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원씨(元氏),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거룡(巨龍). 길(吉)의 손자로, 휴(休)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1]
스님의 휘는 해린(海麟), 자는 거룡(巨龍), 속성은 원씨(元氏), 어릴 때의 이름은 수몽(水夢)이었으며 원주(原州)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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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휘는 휴(休)이니 관직은 아관(衙官)에 이르렀는데, 모든 사람들이 선연(先掾)들보다 뛰어난 관리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일찍부터 훌륭한 상황(床喤)의 아들 낳기를 염원하여 항상 초연(椒衍)의 시(詩) 듣기를 원하였다. 어머니는 이씨(李氏)니 영리함은 제호(提壺)에 계합하고 공손함은 거안(擧案)보다 더 얌전하였다. 끝없는 원력(願力)은 광목부인(光目婦人)과 같고 용모의 아름다움은 묘안(妙顔)임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성선(聖善)의 태몽에 하해(河海)의 물이 맑게 범렴(泛瀲)하고 정천(井泉)에서는 물이 솟아 올랐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고는 일과로 탄기(呑氣)를 행하여 태아를 교육하였다. 이에 미루어 보면 어찌 발자취를 밟고 잉태하여 태어난 강원(姜嫄)을 부러워하겠는가? 탁태(託胎)할 때에는 그윽히 왕소(王邵)의 경우와 같았다. 이미 만삭이 되어서는 드디어 그 상서(祥瑞)를 발(發)하였다. 옹희(雍熙) 원년(元年) 세재(歲在) 알봉군탄년(閼逢涒灘年) 도월(涂月) 그믐날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어릴 때의 이름은 수몽(水夢)이었다.
초년(齠年)의 나이에 이르러 이미 학문에 뜻을 두어 이수겸(李守謙)을 찾아가서 학업을 청하였다. 수겸(守謙)이 스님을 보고 특이한 그릇인줄 알고 말하기를, “나는 석학(碩學)이 될 기량(器量)을 지도할 능력이 없으니 너는 마땅히 밝은 스승을 찾도록 노력하라.” 하였다. 어느 날 관상을 잘 보는 한 노인이 있어 스님의 손금을 보고 국사에게 이르기를, “네가 만약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면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앞으로 통인달사(通人達士)가 되리라는 말을 듣고 다만 도주(道籌)에 종사할 생각에만 골똘히 잠기고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노장(老莊)의 개설(槪說)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따라서 사대부들의 헌면(軒冕)을 치수(錙銖)처럼 보고 고량진미(膏粱珍味)를 마치 강비(糠秕)와 같이 여겼다.
급히 서둘러 법고사(法皐寺)의 관웅대사(寬雄大師)의 처소로 가서 수학하던 중 관웅(寬雄)스님이 경화(京華)인 개성으로 떠났으므로 국사도 그 산중(山中)을 하직하고 떠나게 되었다. 관웅대사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오운산(五雲山)을 벗어나자마자 스님은 곧 걸망을 짊어지고 따라갔다.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함께 연하(輦下)로 돌아갔다. 이어 곧 산의 서쪽을 점지(占地)하였는데 해안사(海安寺)와 선접(旋接)한 곳이었다. 준광방장(俊光方丈)에게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수도(修道)하면서 함장(函杖)에게 욕의(縟儀)를 펴고 시봉하기를 희망하며 정성을 다하여 표질(縹帙)을 관화(貫花)에서 연마하였다.
이와 같이 영특함을 알게 된 웅공(雄公)은 기꺼워하면서 해린(海潾 : 潾은 麟의 오자)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통화(統和) 17년 수하(首夏)의 달에 용흥사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품수(稟受)하였다. 탐·진·치의 마음을 씻어 그 오염(汚染)을 여의었으니 마치 손으로 공중(空中)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 29살 때 숭교사(崇敎寺)를 창건할 때 감독을 맡았던 은공(恩功)으로 그 절의 초대(初代) 주지가 되었다.
나이 21세 때 왕륜사(王輪寺) 대선장(大選場)에 나아가서 담경(談經) 시험을 보았는데, 그의 말은 평범하나 그 뜻은 매우 심오하였다. 시험의 문제는 같았으나 국사의 답안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이하였다. 저들 자신의 답안이 틀려서 자신의 소망에 어긋난 자들은 마치 소경이 촛불을 잡은 것과 같았으며, 혹은 시기하여 머트럽게 다투던 자들은 마치 함장(銜杖)한 것과 같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마음에는 모든 반연을 쉬었으니 감히 파도가 물에 의지한 것을 탄식할 것이며, 진여법(眞如法)은 모든 움직임을 여의었으니 마땅히 탁약(槖籥)의 가풍(假風)을 비웃을 수 있겠는가. 토의하는 광장(廣場)에서는 주위로부터 집중적인 공세를 받았으나 마치 교범파제(憍梵婆提 : gavāṃpati) 등의 호부장자(豪富長者)들로 구성된 그룹의 첩벽(疊壁)이 무너지고 모두 논리에 강복(降伏)하고 부처님께로 귀화한 것과 같았으며 견고한 인욕의 갑옷이여! 니건자(尼乾子)를 비롯한 외도(外道) 육사(六師)들의 일(一)·이(異)·유(有)·무(無) 등의 교란적인 주장이 부처님 사자후(獅子吼)의 일성으로 말미암아 모두 사라진 것과 같았다.
