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내장터 만세운동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 |
대표명칭 |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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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독립운동 |
시대 | 근대 |
날짜 | 1919년 4월 1일 |
관련인물 | 유관순 |
관련유물유적 |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 독립 기념관 |
목차
정의
일제 강점기인 1919년 4월 1일에 충청남도 천안군의 아우내 장터에서 발생한 만세 시위운동이다.[1]
내용
만세 운동 준비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과 평양 등 전국 여섯 개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성에서 3.1운동을 목격한 천안 출신의 유관순(柳寬順)은 3.1운동 직후 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3월 13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유관순은 아버지인 유중권(柳重權), 숙부인 유중무(柳重武) 등에게 경성의 상황을 전하고 4월 1일 아우내장의 장날에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2]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이백하(李伯夏)·김상철(金相喆) 등 20대 청년들을 비롯하여 조인원(趙仁元)·조병호(趙炳鎬)·유관순·유중권·유중무·조만형(趙萬衡)·김상훈(金相訓)·김용이(金用伊)·박제석(朴濟奭)·박봉래(朴鳳來) 등 다양한 마을에서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운동을 준비하였다.[3]
3단계 작전
1919년 4월 1일, 갈전면(지금의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는 약 3,000여 명의 장꾼들이 모여 3단계로 만세 운동을 진행하였다. 1단계는 4월 1일 오후 1시 무렵 시작되었다. 약 3,000여 명의 군중이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에 태극기를 달고 이를 앞장세워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누비는 큰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 헌병들은 주재소를 향하여 오는 군중을 향하여 총을 쏘아 많은 사상자를 냈다. 또한 헌병과 수비대가 급히 출동하여 총을 쏘고 총검으로 마구 찌르는 만행을 저질러 수십 명의 사상자가 생겨났다. 두 번째 단계는 오후 4시 경에 일어났다. 사망자의 시체를 주재소로 옮기면서 항의하는 군중을 향하여 일본 헌병은 총격으로 응대하였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군중이 부근의 산과 시장에 모였다가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시위를 벌였다.[4]
만세운동의 댓가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은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이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가 부상이나 투옥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 날 체포된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도 법정 투쟁을 벌이며 재판 결과에 항고하였다. 그리고 조인원(趙仁元)·유관순·유중무 각 3년 형, 김용이·조병호 각 2년 6개월 형, 김상훈·백정운(白正云) 각 1년 6개월 형, 조만형·박제석 각 8개월 형, 박봉래 기각, 신씨(申氏) 무죄, 김교선·한동규·이백하·이순구 각 2년 형, 김상철 6개월 형 등의 판결을 언도받았다. 유관순은 부당한 재판 결과를 거부하면서 저항함으로써 법정 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 형을 선고받았다.[5]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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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장터 만세운동 | 3.1운동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dcterms:isPartOf B |
유관순 |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 A는 B를 주도하였다 | A ekc:performed B |
공간정보
- 3.1운동유적지 전자지도
시각자료
주석
- ↑ 정을경,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을경,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을경,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을경,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을경,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정을경,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