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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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익(동일방직 창업자)

정헌 서정익

1910년 4월 22일 경기도 인천시 청학동에서 태어남

1927년 배재고보 졸업

1932년 일본 나고야고등공업학교 방직학과 졸업

1933년 동양방적 입사

1955년 동일방직 창업, 대표이사 사장

1962년 대한방직협회이사장

1968년 대한화섬 회장

1973년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별세

정헌(靜軒) 서정익(徐廷翼)은 DI동일그룹 창업주로 한국 최초의 ‘섬유 전문 엔지니어’로 평가받는다. 합섬기술을 개발 정착시킨 이른바 섬유입국(纖維立國)의 주역 중 한 명이다. 그의 아호는 그가 평소 인생의 스승으로 섬겨온 3·1독립운동의 민족지도자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올해로 창립 66년을 맞는 DI동일은 ‘100년 기업’을 지향하면서 사업 다각화를 이뤄나가고 있다. 면방 소재 산업의 수직 계열화를 이룩한 복합섬유업체에서 최근에는 전기차에 필수품인 2차전지 소재 알루미늄을 비롯하여 태양광 유리섬유, 환경 엔지니어링(반도체 배기가스) 등 첨단산업 분야에도 진출했다. 정헌 서정익은 1910년 4월 22일 경기도 인천시 청학동에서 부친 서병훈과 모친 초계 정씨 사이에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 서천보는 순조 때 선공감 감역을 지낸 인물. 인천시사에는 정헌을 포함해 조부 서상빈과 부친 서병훈 3대가 ‘인천을 빛낸 인물 100인’으로 실려 있다.

부친 뜻 어기고 나고야공대 입학

조부 서상빈은 1889년 개항 초기에 한국 최초의 상인단체이자 상공회의소 전신인 인천신상협회(仁川紳商協會)를 설립해 외국 상인들의 발호 속에서 민족상인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애국운동에 앞장섰다. 또 국민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신학문과 영어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해 제녕(濟寧)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육성에 전념하기도 했다.

정헌의 부친 서병훈은 동아일보 제2대 인천지국장을 지내면서 일본인 기업주들에게 착취당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언론을 통한 배일사상 고취에 힘썼다.

정헌은 1927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 어른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얼마 후 나고야고등공업학교(현 나고야공대)에 입학했음을 어른들에게 알렸다. 그의 부친은 투철한 배일사상 때문에 아들의 도일(渡日) 자체를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더욱이 법문학계도 아닌 이공계, 그것도 방직학과란 전공이 못마땅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귀국을 종용하다가 마침내 용인하게 되었는데, 부친이 누그러진 데는 배일운동 동지 곽상훈(건국 후 국회의장 역임)씨의 설득이 먹혔다고 한다. 곽씨는 자신도 경성고공(서울대 공대 전신)을 중퇴한 미완성 공학도로서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많은 과학도, 공학도, 산업인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정헌은 당시 집안 형편이 비교적 유복했으나 신문과 우유배달 등으로 일본에서 고학 생활을 했다.

미 군정이 발탁한 섬유 엔지니어

정헌은 1932년 나고야고공을 졸업하자 바로 귀향하여 이듬해 인천에 건설 중이던 도오요방적(동양방적) 창설사원으로 입사한다.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한 정규사원으로 생활은 안정되었으나 언제나 승진만은 일본인 사원과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당시의 인천공장장 하야가와는 정헌의 빼어난 자질과 성실성을 인정하면서도 공평한 승진 기회가 주어지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미안함을 피력해왔다.

정헌은 1940년 서울여상을 졸업한 이영숙(서울여상 총동창회장 역임)과 결혼했고 1942년 북지개발공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 회사는 중국 베이징에 본사를 두고 산서성 일대에 26개 경공업 공장을 운영하던 일본의 국책회사였다. 신혼 초기 부인과 첫돌 난 장녀를 안고 붕정만리 중국 대륙 오지까지 가기로 용단을 내린 것은 인천공장장을 사임하고 북지개발공사의 중역으로 부임해간 하야가와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였다. 북지개발공사에서는 산서성 태안에 있는 산서산업의 기사 겸 공작창 차장, 붕대공장 공장장 등을 역임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정헌이 수많은 귀환동포 속에 끼여 선편으로 인천에 온 것은 1946년 1월이었다. 방직기술인이 드문 때여서 미 군정 당국은 이미 도오요방적 사원명부에서 정헌의 신상을 파악하고 귀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곧바로 인천공장의 차장으로 복직, 그해 6월 공장장, 12월에 공장장 겸 이사로 승진하였다.

