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전 진작정례 의궤 언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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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는 7월 18일 원손(훗날 [[헌종]])의 탄생을 경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9월 9일에는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는 존숭례(尊崇禮), 다음날 10일에는 조촐한 술자리로 진작례(進爵禮)를 마련하였다. 이때 진작례는 [[순조]]와 [[순원왕후]]를 비롯하여 [[효명세자]], [[세자빈 조씨]], [[명온공주]], 좌우명부, 종친, 의빈, 척신으로 참석자를 한정하는 내연(內宴)으로 설행되었다. 따라서 상궁을 비롯한 여관(女官)들이 의례에 참여했고, 그들을 위하여 치사(致詞)·악장(樂章)·의주(儀註)·홀기(笏記) 등이 한글본으로 제작되었다. 한글본 의궤는 중궁전과 세자궁을 위한 것으로 한문본을 인출할 때 필사본으로 3건 제작하도록 하였다. 본 자료가 이 중 1건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는 7월 18일 원손(훗날 [[헌종]])의 탄생을 경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9월 9일에는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는 존숭례(尊崇禮), 다음날 10일에는 조촐한 술자리로 진작례(進爵禮)를 마련하였다. 이때 진작례는 [[순조]]와 [[순원왕후]]를 비롯하여 [[효명세자]], [[세자빈 조씨]], [[명온공주]], 좌우명부, 종친, 의빈, 척신으로 참석자를 한정하는 내연(內宴)으로 설행되었다. 따라서 상궁을 비롯한 여관(女官)들이 의례에 참여했고, 그들을 위하여 치사(致詞)·악장(樂章)·의주(儀註)·홀기(笏記) 등이 한글본으로 제작되었다. 한글본 의궤는 중궁전과 세자궁을 위한 것으로 한문본을 인출할 때 필사본으로 3건 제작하도록 하였다. 본 자료가 이 중 1건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3권 3책으로 제작되었다. 2권 2책의 한문본 의궤에 비해 분책의 형태가 조금 다르지만, 수록 내용은 동일하다.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분량이 증가하자 각 책의 두께를 일정하게 맞추기 위하여 분책한 것으로 추정된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98쪽.</REF>
 
이 책은 3권 3책으로 제작되었다. 2권 2책의 한문본 의궤에 비해 분책의 형태가 조금 다르지만, 수록 내용은 동일하다.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분량이 증가하자 각 책의 두께를 일정하게 맞추기 위하여 분책한 것으로 추정된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98쪽.</REF>
 
『경뎐진쟉졍례의궤(慈慶殿進爵整禮儀軌)』는 국내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한글본 의궤이다. 이것은 1827년(순조 27) 9월 10일에 효명세자가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하여 주관 설행한 진작의례(進爵儀禮)에 관한 기록으로서 한문본 의궤와 함께 제작된 것이다. 당시 한글본 의궤의 편찬 정황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많고, 한문본 의궤를 편찬할 당시에 축자 번역한 것이므로 내용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이와 관련하여 진작례를 위한 한글 홀기
 
「대뎐즁궁뎐 샹존호 후 왕셰진쟉 례 홀긔(大殿中宮殿上尊號後王世子自內進爵行禮笏記)」뿐만 아니라, 당시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는 존숭례(尊崇禮)에 관한 기록인 『상호도감의궤(上號都監儀軌)』, 존숭례를 위한 한글 홀기 「대뎐즁궁뎐 샹존호시 왕셰친샹보진치젼문표리 례 홀긔(大殿中宮殿上尊號時王世子自內親上冊寶進致詞箋文表裏行禮笏記)」도 함께 전하고 있다.
 
