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징비록(新懲毖錄)71, 제2차 진주성 전투 직전의 상황.. 진주성에 드리운 전운(戰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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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징비록(新懲毖錄)71, 제2차 진주성 전투 직전의 상황.. 진주성에 드리운 전운(戰雲)

아들아, 전편에서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그 전투를 수행해야 할 주요 인사의 변동과

그중에서도 논란의 중심에 있는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정사(正史)로서 권위가 있는 실록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기엔 어려우나, 그럼에도 다른 사서와 충돌하거나 보충하는 내용에서 발견되는 의문점이 있어 실체와 다를 가능성을 제기하며 첫 운을 띄운 것이라 보면 된다.

일본은 본토에서 태합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무려 5번이나 명령서를 보내 진주성에 대한 보복전을 독촉했고, 일본군 장수들은 그 명령에 따라 진주성 공략을 준비했지.

물론..명과의 강화협상에서 진주성 공격을 멈추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성을 비우기만 하라, 곧 되돌려 나올 것이란 말을 흘린 것은, 그 말이 당연히 조선에도 흘러 들어갈 것이고.. 일본군도 그것을 이미 계산하고 깔아놓은 다목적 포석이라 보면 된다.

​일본군이 진주성 공격을 위해 준비한 병력은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12만 중 9만 3천 정도.

그리고 별도로 수군 병력이 가덕도를 오가며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견제한 것을 감안하면..

진주성 하나를 공략하기 위해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실로 엄청나지..단일 전투에 이 정도 병력을 투입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기도 하고.

단순히 공격군의 수만 증강했느냐 하면..아니다.

진주성 공략에 나선 일본군 장수의 면면이..예사일이 아니다.

시마즈 요시히로,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구로다 나가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카토 기요마사,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히데모토, 고바야카와 타카카게,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다테 마사무네, 시마즈 요시히로, 호소카와 타다오키,다치바나 무네시게, 이시다 미쓰나리..

일본군 내에서도 가장 경험많고, 이름 있는 장수들이 여기 다 모였다.

​양측 지휘부 장수들의 면면을 비교해보자면..

객관적으로 봐서 우리 군의 지휘부가 비중으로 보나, 역량으로 보나..현격히 뒤진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그랬을거야.

적의 진주성 침공 소식에 의령에 모여 대책을 숙의하러 모인 조선군 지휘관들, 의병장 들도 한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태에 직면해서 당혹스러웠을 그 마음, 안봐도 충분히 이해해.

앞에서도 말하지 않았더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정상의 범주에서 생각할 사람이 아니라고.

정상적인 사람이 일반 상식적인 면에서 생각하면 절대 그를 예측할 수 없다.

이게 바로..전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장 무서운 점이지.


진주성 수성론의 선봉에는 호남의병장, 창의사 건재 김천일 장군이 있다.

김천일 장군이 진주성 올 때 그랬다고 하더구나.

"이제야 죽을 자리를 얻었구나."

"호남의 우리나라의 근본이요, 진주는 호남을 지키는 병풍이요, 울타리다."

​의령에 모인 조선군 지휘부 회의..그 날의 모습이 난중잡록에 전하고 있다.

순변사 이빈 장군이

“흉적의 계획이 반드시 진주를 함락시키고 말 것이니, 먼저 들어간 군사로서는 
지키기 어렵다. 의병을 더 보내면 기세를 더할 수 있으리라.”

경상우도와 전라도 의병의 참전, 진주성 입성을 요청하고 있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나서 거부한다.

“오직 임기응변하는 자만이 군사를 부릴 수 있고,

지혜로운 자만이 적을 헤아릴 수 있소.

지금 적병의 세력을 당해낼 수가 없는데, 3리 되는 외로운 성이 어찌 능히

지켜낸단 말이오.

하물며 모든 군사가 다 성중으로 들어가 버리면 또 안팎에 응원하는 세력이 없어지니,

나는 마땅히 밖에 있어 응원이 되고 성에는 들어가지 않겠소.”

그는 철저하게 병법의 이치에 따라, 명분이 아니라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움직인다.

이런 점에선 진주대첩 때의 사례도 보지만..상당히 냉정한 분이야.


경상우도 관찰사 김륵 선생이 노해서 곽재우 장군에게 재차 압박하는데..

“장군이 대장의 영을 따르지 아니하니 군율은 어찌하겠소”

​그런데..경상우도 관찰사 김륵 선생이 곽재우 장군을 잘 몰랐던 모양이지.

