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초상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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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역사인물초상화_초상_윤선도_표준영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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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http://www.kculture.or.kr/korean/portrait/portraitView.jsp?sp_seq=85 윤선도]", 선현의 표준영정,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민족정보마당』<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문화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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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약이(約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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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표 저서는 『고산유고』이다.
 
고산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표 저서는 『고산유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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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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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및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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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 한성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나 8세에 관찰공 유기(惟幾)의 양자가 되어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입적되었다. 윤선도는 윤돈의 딸 남원 윤씨와 결혼하여 윤인미를 낳았는데, 윤인미의 아들 윤이석의 양자가 바로 [[윤두서]]이다.<ref>전상욱"[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62 윤선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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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직한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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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는 그가 남긴 가훈에서도 알 수 있듯 선을 쌓고 공정한 태도를중요시 여겼는데 이는 그의 관직활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윤선도는 30세인 1616년, 당시 전횡을 일삼던 권신 이이첨을 탄핵하는 병진소를 올렸고 1694년에는 논원두표소를 올려 효종이 구상한 정국의 주요 인물이었던 원두표를 탄핵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잘 드러내는 일면이기는 하지만 윤선도가 관직생활 중 끊임없이 유배와 복위를 반복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특히 병진소에서 [[김제남 역모 사건]]을 언급하여 서인들을 정적으로 돌려 이후 유배와 복위를 반복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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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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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윤씨]]는 호남에서 몇 안되는 동인(東人) 가문이었는데 당시 [[정개청 옥사 | 정개청(鄭介淸) 옥사]]로 인해 그의 조부인  [[윤의중 | 윤의중(尹毅中)]]이 휘말리게 되었고 이후 동인이 남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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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년 윤선도는 국시소를 올려 정개청(鄭介淸)의 신원을 청하였고 이 일로 [[남구만]]이 윤선도에게 탄핵을 건의했으며 [[송시열 |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 | 송준길(宋浚吉)]] 등의 노론과 대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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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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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이듬해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로 남인의 삼년설과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고산은 남인으로서 삼년설을 주장하는 장문의 소를 올려 기년설을 주장한 [[송시열 |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한다. 이 때 박세채 가 「복제사의」를 지어 윤선도와 윤후 등의 3년복설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 논쟁에서 패한 그는 함경도 삼수(三水)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광양(光陽)으로 이배되는 등 약 8년간의 유배 생활을 겪는다<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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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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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이 때 지어진 대표적인 작품이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이다. 「어부사시사」는 40수의 단가로, 작자와 창작연대를 알수 없는 고려후기 「어부가」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문집으로는 [[고산유고 | 『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가 있다. 이 책은 [[서유린]]이 [[조선 정조 | 정조]]의 명을 받고 간행한 것으로, 한시문이 실려 있고, 별집에는 한시문과 시조(35편), 「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 윤선도는 [[강호문학]]의 대가로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ref>전상욱"[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62 윤선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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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에서의 은거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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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는 [[병자호란 | 호란]]이 발발한 후 가솔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올라가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주도로 배를 돌린다. 이 떄 제주도로 향하던 도중 잠시 들렸던 [[보길도]]에 매료되어 보길도로의 입향 및 은거를 결심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삶의 전환정이 되었다. <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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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년(현종8) 8월 해남으로 돌아온 윤선도는 해남으로 내려오면서 수원의 집 일부를 뜯어 옮겨왔다. 이 집은 효종이 즉위 후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지어준 집으로 현재 녹우당 사랑채이다. 지금은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해남윤씨 녹우당 | 녹우당]]이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그 사랑채 이름이 녹우당이었다. 녹우당 근처에는 [[낙서재]]를 지어 그곳에 머물며 창작 활동에 전념하였다. <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12&cp_code=cp0422&index_id=cp04220098&content_id=cp042200980001&search_left_menu= 해남 윤씨 윤선도 묘와 고택 녹우당]",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 인근의 [[진도 굴포당]]에는 윤선도가 직접 심은 소나무가 현재까지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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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
 
===윤선도의 생애===
 
===윤선도의 생애===
*출생 및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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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및 성장====
 
