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여주 신륵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사용자 5명의 중간 판 62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승탑비문 Top icon}}
 
 
{{사찰사지정보
 
{{사찰사지정보
|사진=  
+
|사진= BHST Silleuksa Pagoda Gangwolheon.jpg
 
|대표명칭=여주 신륵사
 
|대표명칭=여주 신륵사
|영문= Ssanggyesa Temple, Hadong
+
|영문=  
 
|한자=驪州 神勒寺
 
|한자=驪州 神勒寺
 
|이칭=
 
|이칭=
21번째 줄: 20번째 줄:
  
 
=='''정의'''==
 
=='''정의'''==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화성 용주사|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887 신륵사]", 김위석,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10월 1일</ref>
+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에 있는 사찰.
  
  
=='''개요'''==
+
=='''내용'''==
  
 
===역사===
 
===역사===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전해져내려오는 창건 설화가 있다.  
+
신륵사(神勒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원효(元曉, 617-686)]]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전해져내려오는 창건 설화가 있다. 어느날 [[원효]]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24440 가람]",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이 설 곳이라고 일러주고 사라졌다. 그 말을 듣고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는 7일간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ref>"[http://www.silleuksa.org 신륵사]", 신륵사의 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천년고찰 신륵사』<sup>online</sup></online></html>.</ref>
{{blockquote|어느날 원효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주고 사라졌다. 그 말을 듣고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는 7일간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출처=[http://www.silleuksa.org 신륵사의 역사, 신륵사 홈페이지]}}
 
 
   
 
   
신륵사는 1376년(고려 우왕 2) [[나옹]]이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400&cid=42840&categoryId=42842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14일.</ref> [[나옹]]머무르던 당시 200여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전해진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49689 여주 신륵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4월 14일</ref>
+
신륵사는 1376년([[고려 우왕|우왕]] 2) 나옹선사 [[혜근|혜근(惠勤)]]이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201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400&cid=42840&categoryId=42842 신륵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기남부와 남한강,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이 당시 신륵사는 200여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전해진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49689 신륵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이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신륵사는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세종]]의 능인 [[여주 영릉|영릉(英陵)]]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으며 전각과 당우들을 새롭게 꾸몄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887 신륵사]", 김위석,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수정일: 2013년 10월 1일</ref>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신륵사는 500여 승군을 조직해 싸웠고, 이때 극락전을 비롯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다. 이후 현종 12년(1671) 무렵부터 다시 일으켜오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배게, 201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400&cid=42840&categoryId=42842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14일.</ref>
 
 
 
  
 +
이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신륵사는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조선 세종]]의 능인 [[여주 영릉|영릉(英陵)]]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조선 예종|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조선 성종|성종]] 3)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으며 전각과 당우들을 새롭게 꾸몄다. <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887 신륵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3년 10월 1일.</ref>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신륵사는 500여 승군을 조직해 싸웠고, 이때 극락전을 비롯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다. 이후 1671년([[조선 현종|현종]] 12)년 무렵부터 다시 일으켜오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201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400&cid=42840&categoryId=42842 신륵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기남부와 남한강,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쌍계사는 722년(성덕왕 21) [[의상]]의 제자 [[삼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의 정상(頂相)을 모셔 삼신산(三神山, 금강산·한라산·지리산을 일컬음) 눈 쌓인 계곡 위 꽃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귀국하여 현재 쌍계사 자리에 이르러 혜능의 머리를 묻고 절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이후 840년(문성왕 2) [[혜소]]가 건물을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887년 정강왕 때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크게 소실되었으며, 1632년(인조 10) [[벽암]]에 의해 중건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765&cid=42840&categoryId=42851 쌍계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10일.</ref>
+
===사찰 명칭의 유래===
 +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岩)이라는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미'''륵'''([[혜근]])이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의 '''신()'''과 제압의 뜻인 '''륵()'''을 합쳐 신륵사(神勒寺)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
<ref>"[http://www.silleuksa.org 신륵사]", 신륵사의 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천년고찰 신륵사』<sup>online</sup></online></html>.</ref>
  
