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십이곡"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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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이황|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지은 12수의 연작시조로 본문은 [[이황]]의 친필을 새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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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퇴계 이황]]이 지은 12수의 연작시조이다.
  
 
=='''내용'''==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이황|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지은 12수의 연작시조로 본문은 [[이황]]의 친필을 새긴 것이다. [[이황]]은 앞의 여섯 수를 전육곡(前六曲), 뒤의 여섯 수를 후육곡(後六曲)으로 나누고 전육곡은 본심을 말한다는 뜻의 '[[언지|언지(言志)]]', 후육곡은 학문을 말한다는 뜻의 '[[언학|언학(言學)]]'이라 이름 붙였다. [[언지]]에서는 자연을 마치 병을 앓는 것처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읊었고, [[언학]]에서는 학문과 수양을 통해 마음이 순수하고 올바르게 됨을 읊었다. [[도산십이곡발문|발문(跋文)]]에 우리말로 노래 부르고 춤추어 감동 받다 정화되는 것이 [[도학|도학(道學)]]의 길이라고 말해 우리말로 시를 짓고 노래 부르는 행위의 의의를 밝혔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40쪽. 해설문 속의 각종 링크 정보는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에서 추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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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이황]]의 친필을 새긴 것이다. [[이황|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앞의 여섯 수를 전육곡(前六曲), 뒤의 여섯 수를 후육곡(後六曲)으로 나누고 전육곡은 본심을 말한다는 뜻의 '[[언지|언지(言志)]]', 후육곡은 학문을 말한다는 뜻의 '[[언학|언학(言學)]]'이라 이름 붙였다. [[언지]]에서는 마치 병을 앓는 것처럼 자연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읊었고, [[언학]]에서는 학문과 수양을 통해 마음이 순수하고 올바르게 됨을 읊었다. [[도산십이곡발문|발문(跋文)]]에 우리말로 노래 부르고 춤추어 감동 받으며 정화되는 것이 [[도학|도학(道學)]]의 길이라고 말해 우리말로 시를 짓고 노래 부르는 행위의 의의를 밝혔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24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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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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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구곡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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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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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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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십이곡과 무이구곡도가===
[[이황|이황(李滉)]]이 도산십이곡을 창작한 배경에는, [[주희|주희(朱熹)]]가 쓴 [[무이구곡도가|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차용하였다는 설이 보편적으로 자리하고 있다.<ref>손오규, 「'武夷櫂歌'와 '陶山十二曲'의 비교연구」, 『한국문학논총』제38집, 한국문학회, 2004.</ref> [[주희]]는 중국 복건성에 자리한 무이산 계곡의 아홉 굽이 경치를 스스로의 도학적 태도와 연계하여 [[무이구곡도가]]를 남겼는데, 이와 유사하게도 이황 또한 [[도산|도산(陶山)]]에 은거하며 도산십이곡을 창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평소 [[도학]]의 주창자로서 [[주희]]를 흠모하였던 이황의 시각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도산십이곡에는 이황이 직접 쓴 [[도산십이곡발문|도산십이곡발문(陶山十二曲跋文)]]이 실려 있다. 이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황]]은 관능적이고 향락적인 [[한림별곡|한림별곡(翰林別曲)]]과 같은 국문시가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세상을 버리고 은거하고자 하는 지향이 가득한 [[이별(李鼈)]]의 [[장육당육가(臟六堂六歌)]]의 한계 또한 극복할 것을 강조한다. 기존 국문시가의 한계를 떨치고 자연을 노래하면서 올바른 성정을 길러갈 것을 역설한 작품이 곧 도산십이곡인 것이다. [[도산십이곡발문]] 끝에는 글을 쓴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도산십이곡이 창작된 해가 1565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도산십이곡 목판본이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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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이황(李滉)]]이 「[[도산십이곡|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창작한 배경으로는, [[주희|주희(朱熹)]]가 쓴 [[무이구곡도가|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를 차용하였다는 설이 보편적이다.<ref>손오규, 「'武夷櫂歌'와 '陶山十二曲'의 비교연구」, 『한국문학논총』제38집, 한국문학회, 2004.</ref> [[주희]]는 중국 복건성에 자리한 무이산 계곡의 아홉 굽이 경치를 스스로의 도학적 태도와 연계하여 [[무이구곡도가]]를 남겼는데, 이와 유사하게도 이황 또한 [[도산|도산(陶山)]]에 은거하며 도산십이곡을 창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평소 [[도학]]의 주창자로서 [[주희]]를 흠모하였던 이황의 시각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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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십이곡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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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십이곡에는 이황이 직접 쓴 [[도산십이곡발문|도산십이곡발문(陶山十二曲跋文)]]이 실려 있다. 이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황]]은 관능적이고 향락적인 [[한림별곡|한림별곡(翰林別曲)]]과 같은 국문시가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세상을 버리고 은거하고자 하는 지향이 가득한 [[이별|이별(李鼈)]]의 [[장육당육가|장육당육가(臟六堂六歌)]]의 한계 또한 극복할 것을 강조한다. 기존 국문시가의 한계를 떨치고 자연을 노래하면서 올바른 성정을 길러갈 것을 역설한 작품이 곧 「[[도산십이곡]]」인 것이다. [[도산십이곡발문]] 끝에는 글을 쓴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도산십이곡]]」이 창작된 해가 1565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도산십이곡 목판본이 [[안동 도산서원|도산서원(陶山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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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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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단행본
 
