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준경
척준경(拓俊京) | |
대표명칭 | 척준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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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拓俊京 |
생몰년 | ?-1144년(인종 22) |
본관 | 곡산(谷山) |
시대 | 고려 |
부 | 척위공(拓謂恭) |
정의
고려 중기의 무신이다.
내용
생애
곡산척씨(谷山拓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아버지는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척위공(拓謂恭)이다.[1]
집이 가난하여 학문을 닦지 못하고 무뢰배들과 교유하였다. 뒤에 계림공(雞林公, 후에 고려 숙종)의 종자(從者)로 있다가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가 되었다.[2]
1104년(고려 숙종 9) 평장사(平章事) 임간(林幹)을 따라 동여진(東女眞) 정벌에 공을 세워 천우위녹사 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에 제수되었다. 1107년(예종 2) 중군병마녹사(中軍兵馬錄事)로 윤관(尹瓘)을 따라 동여진 정벌에 종군해 석성(石城)·영주(英州)·길주(吉州) 전투에서 공을 세워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이 되었다.[3]
1126년(고려 인종 4) 이자겸(李資謙)과 함께 인종을 폐위하고자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침입했다가 왕의 권유로 뜻을 바꾸어, 이자겸을 잡아 귀양보내고 그 공으로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이 되었다. 이후 권세를 마구 휘두르다가 1127년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을 받고 암타도(巖墮島)에 유배되었으며, 이듬해에 곡주(谷州:지금의 황해북도 곡산)로 이배되었다. 1130년 죄는 있지만 공도 적지 않다 하여 처자(妻子)에게 직전(職田)을 돌려주었고, 1144년(인종 22) 복권되어 조봉대부검교호부상서(朝奉大夫檢校戶部尙書)에 기용되었으나 곧 죽었다.[4]
인종이 꾼 꿈 해몽
이자겸이 제거된 후 그의 두 딸도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나서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이 무렵 인종은 깨 다섯 되와 황규(黃葵) 서 되를 얻는 꿈을 꾸었다. 척준경은 이 꿈이 아들 다섯을 얻고 그 중 세 명이 왕위에 오르게 될 꿈이라고 풀이하였다. 그의 말대로 새 왕비가 된 공예태후(恭睿太后) 임(任)씨의 자식들 중 셋이 의종(毅宗), 명종(明宗), 신종(神宗)이 되었다.[5]
지식관계망
- 윤관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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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위공 | 척준경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척준경 | 여진정벌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척준경 | 이자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척준경 | 고려 인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박성봉, "척준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척준경",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박성봉, "척준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척준경",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척준경",
『위키백과』online , 작성일: 2017년 10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