고산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 한성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나 8세에 관찰공 유기(惟幾)의 양자가 되어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입적되었다. [[해남 윤씨]]는 호남에서 몇 안되는 동인(東人) 가문이었는데 당시 [[정계청 | 정계청(鄭介淸)]] 옥사 사건으로 인해 그의 조부인  윤의중(尹毅中)이 휘말리게 되었고 이후 동인이 남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윤선도가 진사시에 합격한 1612년(광해군 4)은 정치적 열세에 몰린 남인들이 왕권 강화와 북인(北人), 서인(西人)의 타도를 주장하며 복권을 시도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이후 윤선도가 수없이 많은 유배를 겪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고산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 한성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나 8세에 관찰공 유기(惟幾)의 양자가 되어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입적되었다. [[해남 윤씨]]는 호남에서 몇 안되는 동인(東人) 가문이었는데 당시 [[정계청 | 정계청(鄭介淸)]] 옥사 사건으로 인해 그의 조부인  윤의중(尹毅中)이 휘말리게 되었고 이후 동인이 남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윤선도가 진사시에 합격한 1612년(광해군 4)은 정치적 열세에 몰린 남인들이 왕권 강화와 북인(北人), 서인(西人)의 타도를 주장하며 복권을 시도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이후 윤선도가 수없이 많은 유배를 겪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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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활동====
윤선도가 처음으로 정치 현실에 뛰어든 것은 광해군 시절 권신이던 [[이이첨]]의 전횡에 대해 비판적 상소를 올린 일에서 시작되었다. 1616년(광해군 8), 한갓 유생에 불과했던 서른 살의 윤선도가 당대의 권신이었던 [[이이참]]의 전횡을 탄핵한 「병진소(丙辰疏)」는 이후 고산의 삶을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예 관료로 정계에 갓 입문한 그가 권력의 정점에 선인물과 직접적으로 대결한 이 사건은 당시에 큰 반항을 일으켰다. 고산의 강직한 성품과 투철한 사대부 의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사건임에는 틀림 없지만 이때문에 윤선도는 이이참과 그 세력들에 의해 경원(慶源)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는데 이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겪은 수많은 유배 경험의 시발점이 되었다. <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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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소(丙辰疏)」를 저술하여 정쟁에 뛰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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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가 처음으로 정치 현실에 뛰어든 것은 광해군 시절 권신이던 [[이이첨]]의 전횡에 대해 비판적 상소를 올린 일에서 시작되었다. 1616년(광해군 8), 한갓 유생에 불과했던 서른 살의 윤선도가 당대의 권신이었던 [[이이참]]의 전횡을 탄핵한 [[병진소 | 「병진소(丙辰疏)」]]는 이후 고산의 삶을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예 관료로 정계에 갓 입문한 그가 권력의 정점에 선 인물과 직접적으로 대결한 이 사건은 당시에 큰 반항을 일으켰다. 고산의 강직한 성품과 투철한 사대부 의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사건임에는 틀림 없지만 이때문에 윤선도는 이이참과 그 세력들에 의해 경원(慶源)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는데 이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겪은 수많은 유배 경험의 시발점이 되었다. <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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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과의 대립과 유배
 