*# 고려대학교대학국어편찬실, 『언어와 사상』, 고려대학교출판부, 1995.
 
*# 고려대학교대학국어편찬실, 『언어와 사상』, 고려대학교출판부, 1995.
*# 한형조 외,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2, 휴머니스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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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형조 외,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 휴머니스트, 2006.
 
*# 홍승표, 『동양사상과 탈현대의 여가』,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 홍승표, 『동양사상과 탈현대의 여가』,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논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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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문 속의 각종 링크 정보는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에서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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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6626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지은 12수의 연작시조로 본문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6626 이황]의 친필을 새긴 것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6626 이황]은 앞의 여섯 수를 전육곡(前六曲), 뒤의 여섯 수를 후육곡(後六曲)으로 나누고 전육곡은 본심을 말한다는 뜻의 '언지(言志)', 후육곡은 학문을 말한다는 뜻의 '언학(言學)'이라 이름 붙였다. 언지에서는 자연을 마치 병을 앓는 것처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읊었고, 언학에서는 학문과 수양을 통해 마음이 순수하고 올바르게 됨을 읊었다. 발문에 우리말로 노래 부르고 춤추어 감동 받다 정화되는 것이 도학(道學)의 길이라고 말해 우리말로 시를 짓고 노래 부르는 행위의 의의를 밝혔다.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 부기==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 부기==

2017년 12월 12일 (화) 23:41 기준 최신판

도산십이곡
한글팀 도산십이곡 02 도산십이곡 어부사 전육곡(1).jpg
한자명칭 陶山十二曲
영문명칭 Twelve poems of Dosan composed by Yi Hwang
작자 이황
간행시기 조선후기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청구기호 D6B-46
크기(세로×가로) 31.5×24.3㎝
판본 목판본
수량 1冊
표기문자 한글, 한자


정의

퇴계 이황이 지은 12수의 연작시조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본문은 이황의 친필을 새긴 것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앞의 여섯 수를 전육곡(前六曲), 뒤의 여섯 수를 후육곡(後六曲)으로 나누고 전육곡은 본심을 말한다는 뜻의 '언지(言志)', 후육곡은 학문을 말한다는 뜻의 '언학(言學)'이라 이름 붙였다. 언지에서는 마치 병을 앓는 것처럼 자연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읊었고, 언학에서는 학문과 수양을 통해 마음이 순수하고 올바르게 됨을 읊었다. 발문(跋文)에 우리말로 노래 부르고 춤추어 감동 받으며 정화되는 것이 도학(道學)의 길이라고 말해 우리말로 시를 짓고 노래 부르는 행위의 의의를 밝혔다.[1]