 
===지리===
 
===지리===
화개에서 쌍계사로 가는 약 5km의 도로변에는 벚꽃나무들이 늘어서 벚꽃터널을 이룬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화개 면장을 지낸 김진호 씨가 쌍계사 가는 소롯길을 넓히면서 벚꽃 묘목을 일본에서 구입해다가 심은 데서부터 비롯됐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765&cid=42840&categoryId=42851 쌍계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10일.</ref> 화개라는 지명도 원래는 쌍계사로 오르는 길목에 벚꽃이 만발하여 붙여졌다고 한다.<ref>황원갑,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149쪽</ref>  지금은 이 벚꽃길이 쌍계사와 더불어 화개를 대표하는 명소가 되었다.  
+
신륵사와 관련한 설화에는 용이 많이 등장한다.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그러한 설화들은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신륵사는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것도 추론해볼 수 있다. 조선 초의 승려 [[신미|신미(信眉)]]의 제자였던 [[김수온|김수온(金守溫)]]"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하여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樂土)<ref>늘 즐겁게 살 수 있는 곳</ref>라 불리었는데 신륵사가 형승의 복판에 있다."고 칭송하였다. 이렇듯 풍광이 뛰어난 곳에 위치한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의 물이 감싸안은 나지막한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깊숙한 산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 반해 신륵사는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모랫벌, 그리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ref>"[http://www.silleuksa.org 신륵사]", 신륵사의 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천년고찰 신륵사』<sup>online</sup></online></html>.</ref>
쌍계사 매표소 바로 앞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절의 좌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두 갈래의 물이 만나 합쳐진 것이다. 절이름을 두 물이 만난다는 뜻인 '쌍계(雙溪)'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6 - 지리산 자락』, 돌배게, 2009.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765&cid=42840&categoryId=42851 쌍계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10일.</ref>
 
  
===특징===
+
===나옹 혜근과 신륵사===
쌍계싸는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쌍계사 입구 차시배지에는 '차시배지 기념비'가 있다. 차는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서 처음 들여왔는데 828년(흥덕왕 3)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줄기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김대렴이 차를 심은 후 혜소가 쌍계사와 화개 부근에 차밭을 조성, 보급하였다고 한다. 쌍계사는 [[도의]]와 동시대에 활약한 [[혜소]]가 육조혜능선사의 [[남종]] 돈오선을 신라에 최초로 전법한 도량이자 차의 발상지이며 해동[[범패]]에 연원이다. 그러므로 쌍계사는 선(禪), 다(茶), 음(音)의 성지로 일컬어진다.
+
[[양주 회암사|양주 회암사(楊州 檜巖寺)]]에 머물던 [[혜근|혜근(惠勤)]]이 왕명을 받고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곳은 [[밀양 영원사|밀양 영원사(密陽 靈源寺)]]였는데 이에 얽힌 사연이 기이하다. [[혜근]]이 [[양주 회암사|회암사]]를 중수하고 낙성회를 여는데 비단과 곡식을 가져다 공양하는 여인네들이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몰려들어 생업을 포기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어 산문을 닫아도 막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고, 급기야 [[혜근]]에게 밀양땅 [[밀양 영원사|영원사]]로 한시 바삐 떠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혜근]]은 이미 병이 깊었는데 왕명이 떨어졌으니 길을 달려 이곳까지 왔다. 하지만 [[혜근]]은 더 이상은 못 가겠다며 신륵사로 들어갈 것을 재촉하였고, 이곳은 선사의 열반지가 되었다. 그때 하늘에선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용이 호상하는 등 신이한 일이 벌어지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고 전한다. 스러져가던 신륵사를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201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400&cid=42840&categoryId=42842 신륵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기남부와 남한강,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ref>"[http://www.ssanggyesa.net 쌍계사 소개]", 쌍계사 홈페이지</ref>
 