또한 이 사건은 [[인조반정]] 이후 고산이 서인 정권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과 동시에 서인들로부터 배척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가 「병진소(丙辰疏)」에서 언급한 [[김제남 역모 사건]]이  서인들이 상당한 희생을 치루는 계기를 제공하는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윤선도가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1623년 인조 반정 이후였다. 그러나 서인 중심의 정계에서 재제외어 출사의 기회를 잡지 못했고, 서인들의 견제로 인해 의금부 도사에 제수받자 이에 불만을 품고 해남으로 이향하였다. <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또한 이 사건은 [[인조반정]] 이후 고산이 서인 정권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과 동시에 서인들로부터 배척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가 「병진소(丙辰疏)」에서 언급한 [[김제남 역모 사건]]이  서인들이 상당한 희생을 치루는 계기를 제공하는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윤선도가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1623년 인조 반정 이후였다. 그러나 서인 중심의 정계에서 재제외어 출사의 기회를 잡지 못했고, 서인들의 견제로 인해 의금부 도사에 제수받자 이에 불만을 품고 해남으로 이향하였다. <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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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는 1628년(인조 6) 42세의 나이로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하여 다시 정계로 진출하였다. 그는 당시 이조판서였던 계곡 [[장유 | 장유(谿谷 張維)]]의 도움을 받아 [[봉림대군 |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 |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로 제수되고 이후 공조좌랑, 하성부 서윤, 시강원 문학 등의 요직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1634년(인조 12) 정적들의 견제에 의해 성산 현감(星山 縣監)으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다시 퇴관하여 해남으로 물러났다. <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윤선도는 1628년(인조 6) 42세의 나이로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하여 다시 정계로 진출하였다. 그는 당시 이조판서였던 계곡 장유(谿谷 張維)의 도움을 받아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로 제수되고 이후 공조좌랑, 하성부 서윤, 시강원 문학 등의 요직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1634년(인조 12) 정적들의 견제에 의해 성산 현감(星山 縣監)으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다시 퇴관하여 해남으로 물러났다. <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보길도 입향
 
*보길도 입향
윤선도는 호란이 발발한 후 가솔들을 이끌고 강화도로올라가다가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 | 삼전도에서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주도로 배를 돌린다. 이 일로 인해 윤선도는 '남한산성에서 왕을 알현하지 않고 돌아갔다(不奔問)'는 죄목으로 1638년 영덕으로 유배를 가는 등 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를 견제할 수 있는 명분을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떄 제주도로 향하던 도중 잠시 들렸던 [[보길도]]에 매료되어 보길도로의 입향 및 은거를 결심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삶의 전환정이 되었다. <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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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는 [[병자호란 | 호란]]이 발발한 후 가솔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올라가다가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 | 삼전도에서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주도로 배를 돌린다. 이 일로 인해 윤선도는 '남한산성에서 왕을 알현하지 않고 돌아갔다(不奔問)'는 죄목으로 1638년 영덕으로 유배를 가는 등 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를 견제할 수 있는 명분을 주게 된다. 그러나 이 떄 제주도로 향하던 도중 잠시 들렸던 [[보길도]]에 매료되어 보길도로의 입향 및 은거를 결심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삶의 전환정이 되었다. <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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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표를 탄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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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는 1649년 다시 복관된 이후로 끊임없는 정쟁으로 인한 복관과 삭탈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인재를 등용하기를 청원하는 「시무팔조소(陳時務八條疏)」와 당시 실력자인 [[원두표]]를 탄핵하는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등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병진소(丙辰疏)」와 더불어 그의 강직하고 원칙주의적인 성품을 잘 나타내고 있다. <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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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의 시발점을 제공하다
윤선도는 1649년 다시 복관된 이후로 끊임없는 정쟁으로 인한 복관과 삭탈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인재를 등용하기를 청원하는 「시무팔조소(陳時務八條疏)」와 당시 실력자인 원두표를 탄핵하는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등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병진소(丙辰疏)」와 더불어 그의 강직하고 원칙주의적인 성품을 잘 나타내고 있다. <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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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고산은 73세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어 효종의 산릉을 간심(看審)하는 데 참여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추천한 수원(水原)이 채택되었다가 취소되고 건원릉(健元陵) 안 건좌(乾坐) 언덕이 채택되면서 파직당한 것은 본격적인 [[예송논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듬해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로 남인의 삼년설과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고산은 남인으로서 삼년설을 주장하는 장문의 소를 올려 기년설을 주장한 [[송시열 |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한다. 이 논쟁에서 패한 그는 함경도 삼수(三水)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광양(光陽)으로 이배되는 등 약 8년간의 유배 생활을 겪는다. 삼수의 유배지에 도착한 그는 「예설(禮說)」 두 편을 지어 복제 문제를 소상히 밝히고 있는데, 이를 통해 끝내 타협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다시금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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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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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년(현종8) 8월 해남으로 돌아온 윤선도는 9월에 다시 부용동으로 돌아간다. 윤선도는 해남으로 내려오면서 수원의 집 일부를 뜯어 옮겨왔다. 이 집은 효종이 즉위 후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지어준 집으로 현재 녹우당 사랑채이다. 지금은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해남윤씨 녹우당 | 녹우당]]이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그 사랑채 이름이 녹우당이었다.<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12&cp_code=cp0422&index_id=cp04220098&content_id=cp042200980001&search_left_menu= 해남 윤씨 윤선도 묘와 고택 녹우당]",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ref> 그곳에서 5년여간 유유자적하면서 보내다가 1671년에 85세로 별세한다.<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예송논쟁
+
===고산의 문학 활동===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고산은 73세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어 효종의 산릉을 간심(看審)하는 데 참여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추천한 수원(水原)채택되었다가 취소되고 건원릉(健元陵) 안 건좌(乾坐) 언덕이 채택되면서 파직당한 것은 본격적인 예송 논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듬해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로 남인의 삼년설과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고산은 남인으로서 삼년설을 주장하는 장문의 소를 올려 기년설을 주장한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한다. 이 논쟁에서 패한 그는 함경도 삼수(三水)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광양(光陽)으로 이배되는 등 약 8년간의 유배 생활을 겪는다. 삼수의 유배지에 도착한 그는 「예설(禮說)」 두 편을 지어 복제 문제를 소상히 밝히고 있는데, 이를 통해 끝내 타협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다시금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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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이 때 지어진 대표적인 작품이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이다. 「어부사시사」는 40수의 단가로, 작자와 창작연대를 알수 없는 고려후기 「어부가」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이외 윤선도는 시기에 「 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고금영(古今詠)」·「증반금(贈伴琴)」 등을 지었다. 이후 효종대 예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한 윤선도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고산에서 생활하였다. 이 곳에서 윤선도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 몽천요(夢天謠)」를 지었다. 문집으로는 [[고산유고 | 『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가 있다. 이 책은 [[서유린]]이 [[조선 정조 | 정조]]의 명을 받고 간행한 것으로, 한시문이 실려 있고, 별집에는 한시문과 시조(35편), 「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이 밖에 친필로 된 가첩으로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와 『산중신곡』이 전한다. 윤선도는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ref>전상욱"[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62 윤선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667년(현종8) 8월 해남으로 돌아온 고산은 9월에 다시 부용동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5년여간 유유자적하면서 보내다가 1671년에 85세로 별세한다. 이처럼 고산의 일생은 청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임병양란의 사회적 혼란과 사색당파의 어지러운 정치 현실 속에서 파란만장한 부침을 거듭하였다.<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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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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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윤씨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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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A057/A057.htm 윤인미 배지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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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A207/A207.htm 조선 중기의 대표적 문인들과 한글 시가 지식관계망]'''
  
