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2번째 줄: 12번째 줄:
 
}}
 
}}
 
=='''개요'''==
 
=='''개요'''==
해당 작품은 시위대 재1대대장이던 선생이 자결 순국하자 분개한 한국군이 일본군을 공격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
1907년 8월 1일 새벽, 일제는 대대장 이상의 장교를 일제 통감의 관저인 [[대관정|대관정(大觀亭)]]으로 집합시켰으나,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이었던 [[박승환]]은 병을 핑계로 고참 중대장인 [[김재흡]]을 대리 참석시켰다.<br/>
해당 작품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 [[민영환|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이 1905년 11월 30일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br/>
+
오전 10시에 부대로 돌아온 [[김재흡]] 중대장의 보고를 통해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사실을 알게 된 [[박승환]]
 
+
"군인은 국가를 위해 경비함이 직책이어늘 이제 외국이 침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군대를 해산하니, 이는 황제의 뜻이 아니요 적신이 황명을 위조함이니 내 죽을지언정 명을 받을 수 없다"
[[민영환]]은 조선왕조 [[고종]]때의 문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 의정 대신 [[조병세|조병세(趙秉世)]]와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민영환 유서|세 통의 유서]]를 남기고 1905년 11월 30일 새벽에 홀로 자결하였다.<br/>
+
라며 대성통곡한 뒤 대대장실에서 [[박승환 유서|유서]]를 쓰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있던 권총으로 자결, 순국하였다.<br/>
유서는 작품 왼쪽 아래 위치한 앉은뱅이 책상 위에 그려져 있는데, 작은 명함에 쓰여진 유서 한 통이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민영환 유서#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이고, 두루마기에 쓰여진 유서 통이 [[민영환 유서#미국공사관에 영향력있는 미국인 친지에게 보낸 유서|미국 공사관에 있는 친지에게 보낸 유서]],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요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 다른 한 통의 유서는 [[고종]] 황제에게 올린 글이다.<br/> 
+
해당 작품은 조선말기 순국지사 [[박승환]]이 권총으로 자결한 모습과, 그의 자결 순국에 분개한 한국군이 일본군을 공격하는 장면을 담은 기록화이다.
 +
=='''설명'''==
 +
===작품 소재===
 +
작품 오른편에 명의 부하에게 부축받고 있는 대대장이 [[박승환]]으로, 그의 발치에는 그가 자결에 사용했던 권총이 그려져 있다.<br/>
 +
작품 왼편 책상 위에는 [[박승환 유서|유서]]가 그려져 있는데, 유서에는 "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적혀있다.
 
<gallery>
 
<gallery>
 
파일:민영환의자결순국_민영환.JPG|<center>[[민영환]]</center>
 
파일:민영환의자결순국_민영환.JPG|<center>[[민영환]]</center>
22번째 줄: 26번째 줄:
 
파일:민영환자결순국_유서2.JPG|<center>두 통의 [[민영환 유서]]</center>
 
파일:민영환자결순국_유서2.JPG|<center>두 통의 [[민영환 유서]]</center>
 
</gallery>
 
</gallery>
작품 속 [[민영환]]은 훈장과 견장을 단 서구식 예복을 입고 있고, 왼손 근처에 작은 칼이 놓여져 있다. <br/>
 
작품에 묘사된 배경은 승려와 마당의 석등<ref>"현재까지의 유물조사에 의하면 석등은 주로 사찰·능묘, 그리고 그 유적지에 주로 남아 있으며, 궁궐이나 저택 등의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석등",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395 서비스](2017년 3월 2일 확인)</ref> 등을 고려하였을 때 [[조계사]] 뒤편에 있던 [[민영환]] 자택으로 추정되며 유해가 갈무리되지 않고 자결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그려져 있다.<br/>
 
현재 [[이완식]]의 집 터는 [[민영환 자결터]]로서 추모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민영환]]의 [[민영환 집터|자택]]이 위치했던 [[조계사]] 경내에는 [[민영환]]의 동상과 함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박승환]]의 자결에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이 분격하여 탄약고를 부수고 탄환을 꺼내어 무장 봉기하였는데, 제1연대 제1대대 봉기 소식을 듣고 제2연대 제1대대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하였다. 장병들은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며 전투에 들어갔는데, 작품 뒤쪽에 그려진 전투 장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
===작품 배경===
  
