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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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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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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예성강을 따라 개경에 도착한 [서긍(송나라)|서긍]]은 개경의 성곽이 엉성해 외적의 침입을 방비하기 어렵겠다고 우려를 표하면서도 궁궐의 화려함과 빼어남에는 감탄했다. "여러 제후들이 잔을 들어 천만수를 비니, 용포 위로 상서로운 빛이 넘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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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을 따라 개경에 도착한 [[서긍(송나라)|서긍]]은 개경의 성곽이 엉성해 외적의 침입을 방비하기 어렵겠다고 우려를 표하면서도 궁궐의 화려함과 빼어남에는 감탄했다. "여러 제후들이 잔을 들어 천만수를 비니, 용포 위로 상서로운 빛이 넘치는구나
 
"이라고 써진 글씨를 보고는 고려가 제후국으로서 예의를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왕과 대신들의 잔치를 보니 "군신 간의 예의가 분별이 있고, 말과 행동은 조심스러웠으며, 분위기는 엄숙해 오랑캐 중에서는 예의가 으뜸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여겼다.     
 
"이라고 써진 글씨를 보고는 고려가 제후국으로서 예의를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왕과 대신들의 잔치를 보니 "군신 간의 예의가 분별이 있고, 말과 행동은 조심스러웠으며, 분위기는 엄숙해 오랑캐 중에서는 예의가 으뜸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여겼다.     
  
[서긍(송나라)|서긍]]은 당시 고려 국왕인 인종은 물론이고, 이자겸과 김부식 등 여러 고려 문신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기록은, 물론 외부인의 시선에서 바라봤다는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에 충분히 남아 있다. 내가 [서긍(송나라)|서긍]]의 기록에서 주목한 부분은 바로 평범한 고려 인민의 삶이다. 다음은 [서긍(송나라)|서긍]]이 기록한 고려 인민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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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송나라)|서긍]]은 당시 고려 국왕인 인종은 물론이고, 이자겸과 김부식 등 여러 고려 문신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기록은, 물론 외부인의 시선에서 바라봤다는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에 충분히 남아 있다. 내가 [[서긍(송나라)|서긍]]의 기록에서 주목한 부분은 바로 평범한 고려 인민의 삶이다. 다음은 [[서긍(송나라)|서긍]]이 기록한 고려 인민의 삶이다.     
  
 
고려에도 송과 같은 시장이 있었지만 그 규모는 훨씬 빈약했고 화폐 역시 거의 유통되지 않은 채 창고에 보관되어 감상용으로만 쓰일 뿐 실제 사용되진 못했다. 불상이나 탑을 세울 때 넣거나 건물을 지을 때 기단 아래 묻는 정도로 쓰일 뿐이었다.     
 
고려에도 송과 같은 시장이 있었지만 그 규모는 훨씬 빈약했고 화폐 역시 거의 유통되지 않은 채 창고에 보관되어 감상용으로만 쓰일 뿐 실제 사용되진 못했다. 불상이나 탑을 세울 때 넣거나 건물을 지을 때 기단 아래 묻는 정도로 쓰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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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제가 있으나 실질적으로 관직에 오르는 데는 어려움이 많음에도 고려인들은 학구열이 뛰어났다. 문벌가뿐만 아니라 군졸과 어린 아이들도 향선생에게 글을 배우고 조정에서는 지방의 백성들을 위해 경학박사를 파견해 글을 가르친다. 여염집과 누추한 시장거리에도 책을 파는 가게가 두셋씩 있었다.       
 
과거제가 있으나 실질적으로 관직에 오르는 데는 어려움이 많음에도 고려인들은 학구열이 뛰어났다. 문벌가뿐만 아니라 군졸과 어린 아이들도 향선생에게 글을 배우고 조정에서는 지방의 백성들을 위해 경학박사를 파견해 글을 가르친다. 여염집과 누추한 시장거리에도 책을 파는 가게가 두셋씩 있었다.       
  