===고산의 문학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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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이분법적 세계 인식과 현실 지향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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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의 한시를 일별해 보면, 그가 강호(江湖)와 세속(世俗)을 양분하여 배타적인 구도로 인식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은 조선 전기의 사대부 문학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것으로, 그의 한시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도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외형적으로는 유사하더라도 시대적 정황과 개인의 현실적 처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산의 경우 강호의 생활이 현실과 단절된 모습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긴장을 끊임없이 지속한다는 점이다.<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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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구만]] || [[윤선도]] || A는 B와 대립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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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채]] || [[윤선도]] || A는 B와 대립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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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문학]] || [[윤선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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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무학]] || [[이현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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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선도]] || [[윤두서]] || A는 B의 선조이다 || A ekc:hasDescendant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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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선도 표준영정]] || [[윤선도]]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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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 굴포당]] || [[윤선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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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친화적 태도와 심미적 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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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정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산에게 강호의 생활은 타의에 의해 강요된 선택이었다. 하지만 격동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부침을 거듭하던 고산의 일생은 오히려 강호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흥취를 얻고 향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얻은 심미적 체험은 그에게 시작품을 통해 자연 경물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창작 동기와 여건을 아울러 얻게 해 주었다. 따라서 사물의 다양한 모습은 그의 시에서 중요한 주제가 된다.<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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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20%px"|시간!!style="width:80%px"|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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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 병진소를 지어 이이첨을 탄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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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년 || 85세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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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사물에의 성찰과 삶의 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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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감동을 느끼고 그것을 시로 형상화하는 것은 시 창작의 기본 원리이다. 한시에서 계절의 순환, 사물의 생동(生動) 등이 많이 다루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성리학을 학습하고 삶의 이법과 지표로 받아들였던 당대에서는 누구에게나 통용될 만한 일반적인 명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물(觀物)의 자세는 이론적으로는 서로 유사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개인이 서 있는 시대와 처지에 따라 그 주목하는 바가 상이하게 나타난다.
+
===가상현실===
고산도 많은 시작(詩作)에서 다양한 경물을 제재로 하여 형상화하였다. 다만 고산의 경우는 사물의 본래적 의미에서 화석화되고 관념화된 경물, 예컨대 흔히 사군자(四君子)로 일컬어지는 ‘매란국죽(梅蘭菊竹)’이나 ‘연비어약(鳶飛魚躍)’과 ‘운영천광(雲影天光)’ 등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주위에 함께 공존하는 세계 속의 지극히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사물들이다.<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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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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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ckable button|[http://dh.aks.ac.kr/Encyves/Pavilions/E001/S001/S001.htm 가상 현실 - 전체 화면 보기]}}
  