국사께서 법상(法床)에 앉아 불자(拂子)를 잡고 좌우로 한번 휘두르니 가히 청중들이 많이 모여 앉은 걸상이 부러진 것과 같았다. 임금이 국사의 도덕을 찬양하고 대덕(大德)의 법계를 서증(署贈)하였다. 이 때 스님께서 이르기를, “내가 의룡(義龍)과 서성(瑞聖)인 후배에게는 부끄럽지만 인수(仁獸) 보다는 앞서기를 기대하므로 인자(麟字)를 인(鱗)으로 이름을 고치겠다.”고 하였다.
1011년(현종 2) 본사인 법천사로 돌아가던 중 진조(眞肇)를 만나 역산법(曆算法)을 배웠고, 그 해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1021년 평양 중흥사(重興寺)에서 중대사(重大師)가 된 뒤, 수다사(水多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1030년 다시 개경 해안사의 주지가 되었다.[5]
통화년중(統和年中)에 “강진홍도(講眞弘道)”란 법호를 받았으며, 28년에는 국사께서 법고사(法皐寺)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인 진조(眞肇) 스님을 만나 동행하다가 진조(眞肇) 스님이 역산(曆算)하는 법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국사께서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는데, 누구나 이를 취하려 하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쉽고, 도모하여 옮기면 밝아서 소경이 눈을 뜬 것과 같이 여용(餘勇)을 보통 무리들에게나 끼쳐주며, 다능(多能)을 비루(鄙陋)한 것을 연구함과 같았다. 통목화(統木禾) 말년은 우리 성고(聖考) 현종(顯宗)께서 보위에 오르신지 5년째 되던 해이다. 특히 현종 임금으로부터 존장(尊獎)하는 은총을 입어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았다.
대중상부(大中祥符) 10년에는 ‘명료돈오(明了頓悟)’란 법호를 증사(贈賜)받았고, 천희(天禧) 5년 호경(鎬京) 중흥사(重興寺)에서 여름 결제(結制) 중에 강경법회가 있었는데, 국사께서 법을 설하시니, 그 법의 혜택이 화택 중생들에게 두루 미쳐 마치 새벽 기온처럼 청량(淸凉)하게 만들어 주었다. 자비의 등불을 혼구(昏衢)의 밤거리에 비추어 축건(竺乾)의 서래밀지(西來密旨)를 깨닫게 하였다. 국사가 매일 한 번씩 기자(箕子)의 고도(古都)를 일컬으면 대중은 세 번씩 창송하였다. 그 후 기숙(耆宿)인 선공(先公)의 사회사소(社會詞疏)가 문리(文理)가 맞지 아니함을 보고 고쳐 지어주면서 (결락) 도(道). 지만적(枝蔓的)인 부사(浮辭)는 잘라 버렸다. 스님은 아무렇게나 말을 하여도 곧 훌륭한 문장을 이루게 되었으니, 혜거(惠璩)의 문장력도 혼비백산하였고, 문장을 나누면 척척 음운에 부합하였으니 담빙(曇憑)의 음운학(音韻學)의 실력도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연(遒姸)하고 민첩함을 누가 능히 그를 적대(的對)할 수 있겠는가! 태평년중(太平年中)에 중대사(重大師)의 법계를 진정(進呈)하고 아울러 ‘계정고묘응각(戒正高妙應覺)’이란 법호를 올리고는 수다사(水多寺)를 맡도록 하였다. 태평(太平) 10년에 이르러 현종이 칙명으로 해안사(海安寺)로 이주하도록 앙청(仰請)하였다.