『자경전진작정례의궤』는 연향(宴享) 관련 의궤로서 순조대의 다른 왕실 잔치와 달리 규모가 작고 춤을 추는 정재(呈才) 없이 음악 연주를 배경으로 술과 치사를 올리는 의식에 그쳐 무용사나 음악사에서도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한글본 의궤에 주목한 국어사 분야에서 어휘와 번역 양상을 연구하기 위한 주요 자료로 다루었을 뿐이다. 그리고 최근에 의례 및 음악의 변천에 주목하면서 그 구체적인 내용이 소개된 바 있다. 1827년(순조 27) 9월 10일에 설행한 자경전 진작 의례는 효명세자(孝明世子)8)가 세자빈 조씨와의 사이에서 원손[憲宗]을 얻음에 따라 순조와 순원왕후를 경축하기 위하여 자경전(慈慶殿)에서 베푼 잔치이다. 전날 9일에는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존숭례(尊崇禮)를 거행하였는데, 모두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 처음으로 주관하는 의례였다. 효명세자는 7월 18일 원손을 얻은 뒤 양전(兩殿)에 존호를 올리기 위하여 22일부터 순조에게 다섯 차례나 상소를 올렸고, 24일에야 윤허를 얻었다. 25일에 존호를 정하였는데, 대전은 ‘연덕응도경인광희(淵德凝道景仁光禧)’, 중궁전의 존호는 ‘명경(明敬)’이었다. 다만 대전의 존호 중 ‘응도(凝道)’는 명나라 헌종황제의 존호이며, ‘광희(光禧)’는 선계(先系)의 휘자(諱字)라는 이의 제기에 따라 28일에 ‘연덕현도경인순희(淵德顯道景仁純禧)’로 고쳤다.9) 존호를 올린 뒤에는 조촐한 술자리를 베풀고자 ‘진작 의례’의 설행을 명하였는데, 진연(進宴)이나 진찬(進饌)보다 규모가 작은 연향으로서 이때 처음으로 설행한 것이다.
 
의절(儀節)은 병신년, 즉 1776년(영조 52)의 진찬을 참고하되 보다 넉넉하게 마련하라고 명하였다. 1776년(영조 52)에는 1월 7일과 2월 22일에 대리 청정을 시작한 왕세손[正祖]이 영조를 위하여 기사(耆社)에서 진찬을 베푼 바 있다. 효명세자는 대리 청정 이후 처음으로 잔치를 주관한 왕세손 시절의 정조와 자신의 상황을 동일하게 여기고 그를 따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작 의례의 체계적인 준비를 위하여 전담 기구로 진작정례소(進爵整禮所)를 공조에 설치하였고, 해당 관원들은 8월 5일에 처음 회동하였다. 진작정례소는 진작정례당상 2인, 낭청 6인, 분차계사 1인, 서리 10인, 사령 5인, 군사 및 포졸 4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존숭례와 함께 진작 의례를 거행할 장소는 창경궁의 자경전(慈慶殿)으로 결정하였다. 자경전은 정조가 1776년 즉위하자마자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5)를 위하여 지은 것으로14), 1777년(정조 1) 5월 16일에 완공하여 1778년(정조 2) 5월 2일부터 혜경궁 홍씨의 처소로 쓰였다. 이후 혜경궁을 위한 의례의 설행 장소로 자주 사용되면서 내연(內宴)의 주요 처소로 자리 잡았다.
 
현재 창경궁에는 자경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자경전진작정례의궤』의 도식을 통해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1828년(순조 28) 이후에 편찬된 『진작의궤(進爵儀軌)』나 『동궐도(東闕圖)』의 도식과는 다른 모습이다. 본래 정면 4칸이었으나, 중앙의 3칸 대청과 양쪽의 2칸으로 확장하여 정면 7칸의 건물이 되었고 서쪽 측면으로 2칸을 더 증축하였다. 1827년 9월에 자경전에서 처음으로 진작 의례를 크게 베풀면서 증축의 필요성이 제기된 결과로 보이나, 이듬해 2월 12일에 자경전에서 진작 의례가 설행되었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매우 짧은 기간 내에 증축된 것으로 보인다
 
 
3. 의궤(儀軌)
 
9월 10일 손시(巽時, 8시 반‒9시 반)에 시작한 진작 의례가 끝나자마자
 
효명세자는 곧바로 의궤(儀軌) 편찬을 명하였다. 진작 의례에 관한 모든
 
기록들을 모아 의궤로 편찬하되 『을묘정리의궤(乙卯整理儀軌)』에 의거하
 
여 교정할 뿐만 아니라 이와 동일한 활자로 인출하라고 명하였다.
 
『을묘정리의궤』는 1795년(정조 19)에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주갑을
 
맞아 현륭원에 배알하고 화성행궁의 봉수당(奉壽堂)에서 회갑연을 베풀
 
었던 일의 전말을 찬집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가리
 
킨다. 이는 동활자 ‘정리자(整理字)’를 주조하여 의궤로서는 처음으로
 
인쇄 간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조가 부모를 향한 효심으로 『원행을묘정
 
리의궤』를 만들었듯이 효명세자 또한 부모를 위한 잔치를 의궤로써
 
기념하고자 했다. 그 결과 두 의궤의 표지와 총목은 매우 유사하게
 
제작될 수 있었다(도6).
 