*산문의 내용과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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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현전하는 고산의 산문 작품은 운문 작품과는 달리 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다루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도 문학적이라기보다는 현실 참여적인 데에 초점을 둔 실용문이다. 그렇지만 고산의 명성이 널리 알려진 것은 운문이 아니라 바로 이 산문 때문이다. 실제로 고산의 문장은 수준이나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기록에서도 ‘능문(能文)’으로 인정될 만큼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ref>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332A 헤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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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역사인물초상화_초상_윤선도_표준영정.jpg | 윤선도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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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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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jc,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 - 고산 윤선도", ''YOUTUBE'', 작성일:2013년 0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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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yeFI-59kxFk"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html>
  
 
=='''주석'''==
 
=='''주석'''==
79번째 줄: 174번째 줄:
 
**정명래, 『어부사시사 : 낚시꾼이 풀어쓴 孤山 尹善道』, 샘물, 2015
 
**정명래, 『어부사시사 : 낚시꾼이 풀어쓴 孤山 尹善道』, 샘물, 2015
  
[[분류: 한글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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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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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역사인물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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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역사인물]] [[분류:인물]]

2020년 2월 18일 (화) 00:02 기준 최신판


윤선도(尹善道)
"윤선도", 선현의 표준영정, 『한민족정보마당』online, 한국문화정보원.
대표명칭 윤선도
한자표기 尹善道
생몰년 1587-1671
본관 해남(海南)
고산(孤山), 해옹(海翁)
약이(約而)
출생지 한성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저서 고산유고
대표직함 동부승지
윤유심(尹唯深)



정의

고산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표 저서는 『고산유고』이다.

생애

  • 출생 및 가족관계

고산 윤선도는 1587년(선조 20) 한성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나 8세에 관찰공 유기(惟幾)의 양자가 되어 해남 윤씨의 종손으로 입적되었다. 윤선도는 윤돈의 딸 남원 윤씨와 결혼하여 윤인미를 낳았는데, 윤인미의 아들 윤이석의 양자가 바로 윤두서이다.[1]

  • 강직한 성품

윤선도는 그가 남긴 가훈에서도 알 수 있듯 선을 쌓고 공정한 태도를중요시 여겼는데 이는 그의 관직활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윤선도는 30세인 1616년, 당시 전횡을 일삼던 권신 이이첨을 탄핵하는 병진소를 올렸고 1694년에는 논원두표소를 올려 효종이 구상한 정국의 주요 인물이었던 원두표를 탄핵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잘 드러내는 일면이기는 하지만 윤선도가 관직생활 중 끊임없이 유배와 복위를 반복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특히 병진소에서 김제남 역모 사건을 언급하여 서인들을 정적으로 돌려 이후 유배와 복위를 반복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2]

관직활동

해남 윤씨는 호남에서 몇 안되는 동인(東人) 가문이었는데 당시 정개청(鄭介淸) 옥사로 인해 그의 조부인 윤의중(尹毅中)이 휘말리게 되었고 이후 동인이 남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게 되었다.[3] 1658년 윤선도는 국시소를 올려 정개청(鄭介淸)의 신원을 청하였고 이 일로 남구만이 윤선도에게 탄핵을 건의했으며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의 노론과 대립하게 되었다.

