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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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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명으로 『[[불설대보부모은중경|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언해한 책이다.
 
[[정조]]의 명으로 『[[불설대보부모은중경|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언해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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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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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정조]]의 명으로 『[[불설대보부모은중경|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언해한 책이다. 이 책은 이전 판본과는 달리 판식과 삽화의 형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부모의 열 가지 큰 은혜를 표현한 [[변상도]] 10장과 그에 대한 송과 경문을 함께 싣고, 이어 부모의 한량없는 은혜는 보답하려 해도 다 갚을 수 없다는 여덟 가지 주제에 대한 [[변상도]] 8장을 실었다. 마지막으로 이 경전을 읽고 쓰고 참회함으로써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는 내용과 그러지 않을 경우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게 된다는 [[변상도]] 각 1장 등 총 21장의 [[변상도]]를 수록하였다. 특히 [[화성 용주사]]본에 수록된 [[변상도]]는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필치가 매우 완숙하고 섬세하다. 효를 주제로 한 『부모은중경』은 조선시대에 여러차례 간행되었는데,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이와 같이 변상도가 포함된 언해본의 간행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58-5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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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전 판본과는 달리 판식과 삽화의 형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부모의 열 가지 큰 은혜를 표현한 [[변상도]] 10장과 그에 대한 송과 경문을 함께 싣고, 이어 부모의 한량없는 은혜는 보답하려 해도 다 갚을 수 없다는 여덟 가지 주제에 대한 [[변상도]] 8장을 실었다. 마지막으로 이 경전을 읽고 쓰고 참회함으로써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는 내용과 그러지 않을 경우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게 된다는 [[변상도]] 각 1장 등 총 21장의 [[변상도]]를 수록하였다. 특히 [[화성 용주사]]본에 수록된 [[변상도]]는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필치가 매우 완숙하고 섬세하다. 효를 주제로 한 『부모은중경』은 조선시대에 여러차례 간행되었는데,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이와 같이 변상도가 포함된 언해본의 간행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58-5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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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대보부모은중경』 간행의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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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효(孝)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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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부모은중경』, 『은중경』으로도 불리며 부모님의 은혜가 깊음을 가르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부모의 은혜는 자녀를 잉태하여 지켜주신 은혜, 난산을 할까봐 걱정하신 은혜, 낳아서 길러주신 은혜, 젖을 먹여주신 은혜 등이다. 정조 때 효에 대한 책이 여러 번 간행되었는데 『[[오륜행실도]]』가 유교 중심적인 효 사상을 알리는 글이라면 『불설대보부모은경』은 부처님이 부모의 은혜에 대해 설법한 내용을 담았다. 이 시기에 이같이 효(孝)에 관한 교화서를 간행한 배경에는 죽은 [[사도세자]]와도 관련이 있으며 유교에서 아버지-임금으로 확장되는 효(孝)의 개념이 왕권 강화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ref>이성미, 「조선시대 풍속화에 나타난 효」, 성산효도대학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ref>그러나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어머니가 길러주신 은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어 [[사도세자]]의 일과 연관 짓기는 어렵다. 때문에 이 책의 정확한 편찬 의도를 파악하려면 당시 불교 사상의 부상과 [[정조]]의 불교관 변화를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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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불교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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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로 접어들면서 조선의 사상체계에도 다양한 변화가 찾아왔다. [[성리학]]이 여전히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으로서 강조되고 있기는 했지만 중국으로부터 [[양명학]]과 [[고증학]]이 전래되고 실학자들의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진보적 학자들에 의해 성리학 비판과 실학적 학풍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불교가 단지 이단일 뿐만이 아니라 학문적인 측면 면도 갖고 있으며 사회윤리를 이끌 만한 하나의 사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임금인 [[정조]] 또한 이러한 흐름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정조]]는 즉위 이전부터 불교는 [[성리학]]의 이념을 반하는 종교로서 불교가 흥하면 왕권이 흔들릴 것이라고 보아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죄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정조]]였기에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성리학적 이념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일반적인 성리학자들처럼 불교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불교가 풍속을 교화하고 세상을 위해 힘쓰는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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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불교 인식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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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조]]의 불교관을 변화시킨 계기는 세자의 탄생이었다. 