의궤를 편찬하는 일은 진작정례당상관을 맡았던 예조판서 조종영과
 
호조판서 박종훈을 의궤교정당상(儀軌校正堂上)으로 삼아 주관토록 하였
 
다.39) 이에 따라 진작정례소의 구성원으로 의궤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으나, 의례 준비와는 전혀 달라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이에 호조판서 박종훈은 진작정례소의 일과 맞지 않음을 강조하며 교정은
 
교서관, 간인은 규장각에서 하도록 건의하는 한편, 낭청을 6인에서 4인으로 감하고 호조에서 경비를 지급하게 하였다.40) 그러나 20여 일이 지나
 
9월 30일에 진행 상황을 점검하였을 때까지도 전혀 진척되지 않았다.
 
두 당상관 조종영과 박종훈이 회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각 해당
 
관사의 문서도 미처 취합하지 못하였다. 박종훈은 의궤가 정교하게 만들어
 
지지 못할 것을 우려하며 또다시 규장각에서 인출하도록 건의하였다.41)
 
한 달 가까이 의궤 편찬이 지체되자 효명세자는 전담 기구로 의궤소(儀
 
軌所)를 두어 교서관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10월 초2일에 낭청 이하의
 
관원들을 차출함에 따라 처음으로 의궤 편찬의 실무자들이 회동할 수
 
있었다. 의궤소는 의궤교정당상 2인, 낭청 3인, 분차계사 1명, 서리
 
6명, 서사 2명, 고직 1명, 사령 2명, 문서직 2명 총 19명으로 구성되었는
 
데42), 진작정례소의 관원들 가운데서 차출한 경우가 많았다. 의궤교정당
 
상, 낭청, 분차계사, 서리, 사령과 같이 주요 관원 14명이 모두 진작정례소
 
의 일을 전담했던 인물이다(표5).
 
 
『자경전진쟉졍례의궤』는 3권 3책으로 한문본 의궤와 수록 내용이 동일하다. 다만 2권 2책의 한문본을 분권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권3으로 나누었다. 한문본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분량이 증가함에 따라 각 책의 두께를 일정하게 맞추기 위하여 분책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문본과 또 다른 부분은 권 첫머리의 도식이다. 한문본과 동일한 목판 인쇄본을 수록하였으나, 텍스트와 도형으로 이루어진 도면 6개, 즉 [[자경전도]](慈慶殿圖), [[전내도]](殿內圖), [[동보계도]](東補階圖), [[서보계도]](西補階圖), [[외보계등가도]](外補階登歌圖), [[외보계헌가도]](外補階軒架圖)는 제외하였다. 그리고 그림 부분에는 진작에 참여하는 주요 인물의 자리를 한글로 명기해둔 것이 특징이다. <[[자경전진작도]](慈慶殿進爵圖)>에 ‘왕세자배위(王世子拜位)’, ‘셰자빈배위(世子嬪拜位)’, ‘공주배위(公主拜位)’, ‘명부(命婦)’를 한글로 써서 각각의 자리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한글본을 한문본과 조금 다르게 제작한 원인은 편찬 목적에서 찾을 수 있다. 본래 한글본 편찬을 명할 때 중궁전과 왕세자빈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혔으므로, [[순원왕후 김씨]]와 [[왕세자빈 조씨]] 두 분이 열람하여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편리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즉, 3책으로 분철하여 책의 두께를 조절한 것이나 의례의 집행에 요긴한 배치 도면을 수록하지 않은 것은 모두 비빈의 열람에만 초점을 맞춘 결과로 볼 수 있다.
 
[[효명세자]]가 한글본을 특별히 제작한 까닭은 순원왕후 김씨를 향한 효심에서 찾을 수도 있겠으나, [[정조]]대의 한글본 의궤 『[[뎡니의궤]](整理儀軌)』의 영향이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뎡니의궤』는 [[현륭원]] 행행, [[혜경궁 홍씨]] 탄신 경하, 화성 성역 세 부분의 내용을 날짜별로 모은 것으로 현재 48책 가운데 12책만 전한다.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위하여 여러 종류의 한글 문헌들을 제작한 전례로 볼 때 이 또한 혜경궁을 위하여 특별히 편찬한 책으로 보는 것이 무방하다.
 