전임자 김수나 학봉 김성일 선생에게 이야기를 안들었 봤는가봐..

이런 압박은 그분에게 안통하는데..역시나.

​“이 한 몸이 죽고 사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100번 싸운 군사를 어찌 승산 없는 싸움에 몰아 넣는단 말이오.

나는 차라리 여기서 자결을 할지언정 성에는 들어가지 않겠소.”

​곽재우 장군이 이렇게 딱 잘라서 강하게 거부하는데..그 누가 뭐라할 수 있을까.

죽었으면 죽었지..애써 키워놓은 그의 휘하에 있는 경험많은 의병들 생목숨을

개죽음 당할 곳으로 몰아넣지 못하겠다 하는데.

자신들도 두려워서 진주성 입성을 못하고 있는 상황에 의병 너희들은 입성해라..

그 말이 과연 먹히기나 할까?

충익공 곽재우 장군, 무민공 황진 장군

곽재우 장군은 여기에 더해서 충청도 병마사 황진 장군을 보고서는 진주성 입성을 말렸다.

"장군은 충청도 병마사요. 그런 대임을 맡은 사람이 어찌 조정의 특별한 명도 없이

뻔히 죽을 곳으로 간단 말이요? 나와 함께 밖에서 싸웁시다."

​그런데 이번엔 역시 황진 장군도 강경해, 물러서지 않았지.

"이미 김천일 등과 약조했소. 어찌 외로운 처지에 이르러 그들을 외면하겠소이까.

죽더라도 신의를 저버리지 못하겠소."

​그렇게 마지막 술 한 잔 기울인 후..곽재우 장군은 진주성으로 가는 황진 장군을 지켜봤단다.

곽재우 장군의 현실도, 황진 장군의 명분도 두분 모두 다같이 훌륭한 분인건 맞는데..

갈라선 이들의 입장이 왜 이렇게 씁쓸할까?

​그렇게..의령에서의 그 모임은 결론없이 끝났지.

진주는 그야말로..일본의 10만 대군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 상황이 된 것이고.

복수의병장 고종후, 일휴당 최경회, 형제의병장 강희보, 강희열 진주성의 위기 상황에..최초로 진주성에 입성한 이는 호남 의병장 창의사 김천일 장군이야.

그 뒤로..속속 복수의병장 고종후, 양산숙, 형제의병장 강희보와 강희열, 이잠, 민여운 등이 입성했고, 증 형조판서 김준민 장군 신도비, 김해부사 이종인의 최후 설명 장면

이 외에도 진주성에는 관군 장수로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김해부사 이종인,거제현령 김준민, 사천현감 장윤 등이 입성했다.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조선군 규모는 대체로 6~7천 정도로 파악된 바, 진주성 본주군이 3천 이상이라면, 타 지역에서 지원온 병력은 최대 4천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리고..일본군이 진주를 향해 물밀듯이 몰려오는데, 진주성 내외 아니..경상우도 여러 고을 백성들도 진주성 내로 들어와. 피신하러 온거지.

임진년에도 진주성에서 싸워 일본군을 물리쳤으니 이번에도 이길 거라고,

살려면 진주성으로 가야한다고 여겼던 것이겠지.

이분들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았더라면, 진주성으로 그래도 들어오려 했을까 모르겠지만.

그래서 진주성 내 민,관,군 6~7만이 된거지.

​누군가는 그때 진주성의 규모를 봤을 때 현실적으로 어떻게 7만이나 있을 수 있나..

그정도는 아닐 것이라 의문을 제기 하는데, 평시라면 그 말이 맞겠지.

하지만, 최대 7만을 말하는 그 수치는 진주성을 지키러 모인 병력과 진주성 내 주민..

진주 외곽과 경상우도 여러 고을에서 피신온 백성들의 수를 본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진주목사 서예원, 진주판관 성수경 장군 (MBC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그런데..이때에 진주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 장군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진주성 문제를 가지고 의령에 모임을 가지는 자리에서도.

어떻게 된 일인가? 지금 이분들이 진주에서 4백리나 떨어진 상주 함창에 가 있었거든.

지대차사원(支待差使員)의 임무를 받고.

이게 뭐냐면..명 사신의 음식과 기타 여러 편의를 제공하고 접대하는 것.

상주 함창에는 명의 유격장 왕필적이 있었다.

