료로 제공하려는 것이 기본 목적이다. 행장의 기원은 한대(漢代) 호간(胡幹)양원백(揚元伯)의 행장을 지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고, 육조(六朝)시기 이르러서야 행장 체제가 정립된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 역사가 조선 전기부터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문헌으론 『속동문선(續東文選)』이 있는데 여기에 「광릉부원군 이극배 행장(廣陵府院君李克培行狀)」이나 「충정공 허종 행장(忠貞公許琮行狀)」등의 행장이 나타난 것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내용이 장황해지고 번다하게 많이 쓰는 것이 좋은 것으로 인식되어 주소(奏疏)의 시말(始末), 사건의 배경, 그 의론(議論)과 행동거지의 철학적 근거, 이단(異端)을 배격해야 하는 이유, 심지어는 공초(供招)에 대한 내용과 그 의리의 타당성까지 세미하게 적어 그 양이 1권의 책자가 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행장의 방대한 형태가 배태된 것은 송대(宋代) 황간(黃幹)이 스승 주자(朱子)의 행장을 쓰면서 장장 40여 장을 쓴 데서 연유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요약하면 주자의 거취는 바로 세도(世道)의 흥망과 직결되며 후학의 준거틀이므로 일반적인 행장의 체와는 같을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황간의 영향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황간보다 더 갑절이나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행장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았다. 허목(許穆)은 “행장이란 그 행적을 쓰는 것이다. 나를 주공(周公)·공자(孔子)라 하여도 나는 주공·공자가 아니며, 나를 정자(程子)·주자라 하여도 나는 정자·주자가 아니다. 살았을 때에 주공·공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죽어 지하에서 주공·공자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당시의 사조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행장체가 모두 그러하였다는 것은 아니고 사람에 따라 또는 학파에 따라 전통을 고집하기도 하였다.[2]

학봉가문(鶴峯家門)의 예법

학봉 행장 언해의 내용에서 학봉가문(鶴峯家門)의 예법론 자체가 일반 사대부 가문과 차이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학봉 가문에서 추구하는 예법의 대상범위는 남성 사대부는 물론이고 여성도 중요한 교육의 대상으로 여겼고 심지어 노비들도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김성일 본인이 이런 가풍을 지키려 노력했다. 김성일은 혼인 이후 40년 동안 부인 안동권씨를 ‘소심경외(小心敬畏)’하며 예(禮)로써 대했고, 아무리 자잘한 일이라도 반드시 상의하여 처리함으로써 집안의 질서와 법도가 반듯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1592년 12월 24일 김성일이 산음에서 안동 납실 본가로 보낸 편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가문 학풍은 7세손인 김주국이 학봉행장을 언해하여학봉 행장 언해을 만들고 학봉 행장 언해을 시집간 다섯째 딸 은실에게 준 것이다. 그리고 9세손 김종국 은 자신이 직접 『여자초학(女子初學)』이란 교재를 직접 집필한다. 이 교재는 자신의 장녀 교육을 위한 책이며 이후 학봉가문에서는 이 책으로 여성을 교육 시켰다. [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구 학봉 행장 언해 A는 B를 저술하였다 1617년
학봉 행장 언해 행장 A는 B에 포함된다
김은실 김주국 A는 B의 딸이다
김성일 김주국 A는 B의 선조이다
손성건 김은실 A는 B의 남편이다
김주국 학봉 행장 언해 A는 B를 언해하였다 1770년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617년 학봉 행장 언해가 저술되었다
1770년 학봉 행장 언해가 한글로 언해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6.609771 128.669643 의성김씨 학봉종택에 학봉 행장 언해가 소장되어 있다.

시각자료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88쪽.
  2. 김도련, 행장(行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2일
  3. 김학수,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 가풍家風의 계승 양상 연구- 의성김씨 학봉가문鶴峯家門을 중심으로」,『국학연구』 권31, 국학진흥원, 2016, 77-102쪽.

참고문헌

  • 인용 및 참조
    1. 『월사집(月沙集)』
    2. 『외재집(畏齋集)』
    3. 『농암집(農巖集)』
    4. 『송자대전(宋子大全)』
    5. 『주자대전(朱子大全)』
    6. 『문체명변(文體明辨)』
    7. 김학수,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 가풍家風의 계승 양상 연구- 의성김씨 학봉가문鶴峯家門을 중심으로」, 『국학연구』 권31, 국학진흥원, 2016, 59-1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