부연항목

  • 무이구곡도가
  • 도산
  • 도산서원
  • 도산십이곡발문
    • 도산십이곡 창작 연도
    • 장육당육가
    • 한림별곡
    • 이별

도산십이곡과 무이구곡도가

이황(李滉)이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창작한 배경으로는, 주희(朱熹)가 쓴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를 차용하였다는 설이 보편적이다.[2] 주희는 중국 복건성에 자리한 무이산 계곡의 아홉 굽이 경치를 스스로의 도학적 태도와 연계하여 무이구곡도가를 남겼는데, 이와 유사하게도 이황 또한 도산(陶山)에 은거하며 도산십이곡을 창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평소 도학의 주창자로서 주희를 흠모하였던 이황의 시각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도산십이곡 발문

도산십이곡에는 이황이 직접 쓴 도산십이곡발문(陶山十二曲跋文)이 실려 있다. 이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황은 관능적이고 향락적인 한림별곡(翰林別曲)과 같은 국문시가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세상을 버리고 은거하고자 하는 지향이 가득한 이별(李鼈)장육당육가(臟六堂六歌)의 한계 또한 극복할 것을 강조한다. 기존 국문시가의 한계를 떨치고 자연을 노래하면서 올바른 성정을 길러갈 것을 역설한 작품이 곧 「도산십이곡」인 것이다. 도산십이곡발문 끝에는 글을 쓴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도산십이곡」이 창작된 해가 1565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도산십이곡 목판본이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연계 자원 보러 가기
도산십이곡 발문
언지
언학


지식관계망

  • 구곡가계로 보는 이황과 이이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도산십이곡 무이구곡도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도산십이곡 도산 A는 B에서 이름을 땄다 A ekc:isNamesakeOf B
도산십이곡 목판본 도산서원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언지 도산십이곡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언학 도산십이곡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도학 도산십이곡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도산십이곡 도산십이곡발문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도산십이곡 이황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도산십이곡 조선중기의 대표적 문인들과 한글 시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도산십이곡 장육당육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도산십이곡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한림별곡 도산십이곡발문 A는 B에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이별 도산십이곡발문 A는 B에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장육당육가 이별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565년 이황도산십이곡을 저술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39197 127.054387 도산십이곡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36.72756 128.843271 도산십이곡 목판본이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240쪽.
  2. 손오규, 「'武夷櫂歌'와 '陶山十二曲'의 비교연구」, 『한국문학논총』제38집, 한국문학회, 2004.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1. 고려대학교대학국어편찬실, 『언어와 사상』, 고려대학교출판부, 1995.
    2. 한형조 외,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 휴머니스트, 2006.
    3. 홍승표, 『동양사상과 탈현대의 여가』,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 논문
    1. 고정희, 「〈도산십이곡〉과 〈고산구곡가〉의 언어적 차이와 시가사적 의의」, 『국어국문학』제141호, 국어국문학회, 2005.
    2. 류해춘, 「〈도산십이곡〉과 〈어부사시사〉, 그 표현의도와 수사학」, 『한국시가문화연구』제27집, 한국시가문화학회, 2011.
    3. 서명희, 「교육을 위한 노래, 〈도산십이곡〉 '언지(言志)'의 뜻」, 『고전문학과 교육』제32집, 한국고전문학교육학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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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손오규, 「〈武夷櫂歌〉와 〈陶山十二曲〉의 비교연구」, 『한국문학논총』제38집, 한국문학회, 2004.
    6. 정상균, 「이황의 〈도산십이곡〉 연구」, 『한국시가문화연구』제14집, 한국시가문화학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