​아들아, 진주성이 위기상황인데..목사와 판관이 자기 임지를 내버려 두고 이게 무슨 어이없는 짓인가? 하고 많은 분들이 그렇게 여길 것이다.

맞다. 어이없지.

​그런데 이분들이 그냥 갔겠니? 나라에서 그렇게 하라고 해서 간 거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전라좌수사로 경상도 수역에 출전할 때도 조정에 장계를 띄워

허가를 받고서야 출전할 수 있었는데..이분들이 조정의 명이 없이 그럴 수 있었겠니?

아니다. 이분들을 그런데 차출한 조정이 문제인 것이지.

​도체찰사 류성룡 선생이 진주가 위급하다고 급보를 띄워 속히 진주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 장군에게 상주를 떠나 진주로 복귀하라고 명했는데..

이들은 명을 받고 잠시 더 지체했다가 진주성에 복귀하니..제2차 진주성 전투 개전

겨우 이틀 전 일이었어.

​진주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 장군이 지체한 이유는 명의 유격 왕필적에게 진주성 구원을 요청하고 함께 데려가려 했던 것이다.

진주성에 명군이 입성하면..일본군이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리란 발상.

충분히 설득력있지만..문제는 명의 왕필적이 그렇게 따르지 않는다는 거야.

명은 이미 싸우지 않기로 결정했으니까.

결국 더 기다릴 수 없어 포기하고 복귀하였지만..역시 때는 너무 늦었던 거지.

​전쟁 준비 시간은 이미 늦어서 준비를 갖출 시간도 촉박했고..

진주성 내에는 갑작스럽게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입성해서 이들을 먹이고, 또 수용하고..

보호할 대책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또 진주성의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객인 타지의 군사들이 속속 입성해서 자리잡아

버렸다. 그 속에는 특히나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과 상극으로 사사건건 부딪히며, 지휘권

혼란 상태를 초래하게 만든 창의사 김천일 장군도 있다.

진주대첩 때는 이미 전쟁준비가 완벽에 가까웠고, 성 내의 지휘권 혼란을 막고자 타지의

지원군의 입성을 막고 밖에서 응원하도록만 했는데..

그때와는 전혀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거야.


아들아, 전투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진주성 내의 군량 사정과 원활한 전투 수행을 위해서..

또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전투와 무관한 백성들 만이라도 미리 다른 곳으로 피신 시켰더라면 성이 함락되더라도

엄청난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때 진주성 내에는 그것을 판단하고, 냉정하게 결단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 수많은 장령(將領) 중에서 그 누구 한사람도 그러지 못했다.

아들아,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서기도 전에..이미 진주성에는 암운(暗雲)이 드리우고

있었다.

결론을 다 알고서 하는 말이라 그럴지 몰라도..제2차 진주성 전투 전야를 이 말 말고,

딱히 표현할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구나.


서예원(徐禮元 진주목사.장군.공신. 선무원종공신 1등. 병조참의 추증)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했으며, 1585년 선조 18년 회령의 보을하진첨절제사(甫乙下鎭僉節制使)로 정탐의 임무를 띠고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 땅에 깊이 들어갔으나, 80여명의 부하를 모두 잃고 패주한 죄로 종성(鐘城)에 수감되었다.

80명의 부하를 잃고 혼자서 살아오자 조헌은 서예원이 장수의 첩을 간음하여 무인들로부터 개돼지 취급을 받았고, 이로 인해 여러 해 동안 과거 응시를 정지당하여 그의 형 서인원이 수습하여 합의한 경력을 들어 심하게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 뒤 석방되어 김해부사로 있을 때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성을 수비하던 중 적이 보리를 베어다가 성의 높이와 같게 쌓고 쳐들어오자 패주하였다.

그 뒤 의병장 김면(金沔)과 협력하여 지례의 왜적을 격퇴하고,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목사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왜적과 항전하여 큰 공을 세운다.

서예원(徐禮元)의 수급은 일본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는데, 그는 서예원(徐禮元)의 수급을 김시민의 수급으로 오인했다고 한다.