내용은 어디까지나 책이 서긍의 시선에서 서술한 만큼 서긍의 심정을 기술할 때 종종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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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어디까지나 책이 [[서긍(송나라)|서긍]]의 시선에서 서술한 만큼 [[서긍(송나라)|서긍]]의 심정을 기술할 때 종종 나올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의 나가는 말에서 모종의 착잡함을 느꼈다. 국제정세의 혼돈이라는 900년 전과 지금의 연결고리에서 비롯된 교훈,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쓸모를 어떻게든 찾으려는 시도가 보였다. 인문학을 비롯한 순수학문을 향해 쓸모 유무를 따지는 우리 사회 모습가 그에 절절 매는 학자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저 900주년이니 고려의 생생한 모습을 알기 쉬운 한 편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는 것 자체로도 이 책의 쓸모는 다한 것이 아닐까. 책을 잘 읽어놓고도 마지막에 아쉬움이랄까,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의 나가는 말에서 모종의 착잡함을 느꼈다. 국제정세의 혼돈이라는 900년 전과 지금의 연결고리에서 비롯된 교훈,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쓸모를 어떻게든 찾으려는 시도가 보였다. 인문학을 비롯한 순수학문을 향해 쓸모 유무를 따지는 우리 사회 모습가 그에 절절 매는 학자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저 900주년이니 고려의 생생한 모습을 알기 쉬운 한 편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는 것 자체로도 이 책의 쓸모는 다한 것이 아닐까. 책을 잘 읽어놓고도 마지막에 아쉬움이랄까,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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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900년 전, 당시 ​북송의 황제 휘종이 보내는 사신단이 바다 건너 고려로 향한다.​ '신주'라 불리는 사신단의 배 2척과 '객주', 즉 상인들의 배 6척 등 8척 규모였다. 선원은 객주 한 척에 60명 정도, 신주 한 척에는 180명 정도였다. 선원들과 156명의 사신단까지 모두 약 900명의 일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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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高麗圖經)』은 사신단 중에 [[서긍(송나라)|서긍]](徐兢)(1091~1153)이 황제의 명으로 고려에서 보고 들은 것을 세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도경'이란 이름처럼 그림도 수록되었으나 원본이 유실돼 지금은 글만 전해진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은 내륙의 수도 개봉(카이펑)에서 출발해 다시 황제 앞에 돌아오기까지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여정과 함께 그가 남긴 기록을 한 편의 이야기처럼 풀어낸다.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전하는 고려의 모습과 풍속 등은 물론 그가 어떤 사람이고, 당시 국제정세와 왜 북송이 고려와의 관계를 중시했는지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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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1123년 6월 12일 바닷길로 벽란도에 도착해 한 달 남짓 개경에 머물다가 송으로 돌아갔다.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본 고려 여인들은 머리카락의 반은 오른쪽 앞으로 늘어뜨리고, 나머지는 등 뒤로 늘어뜨렸다고 한다. 귀부인들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몽수(蒙首)라는 긴 너울을 써서 얼굴과 눈만 노출했다. 치마 속엔 바지를 입고, 외출할 땐 수레나 가마가 아닌 말을 탔다. 고려인들은 시냇물에 모여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의관을 언덕에 벗어놓은 후 목욕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상거래에선 주로 모시나 삼베, 은병으로 값을 치렀고 값어치가 작은 건 쌀로 지불했다. 송상을 통해 고려로 유입된 화폐는 왕부의 창고에 보관돼 잘 유통되지 않았다.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본 고려의 궁궐과 성곽, 관아 등의 모습도 자세히 담겨 있다. 고려인들은 바삐 걸었고, 불교 국가임에도 고관대작들의 집에서는 고기반찬이 끊이지 않았으며, 밤엔 곳곳에 불을 밝혔고 술 마시는 걸 즐겼다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의 모습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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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사행에 동행하는 것처럼 서술돼 독자가 마치 90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서긍의 그림 대신 삽입한 여러 삽화가 이해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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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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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서긍(송나라)|서긍]](徐兢) 길을 떠나다 - 봄날에 떠난 사행길 / 신선이 점지해 준 아이 / 현명하고 청렴한 관직 생활 / 황제도 반한 글씨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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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12세기 초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 연운 16주를 차지한 거란제국 / 탕구트족의 나라 서하 / 새롭게 부상한 북방의 강자 여진 / 고집 센 천재 개혁가 왕안석 / 집권당에 따라 달라진 송의 대외 정책 / 풍류천자의 방만한 재정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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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송의 사신선 신주와 객주 - 신주라는 말에 담긴 의미 / 신주와 객주의 규모와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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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신주의 고려 항로 - 신주가 있는 