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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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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어진
"조선태조어진",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한자명칭 朝鮮 太祖 御眞
작가 조중묵, 박기준, 백은배 등 8인
제작시기 1872년
소장처 어진박물관
문화재지정사항 국보 제317호
유형 어진
크기(세로×가로) 220.0×151.0㎝


정의

조선시대 임금인 태조(재위 1392~ 1398)의 51세 때 모습을 그린 어진.

내용

어진의 제작 및 보관

1872년 영희전에 봉안되어 있던 낡은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제작한 어진이다.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이모본이다. 조중묵, 박기준, 백은배 등 8인의 화사가 동원되었고 이 당시 어진모사 과정은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摹都監儀軌)』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영희전 제1실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어진이 심하게 퇴색퇴자 이를 새로 이모하기로 했고, 원래는 경기전태조 어진을 본으로 삼고자 했는데 이 또한 상태가 좋지 않아 새로이 이모하였다고한다.[1]
화면 우측 상단에 “태조대왕어용(太祖大王御容) 소자사복지구년임신(小子嗣服之九年壬申) 이모(移摹)”. “태조고황제어진(太祖高皇帝御眞)”이라는 표재가 적힌 비단 천이 각각 붙어 있다. 앞 쪽의 표제는 1872년 제작 당시에 붙인 것이고, 뒤 쪽의 붉은 비단에 적힌 표제는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 태조를 황제로 추존한 뒤 1900년에 새로 써서 붙인 것이다.[2]
태조 어진은 엄청난 수가 제작되었는데 1548년의 기록에 당시 창덕궁 선원전에 모셔진 태조 어진만 무려 26축 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원본은 전하는 것이 없고 이모본만 두 점이 남아있는데 온전하게 전하는 것은 이 경기전 소장의 <조선 태조 어진>뿐이다. 1900년에 조중묵, 채용신 등이 이모한 붉은 색 곤룡포를 입은 태조 어진이 남아있으나 얼굴을 포함 절반 이상이 소실된 상태다.
경기전소장의 <조선 태조 어진>은 온전하게 남은 유일한 태조 어진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가지며 이모본이지만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여 조선 초 어진과 초상화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문헌에 기록된 모습

태조의 외모에 관해서는 몇 가지 기록이 전한다. 먼저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 태조가 높은 코에 용의 얼굴(隆準龍顔)[3]이었는데, 태종의 용모가 이를 닮았다. ”[4]고 기록되어있고 선조이정형이 찬술한 『동각잡기(東閣雜記)』 에도 같은 기록이 전한다.[5]
이긍익이 편찬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보면 『용비어천가』의 기록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명의 사신이 본 태조의 외모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Quote-left.png

키는 커서 우뚝하게 곧으며, 귀가 큰 것이 뛰어나게 달랐다. 명 나라 사신 왕태(汪泰) 등이 그의 신채에 탄복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기이하다 귀여, 고금에 보지 못하였도다.” 하였다.
身長而竦直。耳大絶異。天史汪泰等服。其神彩而相語曰奇哉耳也今古未聞。

Quote-right.png
출처: 「太祖朝故事本末」, 『東燃藜室記述』 1권.[6]


어진에 묘사된 모습

<조선 태조 어진>은 익선관에 청색 곤룡포를 입고 화려한 용상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정면관이며 소매 안에서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슴과 어깨에는 용문양의 보(補)가 보이는데 오조룡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다. 배채를 사용하여 색을 표현하였고 얼굴의 표현은 주로 선묘를 사용하였다. 를 그린 부분은 금박과 니금기법을 사용했다. 전체적으로 선묘를 위주로 표현했던 조선 초기의 원본을 충실히 따르고 있고 약간의 음영법이나 선염을 써서 시대색을 가미하였다.[7]
태조의 얼굴은 노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용상에 앉아 있지만 키가 상당히 커 보이며 눈, 코, 입은 아담하게 그려졌지만 꽤 위엄있는 얼굴모습이다. 귀는 크고 두툼한 모습으로 기록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모습이나 코는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1913년에 촬영된 유리원판 사진으로 태조의 젊은 시절 얼굴이 전해오는데 얼굴의 윤곽이 각지고 날이 선 모습이다. 이에 반해 <조선 태조 어진>에 그려진 노년의 태조는 훨씬 부드러워진 인상을 보인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조선 태조 어진 어진 A는 B에 해당한다 A dcterms:type B
조선 태조 어진 조선 태조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조선 태조 어진 조중묵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조선 태조 어진 박기준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조선 태조 어진 백은배 A는 B가 그렸다 A dcterms:creator B
조선 태조 어진 어진박물관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어진이모도감의궤 조선 태조 어진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정면관 조선 태조 어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익선관 조선 태조 어진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곤룡포 조선 태조 어진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보(왕실남성) 조선 태조 어진 A는 B에 나타난다 A ekc:isShownOn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72년 조선 태조 어진이 제작되었다.
1987년 12월 26일 조선 태조 어진이 국보 제317호로 지정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765660 126.9748840 조선 태조 어진어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66쪽.
  2.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왕실의 어진과 진전』, 국립고궁박물관, 2015, 48쪽.
  3. 융준용안은 원래 한고조 유방의 얼굴상을 표현한 것으로 실제 생김새 뿐 아니라 임금의 얼굴임을 나타낸다.
  4. 『태종실록』 1권, 총서. 온라인 참조: '總序',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東閣雜記 上", 동각잡기,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6. 「太祖朝故事本末」, 『東燃藜室記述』 1권.
  7.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67~74쪽.
  8. "조선태조어진", 문화재검색, 『문화재청』online.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

  1. 조선미, "영조어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더 읽을거리

  1. 전시도록
    •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2011.
  2. 단행본
    • 문화재청, 『한국의 초상화 : 역사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눌와, 2007.
    • 조선미, 『왕의 얼굴』, 사회평론, 2012
  3. 논문
    • 이수미, 「경기전 태조 어진(御眞)의 조형적 특징과 봉안의 의미」, 『미술사학』 제26호, 한국미술사학연구회, 2006, 5-32쪽.
    • 조인수, 「전통과 권위의 표상 : 고종대의 태조 어진과 진전」, 『미술사연구』 통권 제20호, 미술사연구회, 2006, 29-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