원자였던 [[문효세자]]가 1786년(정조 10) 병으로 급사한데다 한동안 후사가 없어 [[정조]]는 깊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1789년 [[융건릉]](사도세자의 릉)을 화성으로 이전한 후 이듬해인 1790년에 기적적으로 [[순조|세자]]가 태어났다. [[정조]]는 이를 하늘의 은혜, 즉 부처의 은혜로 여기게 되었고 [[사도세자]]를 위해 정조 원년에 폐지했던 원찰(願刹:소원이나 죽은 자를 위한 병복을 비는 절)제를 부활시켜 [[화성 용주사]]를 창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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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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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조]]의 이러한 가치관 변화는 당시 성리학자들이 대부분인 조정의 관리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불경임에도 유교에서 강조하는 효(孝)의 이념을 내포하고 있어 불교의 유교적인 면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정조 자신의 불교관을 수용시키기에 적합한 수단이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간행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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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정조와 효(孝)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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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 년간 조선 왕실에서 불경을 출간하는 일은 호불군주(好佛君主:불교를 좋아하는 군주)를 자처한 [[세조]] 외에는 흔치 않았으며 호학(好學)의 군주, 성리학의 대가인 [[정조]]가 처음으로 간행한 불경이라는 점에서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의 의의가 있다.<ref>김준혁, 「正祖의 佛敎認識 變化」, 『중앙시론』 vol. 16, 한국중앙사학회, 2002</ref>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부모은중경』, 『은중경』으로도 불리며 부모님의 은혜가 깊음을 가르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부모의 은혜는 자녀를 잉태하여 지켜주신 은혜, 난산을 할까봐 걱정하신 은혜, 낳아서 길러주신 은혜, 젖을 먹여주신 은혜 등이다. 정조 때 효에 대한 책이 여러 번 간행되었는데 『[[오륜행실도]]』가 유교 중심적인 효 사상을 알리는 글이라면 『불설대보부모은경』은 부처님이 부모의 은혜에 설법한 내용을 담았다. 이 시기에 이같이 효(孝)에 관한 교화서를 간행한 배경에는 죽은 [[사도세자]]와도 관련이 있으며 유교에서 아버지-임금으로 확장되는 효(孝)의 개념이 왕권 강화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ref>이성미, 「조선시대 풍속화에 나타난 효」, 성산효도대학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ref>그러나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어머니가 길러주신 은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어 [[사도세자]]의 일과는 연관 짓기가 어렵다. 때문에 이 책의 정확한 편찬 의도를 파악하려면 당시 불교 사상의 부상과 [[정조]]의 불교관 변화를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정조와 불교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조선의 사상체계에도 다양한 변화가 찾아왔다. [[성리학]]이 여전히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으로서 강조되고 있기는 했지만 중국으로부터 [[양명학]]과 [[고증학]]이 전래되고 실학자들의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진보적 학자들에 의해 성리학 비판과 실학적 학풍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쳐 불교가 단지 이단일 뿐만이 아니라 학문적인 측면 면도 갖고 있으며 사회윤리를 이끌 만한 하나의 사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임금인 [[정조]] 또한 이러한 흐름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정조]]는 즉위 이전부터 불교는 [[성리학]]의 이념을 반하는 종교로서 불교가 흥하면 왕권이 흔들릴 것이라고 보아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죄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정조]]였기에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성리학적 이념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일반적인 성리학자들과 같이 불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불교의 풍속을 교화하고 세상을 위해 힘쓰는 면은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조]]의 불교관을 변화시킨 계기는 세자의 탄생이었다. 원자였던 [[문효세자]]가 1786년(정조 10) 병으로 급사한데다 한동안 후사도 태어나지 않아 [[정조]]는 깊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1789년 [[융건릉]](사도세자의 릉)을 화성으로 이전한 후 이듬해인 1790년에 기적적으로 [[순조|세자]]가 태어났다. [[정조]]는 이를 하늘의 은혜, 즉 부처의 은혜로 여기게 되었고 [[사도세자]]를 위해 원찰(願刹:소원이나 죽은 자를 위한 병복을 비는 절)제를 부활시켜 [[화성 용주사]]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이러한 가치관 변화는 당시 성리학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조정의 관리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불경임에도 유교에서 강조하는 효(孝)의 이념을 내포하고 있어 불교의 유교적인 면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자신의 불교관을 수용시키기에 적합한 수단이었다. 500여 년간 조선 왕실에서 불경을 출간하는 일은 호불군주(好佛君主:불교를 좋아하는 군주)를 자처한 [[세조]] 외에는 흔치 않았으며 호학(好學)의 군주, 성리학의 대가인 [[정조]]가 처음으로 간행한 불경이라는 점에서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큰 의의를 지닌다.<ref>김준혁, 「正祖의 佛敎認識 變化」, 『중앙시론』 vol. 16, 한국중앙사학회, 200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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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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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거리===
 