  
 +
===관련문화유산===
 +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
*[[여주 신륵사 조사당]]
 +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범종]]
 +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
 +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 석조승탑]]
 +
*[[여주 신륵사 원구형 석조승탑]]
 +
*[[여주 신륵사 적묵당]]
 +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아미타삼존상]]
 +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아미타후불탱화]]
 +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삼장보살도]]
 +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신중도]]
 +
*[[여주 신륵사 극락보전 감로왕도]]
 +
*[[여주 신륵사 명부전 지장보살삼존상]]
 +
*[[여주 신륵사 명부전 지장보살도]]
 +
*[[여주 신륵사 명부전 시왕상]]
 +
*[[여주 신륵사 명부전 명부사자도]]
 +
*[[여주 신륵사 조사당 삼조사도]]
 +
*[[여주 신륵사 칠성각 칠성도]]
 +
*[[여주 신륵사 김병기송덕비]]
 +
*[[여주 신륵사 동대탑중수비]]
 +
*[[여주 신륵사 법당중수비]]
 +
*[[여주 신륵사 동대 각자]]
  
=='''동영상'''==
+
=='''지식 관계망'''==
 +
*'''여주 신륵사 지식관계망'''
 +
<html>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
<iframe width="100%" height="740px" src="http://dh.aks.ac.kr/Encyves/Graph/D005/temple_silleuksa.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html>
 +
*[http://dh.aks.ac.kr/Encyves/Graph/D005/stele_hyeguen_silleuksa-hoeamsaji.htm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와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지식관계망]
  
 
+
===관계정보===
=='''갤러리'''==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시간정보'''==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background:white; width:100%;"  
 
!style="width:20%"|시간정보!!style="width:80%"|내용
 
 
|-
 
|-
|1367년 || [[나옹]]이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
|840년 || [[혜소]]가 쌍계사(옥천사)의 건물을 중창하였다.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
|887년 || 쌍계사의 명칭이 옥천사에서 쌍계사로 바뀌었다.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
|임진왜란기 || 쌍계사 건물이 크게 소실되었다.
+
| [[여주 신륵사 조사당]]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
|1632년 || 쌍계사가 벽암에 의해 중건되었다.
+
|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관련항목'''==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text-align: center; width:100%;"
 
!style="width:30%"|항목A!!style="width:30%"|항목B!!style="width:25%"|관계!!style="width:15%"|비고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하동 쌍계사 || A는 B에 있다 ||
+
|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
|[[하동 쌍계사 승탑]] || 하동 쌍계사 || A는 B에 있다 ||
+
|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
|[[하동 쌍계사 동종]] || 하동 쌍계사 || A는 B에 있다 ||
+
|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
|[[하동 쌍계사 괘불도]] || 하동 쌍계사 || A는 B에 있다 ||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혜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A ekc:isSteleOf B
 
|-
 
|-
|[[하동 쌍계사 감로왕도]] || 하동 쌍계사 || A는 B에 있다 ||
+
| [[원효]] || [[여주 신륵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혜소]]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 [[조선 세종]] || [[여주 신륵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
|[[혜소]] || 하동 쌍계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
 +
 
 +
===시간정보===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background:white; width:100%;"
 +
!style="width:20%"|시간정보!!style="width:80%"|내용
 
|-
 
|-
|[[삼법]] || 하동 쌍계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1367년 || [[혜근]]이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
 
|-
|[[벽암]] || 하동 쌍계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1469년 || 왕실에서 [[여주 신륵사]]를 여주 영릉의 원찰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다
|-
 
|[[의상]] || [[삼법]] || A는 B의 스승이다 ||
 
|-
 
|[[남종]] || 하동 쌍계사 || A는 B와 관련있다 ||
 
|-
 
|[[범패]] || 하동 쌍계사 || A는 B와 관련있다 ||
 
 
|-
 
|-
 +
|1474년 || [[여주 신륵사]]가 보은사(報恩寺)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
 
|}
  
=='''참고문헌'''==
+
=='''시각자료'''==
황원갑,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
===가상현실===
 +
<html>
 +
<iframe width="100%" height="600" src="http://dh.aks.ac.kr/Encyves/Pavilions/D005/sillueksa.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html><br/>
 +
{{clickable button|[http://dh.aks.ac.kr/encyves/Pavilions/D000/S005/sillueksa.htm 가상 현실 - 전체 화면 보기]}}
 +
 