  • 예송논쟁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이듬해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로 남인의 삼년설과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고산은 남인으로서 삼년설을 주장하는 장문의 소를 올려 기년설을 주장한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한다. 이 때 박세채 가 「복제사의」를 지어 윤선도와 윤후 등의 3년복설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 논쟁에서 패한 그는 함경도 삼수(三水)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광양(光陽)으로 이배되는 등 약 8년간의 유배 생활을 겪는다[4]

저술 활동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이 때 지어진 대표적인 작품이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이다. 「어부사시사」는 40수의 단가로, 작자와 창작연대를 알수 없는 고려후기 「어부가」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문집으로는 『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가 있다. 이 책은 서유린 정조의 명을 받고 간행한 것으로, 한시문이 실려 있고, 별집에는 한시문과 시조(35편), 「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 윤선도는 강호문학의 대가로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5]

해남에서의 은거생활

윤선도는 호란이 발발한 후 가솔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올라가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주도로 배를 돌린다. 이 떄 제주도로 향하던 도중 잠시 들렸던 보길도에 매료되어 보길도로의 입향 및 은거를 결심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삶의 전환정이 되었다. [6] 1667년(현종8) 8월 해남으로 돌아온 윤선도는 해남으로 내려오면서 수원의 집 일부를 뜯어 옮겨왔다. 이 집은 효종이 즉위 후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지어준 집으로 현재 녹우당 사랑채이다. 지금은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이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그 사랑채 이름이 녹우당이었다. 녹우당 근처에는 낙서재를 지어 그곳에 머물며 창작 활동에 전념하였다. [7] 인근의 진도 굴포당에는 윤선도가 직접 심은 소나무가 현재까지 보관되어 있다.

지식 관계망

  • 해남 윤씨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고산유고 윤선도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윤선도 윤인미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윤인미 배지 윤인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윤선도 송시열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윤선도 예송논쟁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송시열 예송논쟁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남구만 윤선도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박세채 윤선도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강호문학 윤선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강호무학 이현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낙서재 윤선도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A ekc:founder B
해남윤씨 녹우당 윤선도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A ekc:founder B
낙서재 해남윤씨 녹우당 A는 B와 인접해 있다 A ekc:isNear  B
윤선도 윤두서 A는 B의 선조이다 A ekc:hasDescendant B
윤선도 표준영정 윤선도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진도 굴포당 윤선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 내용
1616년 병진소를 지어 이이첨을 탄핵하였다
1628년 봉림대군,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1638년 보길도로의 입향을 결심하였다.
1649년 논원두표소를 지어 원두표를 탄핵하였다
1659년 예송논쟁으로 송시열과 대립하였다
1667년 관직에서 물러나 해남으로 돌아왔다
1671년 85세로 별세하였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가상 현실 - 전체 화면 보기

갤러리

영상

  • newsjc, "'선비의 발자취를 따라' - 고산 윤선도", YOUTUBE, 작성일:2013년 03월 30일

주석

  1. 전상욱"윤선도",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3.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4.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5. 전상욱"윤선도",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박종우, 『고산유고(孤山遺稿)』, "헤제", 『한국문집총간』online, 한국고전번역원.
  7. "해남 윤씨 윤선도 묘와 고택 녹우당",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고미숙, 「미리 보는 <한겨레 고전 인물 평전 100> : 윤선도 평전; 고산 윤선도_정치와 미학은 어떻게 조우하는가?」, 『연보와 평전』 vol.2, 부산대학교 점필자연구소, 2009
    • 문영오, 「고산 윤선도의 한시 연구」, 『한국문학연구』vol.5,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1982
  • 단행본
    • 고미숙, 』윤선도 평전 : 정쟁의 격랑 속에서 강호미학을 꽃피운 조선의 풍류객』, 한겨례, 2013
    • 정명래, 『어부사시사 : 낚시꾼이 풀어쓴 孤山 尹善道』, 샘물,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