  
 +
<ref>"[http://sillok.history.go.kr/id/kaa_000047 태조실록 1권, 총서 47번째기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 온라인 서비스』<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4월 04일.</ref>
 +
 +
작품에 묘사된 배경은 승려와 마당의 석등<ref>"현재까지의 유물조사에 의하면 석등은 주로 사찰·능묘, 그리고 그 유적지에 주로 남아 있으며, 궁궐이나 저택 등의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석등",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395 서비스](2017년 3월 2일 확인)</ref> 등을 고려하였을 때 [[조계사]] 뒤편에 있던 [[민영환]] 자택으로 추정되며 유해가 갈무리되지 않고 자결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그려져 있다.<br/>
 +
현재 [[이완식]]의 집 터는 [[민영환 자결터]]로서 추모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민영환]]의 [[민영환 집터|자택]]이 위치했던 [[조계사]] 경내에는 [[민영환]]의 동상과 함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고려]] [[공민왕]]이 원·명 교체기의 공백상태를 이용하여 고려의 전통적인 북진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동녕부정벌]]을 일으켰는데, 해당 작품은 그 일환으로, 1370년 1월에 [[이성계]] 지휘하의 [[고려]]군이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동녕부]] [[오녀산성|우라산성(于羅山城)]]을 함락시키는 장면을 재현하였다.<br/>
 
이 작품은 정확한 인체묘사와 인물들의 표정, 의상과 배경에 대한 작가의 세심한 배려 등이 돋보이는 수작들 가운데 하나이다.<ref>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년, 92쪽.</ref>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9&contents_id=5501
  
남달리 반일 민족의식이 강했던 선생은 8월 1일 아침 일본군사령관 관저로 집합하라는 긴급 소집 연락을 받자, 병을 핑계로 고참 중대장인 김재흡을 대리 참석시켰다. 그런데 부대로 돌아온 김재흡 중대장의 보고를 통해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사실을 알게 된 선생은, “군인은 국가를 위하여 경비함이거늘 이제 외국이 침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군대를 해산하니 이는 황제의 뜻이 아니오 적신이 황명(皇命)을 위조함이니 내 죽을지언정 명을 받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대성통곡하였다. 그러면서 선생은 평소 품어 왔던 충군애국의 신념과 반일 국권회복을 실현하기 위해 살신성인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는 일찍부터 선생이 존경하였고, 또 서로 의기투합하여 선생을 지지 후원하다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민영환의 뒤를 따르는 길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라는 유서를 남기고, ‘대한제국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선생이 단행한 이와 같은 살신성인의 길은 죽음으로써 부하 장병들의 반일 무장투쟁을 명령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선생의 순국 사실을 전해 들은 휘하의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일제히 대대장과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고 봉기하여 반일 무장투쟁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웃에 위치한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장병들도 이에 호응, 봉기하여 일본군과 남대문에서 치열한 총격전과 백병전을 전개함으로써 대한제국 군대의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선생의 순국으로 폭발된 중앙 시위대의 봉기는 곧 이어 지방 진위대로 파급되어 원주 진위대, 수원 진위대 산하의 강화 분견대 장병들의 봉기와 반일 무장투쟁을 촉발하였다. 따라서 선생의 순국은 해산 군인들이 반일 의병운동에 투신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을 전국적인 국민적 대중운동으로 확산시켜 간 기폭제가 되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9&contents_id=5501
 
  
=='''설명'''==
 
===작품 소재===
 
작품 왼편에서 백마를 탄 흰색 갑옷의 장군이 [[이성계]]이고, 오른편에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이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첩목아|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이다.<br/>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오로첩목아|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가,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서 [[오녀산성|우라산성(亐羅山城)]]으로 옮겨 보전하여 험준한 곳에 웅거해 막으려고 하였는데, 태조가 야돈촌(也頓村)에 이르자, [[이오로첩목아]]가 와서 도전(挑戰)하다가 잠시 후에 갑옷을 버리고 재배(再拜)하며 말하기를,
 
"나의 선조(先祖)는 본래 고려 사람입니다. 신복(臣僕)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는, 3백여 호(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aa_000047 태조실록 1권, 총서 47번째기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 온라인 서비스』<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4월 04일.</ref>
 
해당 작품은 위와 같은 장면을 담고 있다.
 