사명으로 / 바다로 나간 신주와 객주 / 두려움의 바다 흑수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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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고려의 바다에 들어선 송의 사신단 - 봉화가 시작되는 흑산도 /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만난 첫 고려인 / 김부식과 만난 [[서긍(송나라)|서긍]](徐兢) / 다양하게 생긴 고려의 선박들 / 군산도에서 마도로 / 두 번째 상륙지 안흥정 / 자연도라고 불렸던 영종도 / 고려 최대의 무역항 벽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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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란도 (예성강에 위치한 예성항) - 고려 시대에 중국 송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배가 드나들었던 국제 무역항이다. 처음에는 예성강 하구에 위치해 있어 ‘예성항’으로 불렀지만, 점차 외국 상인이나 사신들이 머물던 건물인 벽란정의 이름을 따 벽란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예성강은 물이 깊어 바다를 항해하는 큰 배도 쉽게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에 해상 교통이 발달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게다가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 가까워 외교의 중심지이자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의 송, 요(거란), 금나라는 물론 일본과 아라비아의 대식국까지 여러 나라와 교역 활동을 벌였다. 가장 빈번하게 교역이 이루어진 곳은 송나라였다. 고려는 벽란도를 통해 송으로부터 비단과 차, 약재, 책 등을 수입하고 인삼, 삼베, 모시, 종이, 먹 등을 수출했다. 멀리 아라비아나 페르시아, 동남아에서도 사신과 상인들이 드나들었는데, 벽란도를 거쳐 간 이들을 통해 고려의 이름이 ‘코리아’라는 발음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고도 한다. 벽란도는 고려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 무역항이었지만 조선 시대에 와서는 점차 그 역할이 작아졌다. 가장 큰 원인은 이전에 비해 육상의 교통이 발달했고, 다른 항구들도 생겨나 드나드는 배의 양이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 제국 이후 철도가 건설된 이후에는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거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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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예성강에서 개경으로 - 엄숙한 고려 의장대 / 송의 사신 행렬 / 산으로 둘러싸인 고려의 도성 /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눈에 비친 개경의 풍경 / 고구려와 고려를 구분하지 못한 [[서긍(송나라)|서긍]](徐兢) / 생각보다 엉성한 고려의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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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본 고려의 궁궐과 도성 - 장식이 빼어난 신봉문 / 궁궐 꾸미기를 좋아하는 고려인들 / 왕의 생일잔치를 열었던 장경전 / 학술기구 청연각과 보문각 / 크고 작은 9개의 전각들 / 도성 안의 여러 관청들 / 쌀을 오랫동안 보관하는 창고 / 빈약한 시장과 허울뿐인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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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만난 고려 사람들 - 어진 왕의 기질을 갖춘 고려왕 / 고려 최고의 훈척 이자겸 / 문장이 뛰어난 윤관의 아들 윤언식 / 소동파와 비견할 만한 김부식 / 수염이 아름다운 김인규 / 중화의 풍모를 가진 이지미 / 연회에서 만난 사람들 / 학구열이 높은 고려인들 / 송의 태학에 입학한 고려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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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고려인들의 복식과 의장 - 관등에 따라 장식과 색깔이 다른 관복 / 갑옷을 입은 말과 여러 종류의 수레 / 행진할 때 세우는 여러 종류의 기치(旗幟) / 신분에 따라 조금씩 다른 고려인들의 옷차림 / 고려식 히잡, 몽수를 쓴 고려의 귀부인들 / 고려 여인들 사이에서 유행한 한쪽 머리 묶기 / 물건을 이고 지고 아이까지 업은 고려 여인들 / 예의 바르고 부지런한 하급 관리들 / 사신의 시중을 드는 하인들 / 재주가 좋은 고려의 수공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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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고려의 풍속 - 부처를 숭상하는 나라 / 불을 밝히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 / 단술과 떡이 빠지지 않는 잔칫상 / 관리들의 일 처리 / 관리가 관리를 만났을 때 / 관리가 행차할 때 / 말을 타는 고려의 부인들 / 깨끗한 고려인, 잘 씻지 않는 중국인 / 산지에 만들어진 고려의 다락논 / 고기보다는 생선을 많이 먹는 고려인들 / 도살과 고기 요리에는 서툰 요리사 / 고려의 나무꾼 / 나무에 칼로 새겨서 셈하는 서리들 / 공덕을 쌓는 고려인들 / 고려의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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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사신관과 주변의 건물 - 사신들의 숙소 순천관 /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방 / 순천관 뒤편의 사신 숙소 / 여러 사신의 거처와 아름다운 정자들 / 사우와 도교사원 / 개경에서 가장 화려한 정국안화사 / 큰 종이 걸려있는 광통보제사 / 왕실 사찰 흥국사와 국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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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고려에서 본 그릇과 도구 - 은으로 만든 그릇 / 백동과 구리로 만든 그릇 / 물총새 깃을 닮은 고려의 비색 청자 / 차 마신 후에는 탕을 마시는 고려문화 / 투박하지만 실용적인 도기 술독 / 등나무를 엮어서 만든 광주리 / 죽솥과 물항아리 / 칼과 붓이 들어있는 만능 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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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돌아오는 길 - 신주에 다시 오른 사절단 / 위험한 항해, 연속되는 위기 / 자나깨나 나라 걱정
  