*단행본
 
*단행본
**박철호 외, 『효 교육 길라잡이』, 인천광역시교육과학연구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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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호 외, 『효 교육 길라잡이』, 인천광역시교육과학연구원, 2003.
 
*논문
 
*논문
**송일기,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의 초역본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22,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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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기,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의 초역본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vol.22, 서지학회, 2001.
====유용한 자료====
+
*웹자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4542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언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
+
**신성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4542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언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분류:한글고문서]]
 
[[분류:한글고문서]]
[[분류:장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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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전시자료]] [[분류:문헌]]
[[분류:전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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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장원석]] [[분류:김선미]]

2024년 4월 12일 (금) 09:35 기준 최신판

불설대보부모은중경
한글팀 불설대보부모은중경 01.jpg
한자명칭 佛說大報父母恩重經
영문명칭 Sakyamuni's teaching on parental love
작자 미상
작성시기 1796년
간행시기 조선후기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청구기호 3-227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34×22.2㎝
판본 목판본
수량 1冊
표기문자 한글, 한자


정의

정조의 명으로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언해한 책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이 책은 이전 판본과는 달리 판식과 삽화의 형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부모의 열 가지 큰 은혜를 표현한 변상도 10장과 그에 대한 송과 경문을 함께 싣고, 이어 부모의 한량없는 은혜는 보답하려 해도 다 갚을 수 없다는 여덟 가지 주제에 대한 변상도 8장을 실었다. 마지막으로 이 경전을 읽고 쓰고 참회함으로써 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는 내용과 그러지 않을 경우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게 된다는 변상도 각 1장 등 총 21장의 변상도를 수록하였다. 특히 화성 용주사본에 수록된 변상도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필치가 매우 완숙하고 섬세하다. 효를 주제로 한 『부모은중경』은 조선시대에 여러차례 간행되었는데,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이와 같이 변상도가 포함된 언해본의 간행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1]

『불설대보부모은중경』 간행의 시대적 배경

정조의 효(孝)사상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부모은중경』, 『은중경』으로도 불리며 부모님의 은혜가 깊음을 가르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부모의 은혜는 자녀를 잉태하여 지켜주신 은혜, 난산을 할까봐 걱정하신 은혜, 낳아서 길러주신 은혜, 젖을 먹여주신 은혜 등이다. 정조 때 효에 대한 책이 여러 번 간행되었는데 『오륜행실도』가 유교 중심적인 효 사상을 알리는 글이라면 『불설대보부모은경』은 부처님이 부모의 은혜에 대해 설법한 내용을 담았다. 이 시기에 이같이 효(孝)에 관한 교화서를 간행한 배경에는 죽은 사도세자와도 관련이 있으며 유교에서 아버지-임금으로 확장되는 효(孝)의 개념이 왕권 강화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2]그러나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어머니가 길러주신 은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어 사도세자의 일과 연관 짓기는 어렵다. 때문에 이 책의 정확한 편찬 의도를 파악하려면 당시 불교 사상의 부상과 정조의 불교관 변화를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정조의 불교 인식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조선의 사상체계에도 다양한 변화가 찾아왔다. 성리학이 여전히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으로서 강조되고 있기는 했지만 중국으로부터 양명학고증학이 전래되고 실학자들의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진보적 학자들에 의해 성리학 비판과 실학적 학풍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불교가 단지 이단일 뿐만이 아니라 학문적인 측면 면도 갖고 있으며 사회윤리를 이끌 만한 하나의 사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임금인 정조 또한 이러한 흐름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정조는 즉위 이전부터 불교는 성리학의 이념을 반하는 종교로서 불교가 흥하면 왕권이 흔들릴 것이라고 보아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죄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정조였기에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성리학적 이념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일반적인 성리학자들처럼 불교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불교가 풍속을 교화하고 세상을 위해 힘쓰는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

정조의 불교 인식 변화

이러한 정조의 불교관을 변화시킨 계기는 세자의 탄생이었다. 원자였던 문효세자가 1786년(정조 10) 병으로 급사한데다 한동안 후사가 없어 정조는 깊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1789년 융건릉(사도세자의 릉)을 화성으로 이전한 후 이듬해인 1790년에 기적적으로 세자가 태어났다. 정조는 이를 하늘의 은혜, 즉 부처의 은혜로 여기게 되었고 사도세자를 위해 정조 원년에 폐지했던 원찰(願刹:소원이나 죽은 자를 위한 병복을 비는 절)제를 부활시켜 화성 용주사를 창건하였다.

특징

그러나 정조의 이러한 가치관 변화는 당시 성리학자들이 대부분인 조정의 관리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불경임에도 유교에서 강조하는 효(孝)의 이념을 내포하고 있어 불교의 유교적인 면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정조 자신의 불교관을 수용시키기에 적합한 수단이었다.

의의

500여 년간 조선 왕실에서 불경을 출간하는 일은 호불군주(好佛君主:불교를 좋아하는 군주)를 자처한 세조 외에는 흔치 않았으며 호학(好學)의 군주, 성리학의 대가인 정조가 처음으로 간행한 불경이라는 점에서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의 의의가 있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오륜행실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조 오륜행실도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언해 편찬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언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언해 편찬 정조 A는 B를 명령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김홍도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언해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언해 편찬 사도세자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문효세자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언해 편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언해 편찬 순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화성 용주사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언해 편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조 문효세자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정조 순조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사도세자 정조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화성 용주사 융건릉 A는 B가 있는 곳이다 A dcterms:hasPart B
사도세자 융건릉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언해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시간정보

시간 내용
1786년 정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병으로 급사했다.
1789년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화성으로 천봉했다.
1790년 세자가 태어났다.
1796년 정조의 명으로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언해본이 간행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39197 127.054387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언해가 소장되어 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58-59쪽.
  2. 이성미, 「조선시대 풍속화에 나타난 효」, 성산효도대학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3. 김준혁, 「正祖의 佛敎認識 變化」, 『중앙시론』 vol. 16, 한국중앙사학회, 2002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박철호 외, 『효 교육 길라잡이』, 인천광역시교육과학연구원, 2003.
  • 논문
    • 송일기,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의 초역본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vol.22, 서지학회, 2001.
  • 웹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