 +
===갤러리===
 +
<gallery mode=packed heights=250px>
 +
파일:BHST_Silleuksa_Bell.jpg|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동종(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7호)
 +
파일:BHST_Silleuksa_Beomjonggak.jpg|여주 신륵사 범종각
 +
파일:BHST_Silleuksa_board.jpg|신륵사 현판
 +
파일:BHST_Silleuksa_Bongsonggak.jpg|여주 신륵사 봉송각
 +
파일:BHST_Silleuksa_Brick Pagoda.jpg|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
파일:BHST_Silleuksa_Daejanggak_stele.jpg|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
파일:BHST_Silleuksa_Gangwolheon.jpg|여주 신륵사 강월헌
 +
파일:BHST_Silleuksa_Geungnakbojeon.jpg|여주 신륵사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
파일:BHST_Silleuksa_Geungnakbojeon_Buddha.jpg|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 제1791호)
 +
파일:BHST_Silleuksa_Guryongnu_board.jpg|여주 신륵사 구룡루 현판
 +
파일:BHST_Silleuksa_Guryongnu_board-1.jpg|여주 신륵사 구룡루 내 현판
 +
파일:BHST_Silleuksa_Guryongnu_board-2.jpg|여주 신륵사 구룡루 내 현판
 +
파일:BHST_Silleuksa_Guryongnu_board-3.jpg|여주 신륵사 구룡루 내 현판
 +
파일:BHST_Silleuksa_Guryongnu_board-4.jpg|여주 신륵사 구룡루 내 현판
 +
파일:BHST_Silleuksa_Guryongnu_board-5.jpg|여주 신륵사 구룡루 내 현판
 +
파일:BHST_Silleuksa_Gwaneumjeon.jpg|여주 신륵사 관음전
 +
파일:BHST_Silleuksa_Josadang.jpg|여주 신륵사 조사당
 +
파일:BHST_Silleuksa_KimByeonggi_stele.jpg|여주 신륵사 김병기 송덕비
 +
파일:BHST_Silleuksa_Multi Pagoda.jpg|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
파일:BHST_Silleuksa_Naong_stele.jpg|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
파일:BHST_Silleuksa_Naong_stele_stupa_lantern.jpg|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
파일:BHST_Silleuksa_Naong_stupa.jpg|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
 +
파일:BHST_Silleuksa_Naong_stupa_lantern.jpg|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
파일:BHST_Silleuksa_Bell_stupa.jpg|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
파일:BHST_Silleuksa_Octagonal_stupa.jpg|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
파일:BHST_Silleuksa_pagoda.jpg|여주 신륵사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
파일:BHST_Silleuksa_Pagoda_Gangwolheon.jpg|여주 신륵사 삼층석탑과 강월헌 - 나옹의 다비 장소
 +
파일:BHST_Silleuksa_Simgeomdang.jpg|여주 신륵사 심검당
 +
</gallery>
  
 +
===영상===
 +
* TAEMIX STUDIO, "[https://www.youtube.com/watch?v=rmY3oLhbV6c 가람으로 떠나는 보물기행, 신륵사-태믹스의 역사지식문화 콘텐츠]", YouTube, 게시일: 2015년 6월 17일.
 +
<html>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rmY3oLhbV6c"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html>
 +
* PJH Films from KOREA, "[https://www.youtube.com/watch?v=uyRHO7WJ8GI Behoder DS1+GH4 경기 여주 신륵사 Silleuksa Temple, YEOJU, KOREA 2016]", YouTube, 게시일: 2016년 6월 20일.
 +
<html>
 +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uyRHO7WJ8GI"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html>
  
 
=='''주석'''==
 
=='''주석'''==
 
<references/>
 
<references/>
  
[[분류:불교 사찰의 승탑비문]] [[분류:사찰]]
+
=='''참고문헌'''==
 +
* 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887 신륵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3년 10월 1일.
 +
* 최완수, 『명찰 순례』, 대원사, 1994.
 +
* "[http://www.silleuksa.org 신륵사]", 신륵사의 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천년고찰 신륵사』<sup>online</sup></online></html>.
 +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201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400&cid=42840&categoryId=42842 신륵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기남부와 남한강,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
 
 +
{{승탑비문 Top icon}}
 +
[[분류:불교 사찰의 승탑비문]] [[분류:사찰]] [[분류:승탑/교열완료]]

2017년 11월 27일 (월) 02:35 기준 최신판

여주 신륵사
(驪州 神勒寺)
BHST Silleuksa Pagoda Gangwolheon.jpg
대표명칭 여주 신륵사
한자 驪州 神勒寺
주소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문화재 지정일 1974년 12월 28일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경내문화재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여주 신륵사 조사당,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정의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에 있는 사찰.