  

2024년 2월 5일 (월) 22:29 기준 최신판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예성강을 따라 개경에 도착한 서긍은 개경의 성곽이 엉성해 외적의 침입을 방비하기 어렵겠다고 우려를 표하면서도 궁궐의 화려함과 빼어남에는 감탄했다. "여러 제후들이 잔을 들어 천만수를 비니, 용포 위로 상서로운 빛이 넘치는구나 "이라고 써진 글씨를 보고는 고려가 제후국으로서 예의를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왕과 대신들의 잔치를 보니 "군신 간의 예의가 분별이 있고, 말과 행동은 조심스러웠으며, 분위기는 엄숙해 오랑캐 중에서는 예의가 으뜸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여겼다.

서긍은 당시 고려 국왕인 인종은 물론이고, 이자겸과 김부식 등 여러 고려 문신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기록은, 물론 외부인의 시선에서 바라봤다는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에 충분히 남아 있다. 내가 서긍의 기록에서 주목한 부분은 바로 평범한 고려 인민의 삶이다. 다음은 서긍이 기록한 고려 인민의 삶이다.

고려에도 송과 같은 시장이 있었지만 그 규모는 훨씬 빈약했고 화폐 역시 거의 유통되지 않은 채 창고에 보관되어 감상용으로만 쓰일 뿐 실제 사용되진 못했다. 불상이나 탑을 세울 때 넣거나 건물을 지을 때 기단 아래 묻는 정도로 쓰일 뿐이었다.

과거제가 있으나 실질적으로 관직에 오르는 데는 어려움이 많음에도 고려인들은 학구열이 뛰어났다. 문벌가뿐만 아니라 군졸과 어린 아이들도 향선생에게 글을 배우고 조정에서는 지방의 백성들을 위해 경학박사를 파견해 글을 가르친다. 여염집과 누추한 시장거리에도 책을 파는 가게가 두셋씩 있었다.

내용은 어디까지나 책이 서긍의 시선에서 서술한 만큼 서긍의 심정을 기술할 때 종종 나올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의 나가는 말에서 모종의 착잡함을 느꼈다. 국제정세의 혼돈이라는 900년 전과 지금의 연결고리에서 비롯된 교훈,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쓸모를 어떻게든 찾으려는 시도가 보였다. 인문학을 비롯한 순수학문을 향해 쓸모 유무를 따지는 우리 사회 모습가 그에 절절 매는 학자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저 900주년이니 고려의 생생한 모습을 알기 쉬운 한 편의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는 것 자체로도 이 책의 쓸모는 다한 것이 아닐까. 책을 잘 읽어놓고도 마지막에 아쉬움이랄까,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900년 전, 당시 ​북송의 황제 휘종이 보내는 사신단이 바다 건너 고려로 향한다.​ '신주'라 불리는 사신단의 배 2척과 '객주', 즉 상인들의 배 6척 등 8척 규모였다. 선원은 객주 한 척에 60명 정도, 신주 한 척에는 180명 정도였다. 선원들과 156명의 사신단까지 모두 약 900명의 일행이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은 사신단 중에 서긍(徐兢)(1091~1153)이 황제의 명으로 고려에서 보고 들은 것을 세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도경'이란 이름처럼 그림도 수록되었으나 원본이 유실돼 지금은 글만 전해진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은 내륙의 수도 개봉(카이펑)에서 출발해 다시 황제 앞에 돌아오기까지 서긍(徐兢)의 여정과 함께 그가 남긴 기록을 한 편의 이야기처럼 풀어낸다. 서긍(徐兢)이 전하는 고려의 모습과 풍속 등은 물론 그가 어떤 사람이고, 당시 국제정세와 왜 북송이 고려와의 관계를 중시했는지도 담았다.