===작품 배경===
 
작품의 배경인 [[오녀산성]]은 [[오녀산]]의 북쪽과 동쪽에 연결되어 있는 높고 낮은 여러 산봉우리 가운데서 가장 높고 험한 800m의 산마루를 중심으로 그 둘레에 축조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작품의 오른편에 그려진 [[오녀산성]]과 작품 뒤쪽에 배치된 높고 낮은 산봉우리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품 구도===
 
해당 작품은 승자와 패자의 극명한 대립, 즉 대각선으로 나뉘는 화면 상단과 하단이라는 위치선정, 아래를 내려다보고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의 대립, 기세등등한 포즈와 무릎을 꿇은 굴욕적인 포즈의 대립, 완전한 정면상은 아닐지라도 정면을 보여주고 있는 아군과 등을 보이고 있는 적군이라는 전통적인, 또는 도식화된 이분법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승리라는 메시지를 일차원적으로 전달할 따름이다.<ref>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년, 92쪽.</ref>
 
  
 
=='''시각적 안내'''==
 
=='''시각적 안내'''==
118번째 줄: 108번째 줄:
 
|[[이오로첩목아]] || [[오녀산성]]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이오로첩목아]] || [[오녀산성]]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
 +
 +
 +
그러면서 선생은 평소 품어 왔던 충군애국의 신념과 반일 국권회복을 실현하기 위해 살신성인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는 일찍부터 선생이 존경하였고, 또 서로 의기투합하여 선생을 지지 후원하다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민영환의 뒤를 따르는 길이기도 하였다.
 +
선생이 단행한 이와 같은 살신성인의 길은 죽음으로써 부하 장병들의 반일 무장투쟁을 명령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선생의 순국 사실을 전해 들은 휘하의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일제히 대대장과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고 봉기하여 반일 무장투쟁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웃에 위치한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장병들도 이에 호응, 봉기하여 일본군과 남대문에서 치열한 총격전과 백병전을 전개함으로써 대한제국 군대의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
선생의 순국으로 폭발된 중앙 시위대의 봉기는 곧 이어 지방 진위대로 파급되어 원주 진위대, 수원 진위대 산하의 강화 분견대 장병들의 봉기와 반일 무장투쟁을 촉발하였다. 따라서 선생의 순국은 해산 군인들이 반일 의병운동에 투신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을 전국적인 국민적 대중운동으로 확산시켜 간 기폭제가 되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2017년 4월 6일 (목) 02:18 판


박승환의 자결순국
박기태-박승환순국(박승환)-1976s.jpg
작가 박기태
제작연도 1976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계몽/항일
분류 유화
소장처 독립기념관


개요

1907년 8월 1일 새벽, 일제는 대대장 이상의 장교를 일제 통감의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으로 집합시켰으나,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이었던 박승환은 병을 핑계로 고참 중대장인 김재흡을 대리 참석시켰다.
오전 10시에 부대로 돌아온 김재흡 중대장의 보고를 통해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사실을 알게 된 박승환

"군인은 국가를 위해 경비함이 직책이어늘 이제 외국이 침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군대를 해산하니, 이는 황제의 뜻이 아니요 적신이 황명을 위조함이니 내 죽을지언정 명을 받을 수 없다"

라며 대성통곡한 뒤 대대장실에서 유서를 쓰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있던 권총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해당 작품은 조선말기 순국지사 박승환이 권총으로 자결한 모습과, 그의 자결 순국에 분개한 한국군이 일본군을 공격하는 장면을 담은 기록화이다.