덕종 때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가 곧 수좌(首座)가 되었고, 1045년(정종 11) 승통(僧統)이 되었다. 1046년(문종 1) 궁중에 초청받아 유심묘의(唯心妙義)를 강의하고, 이듬해 이자연(李子淵)의 제5자 소현(韶顯)을 출가시켰다.[6]
덕종(悳宗)이 즉위하여서는 보다 더욱 존중히 모시는 한편 특별히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호를 수정(授呈)하고 아울러 마납(磨衲)으로 만든 법복 한 벌을 증사(贈賜)하였으며, ‘탐현도원(‘探玄道源)’이라는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않아 수좌(首座)의 법호를 올리고 겸하여 마납(磨衲) 복전의(福田衣) 한 상자를 하사하였다. (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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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宮中)의 구중(九重)에서부의(負扆)하고 있는 임금께서 친히 상보(象步)하는 용상대덕(龍象大德) 스님들을 영접한 백고좌(百高座)는 모두 용문(龍門)을 뛰어넘는 오도견성(悟道見性)한 도인들이었다. 담수(曇邃) 스님은 북좌(北座)에서 정통(精通)하였음을 부끄러워 했고, 승철대사(僧徹大師)는 편독(篇牘)과 시부(詩賦)에 뛰어나 낙필성장(落筆成章)하는 문호(文豪)이므로 많은 대덕(大德)들을 제치고 왕으로부터 총석(寵錫)받은 것을 사양할 정도였다. 그리고 중희년중(重熙年中)에 거듭 다시 ‘구행료성도수(具行了性導首)’라는 법호를 첨가(添加)받았다. 또 기원(祇園)의 적손(嫡孫)이니 이는 오직 불교가 중흥할 인유(因由)인 것이다. 척리(戚里)의 신동(神童)들이 예문(禮聞)을 거치지 아니하고 와서 수학하였다. 이로써 작고(作故)하신 수대사(守大師)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중서령(中書令)을 추증(追贈)받은 장사공(章私公) 이씨(李氏)의 휘는 자연(子淵)이니, 드디어 다섯째 아들을 허락하여 그로 하여금 락발(落)하고 정성을 다하여 국사에게 구의(摳衣)하고 신족(神足)이 되어 복근(服勤)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국사가 직접 찾아가서 친견하고 찬앙(讚仰)하였으니, 그 분이 누구인가? 지금의 금산사(金山寺) 주지로 있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인 소현(韶顯)이 바로 그 스님이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4일 대가(大駕)가 내제석원(內帝釋院)으로 행행(行幸)하여 예배(禮拜)를 갖추어 왕사(王師)로 추대하였다.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가(御駕)에 동재(同載)하고 다녔으니, 마치 강승회(康僧會) 스님이 오왕(吳王) 손권(孫權)의 어가(御駕)에 동승하고 다녔던 것은 모두 스님의 하풍(下風)에 있었기 때문이다. 청녕(淸寧) 3년에 이르러 ‘융소(融炤)’라는 법칭(法稱)을 진정(進呈)하였다. 4년 5월 초하루에 임금께서 스님을 국사(國師)로 책봉코자 하여 친서를 보내 삼청(三請)하였다. 그리하여 그 달 19일 왕이 금가(金駕)를 준비해 봉은사(奉恩寺)로 행행(幸行)하여 우리 해린(海鱗) 스님을 국사로 봉하고, 영통사(靈通寺)의 주승(主僧)인 난원(爛圓) 스님을 왕사(王)로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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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옹(咸雍) 3년 2월 일에 국사께서 법천사(法泉寺)에 돌아가 안주(安住)코자 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모치(暮齒)의 탄식을 일으키며, 누차 임금께 사퇴(辭退)할 것을 고진(告陳)하여 세번이나 거듭 수두(需頭)의 주청(奏請)을 올려 간절한 사의(辭意)가 확고함을 알렸다. 문종은 하는 수없이 윤허(允許)하게 되었다.
1070년 10월에 법천사에서 입적하였다. 시호는 지광(智光), 탑호(塔號)는 현묘(玄妙)이다. [9]
10월 23일 편안히 우협(右脇)으로 누워 취침하였다. 이날 밤에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국사께서 잠을 깨어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앉아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결락) 바깥 날씨가 어떤가?”하니 대답하기를, “이슬비가 내리고 있읍니다.”라는 대답을 듣고서 곧 입적하였다. 옛적 추자(鶖子)가 입적(入寂)함에 당하여 무색계(無色界)의 제천(諸天)이 흘린 바 눈물이 마치 봄에 내리는 이슬비와 같았으니, 지금 국사께서 시화(示化)하던 오늘밤에 내린 비인들 어찌 제천(諸天)이 흘린 눈물이 아니겠는가. 오호 애재(哀哉)라! 세수는 87세요, 승랍은 7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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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음을 들은 문종(文宗)은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곧 좌가승록(左街僧錄)인 숭연(崇演)과 보장정(保章正)인 전삼린(全參藺) 등을 파견하여 장사(葬事)를 감호하도록 하였으며, 이어 전개(專介)인 특사를 보내서 빈당(殯堂)에 가서 조문토록 하되 정중한 탁제(卓祭)를 치르도록 하는 한편, ‘지광(智光)’이라는 시호를 증정(贈呈)하고 아울러 다향(茶香)과 유촉(油燭)을 하사하였으며, 또 원주(原州) 창고에 있는 양곡으로써 발천위락(拔薦爲樂)의 법요식(法要式)에 필요한 경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1월 9일 법천사(法泉寺)의 명봉산(鳴鳳山) 동쪽 승지(勝地)를 선택하여 다비(茶毗)의 예를 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