서긍(徐兢)은 1123년 6월 12일 바닷길로 벽란도에 도착해 한 달 남짓 개경에 머물다가 송으로 돌아갔다. 서긍(徐兢)이 본 고려 여인들은 머리카락의 반은 오른쪽 앞으로 늘어뜨리고, 나머지는 등 뒤로 늘어뜨렸다고 한다. 귀부인들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몽수(蒙首)라는 긴 너울을 써서 얼굴과 눈만 노출했다. 치마 속엔 바지를 입고, 외출할 땐 수레나 가마가 아닌 말을 탔다. 고려인들은 시냇물에 모여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의관을 언덕에 벗어놓은 후 목욕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상거래에선 주로 모시나 삼베, 은병으로 값을 치렀고 값어치가 작은 건 쌀로 지불했다. 송상을 통해 고려로 유입된 화폐는 왕부의 창고에 보관돼 잘 유통되지 않았다. 서긍(徐兢)이 본 고려의 궁궐과 성곽, 관아 등의 모습도 자세히 담겨 있다. 고려인들은 바삐 걸었고, 불교 국가임에도 고관대작들의 집에서는 고기반찬이 끊이지 않았으며, 밤엔 곳곳에 불을 밝혔고 술 마시는 걸 즐겼다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의 모습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서긍(徐兢)의 사행에 동행하는 것처럼 서술돼 독자가 마치 90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서긍의 그림 대신 삽입한 여러 삽화가 이해를 돕는다.

▶ 목차

1장. 서긍(徐兢) 길을 떠나다 - 봄날에 떠난 사행길 / 신선이 점지해 준 아이 / 현명하고 청렴한 관직 생활 / 황제도 반한 글씨와 문장

2장. 12세기 초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 연운 16주를 차지한 거란제국 / 탕구트족의 나라 서하 / 새롭게 부상한 북방의 강자 여진 / 고집 센 천재 개혁가 왕안석 / 집권당에 따라 달라진 송의 대외 정책 / 풍류천자의 방만한 재정 운영

3장. 송의 사신선 신주와 객주 - 신주라는 말에 담긴 의미 / 신주와 객주의 규모와 형태

4장. 신주의 고려 항로 - 신주가 있는 사명으로 / 바다로 나간 신주와 객주 / 두려움의 바다 흑수양

5장. 고려의 바다에 들어선 송의 사신단 - 봉화가 시작되는 흑산도 / 서긍(徐兢)이 만난 첫 고려인 / 김부식과 만난 서긍(徐兢) / 다양하게 생긴 고려의 선박들 / 군산도에서 마도로 / 두 번째 상륙지 안흥정 / 자연도라고 불렸던 영종도 / 고려 최대의 무역항 벽란도

  • 벽란도 (예성강에 위치한 예성항) - 고려 시대에 중국 송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배가 드나들었던 국제 무역항이다. 처음에는 예성강 하구에 위치해 있어 ‘예성항’으로 불렀지만, 점차 외국 상인이나 사신들이 머물던 건물인 벽란정의 이름을 따 벽란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예성강은 물이 깊어 바다를 항해하는 큰 배도 쉽게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에 해상 교통이 발달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게다가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 가까워 외교의 중심지이자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의 송, 요(거란), 금나라는 물론 일본과 아라비아의 대식국까지 여러 나라와 교역 활동을 벌였다. 가장 빈번하게 교역이 이루어진 곳은 송나라였다. 고려는 벽란도를 통해 송으로부터 비단과 차, 약재, 책 등을 수입하고 인삼, 삼베, 모시, 종이, 먹 등을 수출했다. 멀리 아라비아나 페르시아, 동남아에서도 사신과 상인들이 드나들었는데, 벽란도를 거쳐 간 이들을 통해 고려의 이름이 ‘코리아’라는 발음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고도 한다. 벽란도는 고려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 무역항이었지만 조선 시대에 와서는 점차 그 역할이 작아졌다. 가장 큰 원인은 이전에 비해 육상의 교통이 발달했고, 다른 항구들도 생겨나 드나드는 배의 양이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 제국 이후 철도가 건설된 이후에는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거의 사라졌다.