설명

작품 소재

작품 오른편에 두 명의 부하에게 부축받고 있는 대대장이 박승환으로, 그의 발치에는 그가 자결에 사용했던 권총이 그려져 있다.
작품 왼편 책상 위에는 유서가 그려져 있는데, 유서에는 "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적혀있다.

박승환의 자결에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이 분격하여 탄약고를 부수고 탄환을 꺼내어 무장 봉기하였는데, 제1연대 제1대대 봉기 소식을 듣고 제2연대 제1대대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하였다. 장병들은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며 전투에 들어갔는데, 작품 뒤쪽에 그려진 전투 장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작품 배경

[1]

작품에 묘사된 배경은 승려와 마당의 석등[2] 등을 고려하였을 때 조계사 뒤편에 있던 민영환 자택으로 추정되며 유해가 갈무리되지 않고 자결할 당시의 상태 그대로 그려져 있다.
현재 이완식의 집 터는 민영환 자결터로서 추모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민영환자택이 위치했던 조계사 경내에는 민영환의 동상과 함께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9&contents_id=5501



시각적 안내

  • 그림위에 마우스를 올려 보세요.
박승환박승환 유서박기태 「박승환의 자결순국」 1976
이 그림에 대한 정보

관련 민족기록화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박기태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A는 B를 그렸다 1975년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박승환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박승환 유서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 ]]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전쟁기념관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A는 B를 소장하고 있다
국회사무처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 A가 B를 대여하였다 1991년 1월 8일-1992년 1월 7일
이성계 동녕부정벌 A는 B를 지휘하였다
이성계 오녀산성 A는 B를 공격하였다 1370년 1월
이성계 공민왕 A는 B의 신하이다
이성계 이오로첩목아 A는 B와 대립하였다 1370년 1월
오녀산성 동녕부 A는 B에 있었다
동녕부 쌍성총관부 A는 B와 관련이 있다
동녕부 탐라총관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이오로첩목아 오녀산성 A는 B와 관련이 있다


그러면서 선생은 평소 품어 왔던 충군애국의 신념과 반일 국권회복을 실현하기 위해 살신성인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는 일찍부터 선생이 존경하였고, 또 서로 의기투합하여 선생을 지지 후원하다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민영환의 뒤를 따르는 길이기도 하였다. 선생이 단행한 이와 같은 살신성인의 길은 죽음으로써 부하 장병들의 반일 무장투쟁을 명령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선생의 순국 사실을 전해 들은 휘하의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일제히 대대장과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고 봉기하여 반일 무장투쟁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웃에 위치한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장병들도 이에 호응, 봉기하여 일본군과 남대문에서 치열한 총격전과 백병전을 전개함으로써 대한제국 군대의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선생의 순국으로 폭발된 중앙 시위대의 봉기는 곧 이어 지방 진위대로 파급되어 원주 진위대, 수원 진위대 산하의 강화 분견대 장병들의 봉기와 반일 무장투쟁을 촉발하였다. 따라서 선생의 순국은 해산 군인들이 반일 의병운동에 투신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을 전국적인 국민적 대중운동으로 확산시켜 간 기폭제가 되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6년 박기태가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를 제작하였다.
1991년 1월 8일-1992년 1월 7일 국회사무처가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를 대여하였다. @
1370년 1월 이성계오녀산성을 공격하였다. @
1370년 1월 이성계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가 대립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4930829 127.0005288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은 국립현대미술관에 대여되었다.
36.7861847 127.2242915 박기태-박승환의 자결순국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래프

참고문헌@

  • "동녕부정벌, 『두산백과 온라인 서비스』online, 두산백과. 2017년 04월 04일 확인
  • "환인오녀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04일.

주석

  1. "태조실록 1권, 총서 47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서비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4월 04일.
  2. "현재까지의 유물조사에 의하면 석등은 주로 사찰·능묘, 그리고 그 유적지에 주로 남아 있으며, 궁궐이나 저택 등의 유적지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석등",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비스(2017년 3월 2일 확인)
  3.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15",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04일.
  4.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11",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04일.
  5. "민족기록화구국위업편8", 『국가기록원 기록물뷰어』online, 국가기록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