선무원종1등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고종 때 진주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이천서씨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의 16세손

1세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掌冶署令).정 3품.장관)

5세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6세 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

7세 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8세 서인(徐諲 교수(敎授).도승지(都承旨).정 3품.장관.대학자)

9세 서욱((徐勖 도승지(都承旨).정 3품. 장관)

10세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判司宰事).종 2품.부총리)

11세 서진(徐晋 사재감정.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정 3품. 장관).교리공파(校理公派)

12세 서운(徐運 동복현감(同福縣監). 군수)

13세 서항(徐恒 하동현감(河東縣監).증 통예원 우통예(通禮院 右通禮). 군수)

14세 서관(徐瓘 북부주부(北部主簿). 증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국장)

15세 서형(徐詗 종사랑(從仕郞).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차관)

16세 서선원(徐善元)

서인원(徐仁元 호조참의(戶曹參議).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정2품.장관).명암공파(鳴巖公派))

서예원(徐禮元 진주목사.장군.공신. 선무원종공신 1등. 병조참의 추증)

17세 서계성(徐繼聖)효자성균생원(孝子成均生員)

서계철(徐繼哲)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그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청주 한씨(淸州韓氏)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면(徐冕 정4품 주부)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찬(徐瓚 (정4품 장령)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인(徐諲 교수(학자)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욱(徐勖 정3품 승지)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효손(徐孝孫 종2품 판사재사)
                    • 큰고고조할아버지: 서유(徐愈 정2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양경공파(良敬公派)
                    • 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晋 정3품 사재감정 교리공파(校理公派))
                      • 고조할아버지: 서운(徐運 동복현감(同福縣監). 군수)
                        • 증조할아버지: 서항(徐恒 하동현감(河東縣監).증 통예원 우통예(通禮院 右通禮). 군수)
                          • 할아버지: 서관(徐瓘 북부주부(北部主簿). 증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국장)
                            • 아버지: 서형(徐詗 종사랑(從仕郞).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차관)
                              • 형: 서선원(徐善元)
                              • 형: 서인원(徐仁元 호조참의(戶曹參議).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정2품.장관).명암공파(鳴巖公派))
                              • 본인: 서예원(徐禮元 진주목사.장군.공신. 선무원종공신 1등. 병조참의 추증)
                                • 아들: 서계성(徐繼聖)효자성균생원(孝子成均生員)
                                • 아들: 서계철(徐繼哲)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김해성전투(金海城戰鬪)

임진왜란 때인 1592년 4월에 서예원(徐禮元) 등이 김해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

2차 진주전투

임진왜란 중인 1593년(조선 선조 26) 6월 22일부터 27일까지 경상우도 진주성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번째 전투이다.

진주 창렬사(晋州 彰烈祠)

진주 창렬사(晋州 彰烈祠)는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순국 선인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여 1607년(선조 40년) 사액을 받은 곳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호 창열사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창열사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을 기리기 위해 진주성 내에 건립되어 있다. 제2차 전투에서 많은 진주 성민이 순국한 후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였고, 선조 40년에 사액을 받았다. 후에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철폐되자, 이곳에 모시게 된다.

창열사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셔두었고, 진주목사 서예원, 창의사 김천일과 충청도 병마사 황진, 경상우도 병마사 최경회 등의 임진왜란 순국 선열 39인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육절려(六節閭)

강원 횡성군 공근면 매곡리 산11에 있는 정려각.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5호. 1817년(순조 17),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전사한 서예원(徐禮元)과 그의 처, 아들, 며느리, 사위, 딸의 충효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진주성 비가- 조열태저자

1951년 가을, 밀양성 축조 공사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진주성 2차전 성주 서예원(46세)과 밀양 평촌 마을의 최억술(41세)이다. 전반부 축성과 개전전야를 통해 그 당시 민초들이 전쟁준비로 해서 겪었던 고통이 그려진다. 1952년(임진년)에 전쟁이 터지는 것은 밀양 장날 최억술이 봉화 신호를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최억술이 장에 갔다가 봉화를 본 직후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피난 준비를 하게 되고, 이때 김해성에 있던 서예원 역시 봉화를 보고서는 즉각 교전태세에 들어가는데

신징비록(新懲毖錄)71, 제2차 진주성 전투 직전의 상황.. 진주성에 드리운 전운(戰雲)

아들아, 전편에서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그 전투를 수행해야 할 주요 인사의 변동과

그중에서도 논란의 중심에 있는 진주목사 서예원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정사(正史)로서 권위가 있는 실록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기엔 어려우나, 그럼에도 다른 사서와 충돌하거나 보충하는 내용에서 발견되는 의문점이 있어 실체와 다를 가능성을 제기하며 첫 운을 띄운 것이라 보면 된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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