6장. 예성강에서 개경으로 - 엄숙한 고려 의장대 / 송의 사신 행렬 / 산으로 둘러싸인 고려의 도성 / 서긍(徐兢)의 눈에 비친 개경의 풍경 / 고구려와 고려를 구분하지 못한 서긍(徐兢) / 생각보다 엉성한 고려의 성곽

7장. 서긍(徐兢)이 본 고려의 궁궐과 도성 - 장식이 빼어난 신봉문 / 궁궐 꾸미기를 좋아하는 고려인들 / 왕의 생일잔치를 열었던 장경전 / 학술기구 청연각과 보문각 / 크고 작은 9개의 전각들 / 도성 안의 여러 관청들 / 쌀을 오랫동안 보관하는 창고 / 빈약한 시장과 허울뿐인 화폐

8장. 서긍(徐兢)이 만난 고려 사람들 - 어진 왕의 기질을 갖춘 고려왕 / 고려 최고의 훈척 이자겸 / 문장이 뛰어난 윤관의 아들 윤언식 / 소동파와 비견할 만한 김부식 / 수염이 아름다운 김인규 / 중화의 풍모를 가진 이지미 / 연회에서 만난 사람들 / 학구열이 높은 고려인들 / 송의 태학에 입학한 고려인들

9장. 고려인들의 복식과 의장 - 관등에 따라 장식과 색깔이 다른 관복 / 갑옷을 입은 말과 여러 종류의 수레 / 행진할 때 세우는 여러 종류의 기치(旗幟) / 신분에 따라 조금씩 다른 고려인들의 옷차림 / 고려식 히잡, 몽수를 쓴 고려의 귀부인들 / 고려 여인들 사이에서 유행한 한쪽 머리 묶기 / 물건을 이고 지고 아이까지 업은 고려 여인들 / 예의 바르고 부지런한 하급 관리들 / 사신의 시중을 드는 하인들 / 재주가 좋은 고려의 수공업자들

10장. 고려의 풍속 - 부처를 숭상하는 나라 / 불을 밝히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 / 단술과 떡이 빠지지 않는 잔칫상 / 관리들의 일 처리 / 관리가 관리를 만났을 때 / 관리가 행차할 때 / 말을 타는 고려의 부인들 / 깨끗한 고려인, 잘 씻지 않는 중국인 / 산지에 만들어진 고려의 다락논 / 고기보다는 생선을 많이 먹는 고려인들 / 도살과 고기 요리에는 서툰 요리사 / 고려의 나무꾼 / 나무에 칼로 새겨서 셈하는 서리들 / 공덕을 쌓는 고려인들 / 고려의 특산물

11장. 사신관과 주변의 건물 - 사신들의 숙소 순천관 /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방 / 순천관 뒤편의 사신 숙소 / 여러 사신의 거처와 아름다운 정자들 / 사우와 도교사원 / 개경에서 가장 화려한 정국안화사 / 큰 종이 걸려있는 광통보제사 / 왕실 사찰 흥국사와 국청사

12장. 고려에서 본 그릇과 도구 - 은으로 만든 그릇 / 백동과 구리로 만든 그릇 / 물총새 깃을 닮은 고려의 비색 청자 / 차 마신 후에는 탕을 마시는 고려문화 / 투박하지만 실용적인 도기 술독 / 등나무를 엮어서 만든 광주리 / 죽솥과 물항아리 / 칼과 붓이 들어있는 만능 필통

13장. 돌아오는 길 - 신주에 다시 오른 사절단 / 위험한 항해, 연속되는 위기 / 자나깨나 나라 걱정


서긍(徐兢)

중국 송나라의 문신.

1123년(인종 1)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 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40권)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소개하였다.

현재 그림은 없고, 글만 전하는데 그 가운데의 우리말 소개는 우리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공으로 왕으로부터 상을 받았으며, 대종승을 거쳐 장서학을 역임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새만금 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1]]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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