『경뎐진쟉졍례의궤』는 표지, 본문 구성, 서체 등 많은 부분이 『뎡니의궤』와 매우 유사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특히 표제의 규격이나 서체는 동일인이 썼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본문 또한 9행 17‒19자 정도로 글자의 크기가 일정하며 궁궐의 여성들이 쓰는 궁체와는 전혀 다른
 
남성의 글씨로 쓴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유사한 형식을 갖춘 것은 효명세자가 할아버지 정조의 업적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를 위하여 다양한 한글 문헌을 편찬한 바 있는데, 효명세자가 여기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왕세손 시절 대리 청정을 시작할 때 마련한 진찬 의례를 따르고자 한 데서부터 의례의 전담기구로 정조의 ‘[[정리소]](整理所)’와 유사한 ‘[[진작정례소]](進爵整禮所)’를 설치한 것, 한문본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한글본 『뎡니의궤』에 따라 한문본 및 한글본 의궤를 제작한 것 등 하나하나 정조대의 전례를 따르는 모양새다.
 
  
 
==관련 항목==
 
==관련 항목==

2017년 5월 2일 (화) 13:43 판

자경전 진작졍례 의궤
한자명칭 慈慶殿進爵整禮儀軌
영문명칭 A Korean translation of a book of royal banquet at Jagyeongjeon hall, Changgyeonggung palace
작자 미상
간행시기 1828년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21.2×11.7㎝
판본 필사본
수량 1첩
표기문자 한글



정의

1827년(순조27) 9월 10일에 창경궁 자경전에서 설행된 진작 의례에 관한 것으로, 한문본 『자경전진작정례의궤(慈慶殿進爵整禮儀軌)』를 한글로 축자 번역한 것이다.

내용

1827년(순조27) 9월 10일에 창경궁 자경전에서 설행된 진작 의례에 관한 것으로, 한문본 『자경전진작정례의궤(慈慶殿進爵整禮儀軌)』를 한글로 축자 번역한 것이다. 의궤는 10건의 한문 인출본과 3건의 한글 필사본으로 제작되었으며, 1828년(순조28) 5월 10일에 제작이 완료되었다.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는 7월 18일 원손(훗날 헌종)의 탄생을 경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9월 9일에는 순조순원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는 존숭례(尊崇禮), 다음날 10일에는 조촐한 술자리로 진작례(進爵禮)를 마련하였다. 이때 진작례는 순조순원왕후를 비롯하여 효명세자, 세자빈 조씨, 명온공주, 좌우명부, 종친, 의빈, 척신으로 참석자를 한정하는 내연(內宴)으로 설행되었다. 따라서 상궁을 비롯한 여관(女官)들이 의례에 참여했고, 그들을 위하여 치사(致詞)·악장(樂章)·의주(儀註)·홀기(笏記) 등이 한글본으로 제작되었다. 한글본 의궤는 중궁전과 세자궁을 위한 것으로 한문본을 인출할 때 필사본으로 3건 제작하도록 하였다. 본 자료가 이 중 1건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3권 3책으로 제작되었다. 2권 2책의 한문본 의궤에 비해 분책의 형태가 조금 다르지만, 수록 내용은 동일하다.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분량이 증가하자 각 책의 두께를 일정하게 맞추기 위하여 분책한 것으로 추정된다. [1]

관련 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자경전 진작정례 의궤 언해 효명세자 A는 B와 관련이 있다
효명세자 현종 A는 B와 같다
순조 효명세자 A는 B의 어버이이다
순원왕후 효명세자 A는 B의 어버이이다
순조 순원왕후 A는 B의 남편이다
자경전 진작정례 의궤 언해 순원왕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자경전 진작정례 의궤 언해 순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자경전 진작정례 의궤 언해 세자빈 조씨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자경전 진작정례 의궤 언해 명온공주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자경전 진작정례 의궤 언해 자경전진작경례의궤 A는 B에 포함된다
자경전 진작정례 의궤 언해 자경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828년 효명세자의 탄생을 기념하여 자경전 진작정례 의궤 언해가 작성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462127 126.950338 자경전 진작정례 의궤 언해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