내용

역사

신륵사(神勒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 617-686)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전해져내려오는 창건 설화가 있다. 어느날 원효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1] 이 설 곳이라고 일러주고 사라졌다. 그 말을 듣고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는 7일간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2]

신륵사는 1376년(우왕 2) 나옹선사 혜근(惠勤)이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3] 이 당시 신륵사는 200여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전해진다.[4]

이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신륵사는 위축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조선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이 여주로 이장된 1469년(예종 1)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에 대규모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으며 전각과 당우들을 새롭게 꾸몄다. [5]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신륵사는 500여 승군을 조직해 싸웠고, 이때 극락전을 비롯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다. 이후 1671년(현종 12)년 무렵부터 다시 일으켜오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6]

사찰 명칭의 유래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岩)이라는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미(혜근)이 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의 신(神)과 제압의 뜻인 륵(勒)을 합쳐 신륵사(神勒寺)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7]

지리

신륵사와 관련한 설화에는 용이 많이 등장한다.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따라서 그러한 설화들은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신륵사는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것도 추론해볼 수 있다. 조선 초의 승려 신미(信眉)의 제자였던 김수온(金守溫)은 "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하여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樂土)[8]라 불리었는데 신륵사가 형승의 복판에 있다."고 칭송하였다. 이렇듯 풍광이 뛰어난 곳에 위치한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의 물이 감싸안은 나지막한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깊숙한 산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 반해 신륵사는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모랫벌, 그리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9]

나옹 혜근과 신륵사

양주 회암사(楊州 檜巖寺)에 머물던 혜근(惠勤)이 왕명을 받고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곳은 밀양 영원사(密陽 靈源寺)였는데 이에 얽힌 사연이 기이하다. 혜근회암사를 중수하고 낙성회를 여는데 비단과 곡식을 가져다 공양하는 여인네들이 귀천을 따질 것 없이 몰려들어 생업을 포기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어 산문을 닫아도 막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고, 급기야 혜근에게 밀양땅 영원사로 한시 바삐 떠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혜근은 이미 병이 깊었는데 왕명이 떨어졌으니 길을 달려 이곳까지 왔다. 하지만 혜근은 더 이상은 못 가겠다며 신륵사로 들어갈 것을 재촉하였고, 이곳은 선사의 열반지가 되었다. 그때 하늘에선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용이 호상하는 등 신이한 일이 벌어지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고 전한다. 스러져가던 신륵사를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10]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 여주 신륵사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여주 신륵사 조사당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여주 신륵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혜근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원효 여주 신륵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세종 여주 신륵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367년 혜근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1469년 왕실에서 여주 신륵사를 여주 영릉의 원찰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다
1474년 여주 신륵사가 보은사(報恩寺)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가상 현실 - 전체 화면 보기

갤러리

영상

주석

  1. "가람", 『두산백과』online.
  2. "신륵사", 신륵사의 역사, 『천년고찰 신륵사』online.
  3.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2012. 온라인 참조: "신륵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기남부와 남한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신륵사", 『두산백과』online.
  5. 김위석, "신륵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3년 10월 1일.
  6.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2012. 온라인 참조: "신륵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기남부와 남한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7. "신륵사", 신륵사의 역사, 『천년고찰 신륵사』online.
  8. 늘 즐겁게 살 수 있는 곳
  9. "신륵사", 신륵사의 역사, 『천년고찰 신륵사』online.
  10.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2012. 온라인 참조: "신륵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기남부와 남한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 김위석, "신륵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3년 10월 1일.
  • 최완수, 『명찰 순례』, 대원사, 1994.
  • "신륵사", 신륵사의 역사, 『천년고찰 신륵사』online.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2012. 온라인 참조: "신륵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기남부와 남한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