1947년 정헌은 서울대 공대 섬유공학과에서 방직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당시 방직학과 전임교수가 사임하여 정헌이 그 후임자로 초빙되었는데 열강으로 인기를 끌었다. 보통 1시간 강의를 위해 10시간의 공부를 할 정도였다. 그가 동양방적공사에 재직할 때였으니 진지한 학구적 면모를 보여준 셈이다. 정헌은 1949년 동양방적공사 이사장에 취임했는데 이즈음 그의 인간적인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공사 이사장 시절 비서가 어쩌다 점심값이나 사적 교제비를 회사 판공비에서 지출하면 벼락을 내렸다. 그의 집을 손질하려고 회사의 목공이나 미장공을 보내도 “공비로 채용한 종업원을 사용으로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야단을 치기 일쑤였다. 그 바람에 사장댁을 섣불리 손질해줄 수도 없었다.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공사를 깨끗이 구별하지 않고는 오히려 불쾌감을 갖는 성미였다.

공장장 시절 가족들과 함께 인천에 거주하면서 회사 승용차로 서울 본사에 왕래하곤 했는데, 간혹 서울 친가에 다니러 가는 부인이 편승을 원하면 “회사의 공용이지 가족이 타는 차가 아니다”라면서 굳이 부인을 기차로 가게 하였다.

임원·사원 무상으로 주식 나눠줘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침식을 잊고 몰두하는 것도 그의 타고난 성미였다. 북지개발공사 근무 시 붕대공장에서 붕대를 재단기 없이 일일이 가위로 자르는 비능률적인 작업을 보고 몇 달 동안 밤잠을 잊고 씨름하더니 붕대재단기를 고안해낸 것이 그가 일에 몰두하는 성미를 잘 보여준다. 이것으로 북지개발공사에서 큰 상을 타기도 하였다.

정헌은 기술인답게 기계를 몹시 좋아하여 해외출장 때도 가족들의 선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방직이나 가공기계를 구경하고 다니는 것이 큰 낙이었다. 그러다가 탐나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면서도 그가 물욕을 부리는 것은 평생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주변의 말이다. 많은 수입으로 호화롭게 살기보다 적은 수입으로 검소하게 살겠다는 것이 청년 시절부터 그의 생활신조였다. 그는 주식을 독점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고 여겼다. 대주주가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그의 경영관이었는데 실제 그렇게 실천했다.

그는 배재고보 때부터 어학공부를 즐겨 평생 새카맣게 때묻은 영어사전을 항상 옆에 두고 원서를 들여다보는 학구파 기업인이었다. “제가 대학 입시를 앞두고 섬유학과에 가겠다고 하면 선친께서 흡족해하시리라고 생각했으나 기왕이면 기계과가 어떻겠느냐고 하셔서 당황하기도 했지요. 그 때문에 음악을 좋아했던 동생이 대신 기계과에 가서 저는 지금도 동생에게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기계를 좋아하신 엔지니어였지요.”(장남 서민석 DI동일그룹 회장)

정헌은 1949년 상공부로부터 국유관리기업체인 동양방적공사 이사장으로 임명됐다. 이어 1955년 동일방직㈜을 설립, 사장으로 취임하고 동양방적공사를 불하받았다. 회사 설립 후인 1958년 불하자금 조달책으로 삼성물산을 주주로 영입하여(애초 삼성물산의 요구는 51% 지분이었으나, 38.75%와 임원 2명이 참여하는 선에서 결정) 자금을 조달하였으나 삼성물산은 결국 이듬해 철수한다.

이어 정헌은 동일방직 안양공장에 모든 정열을 쏟아붇는다. 인천공장은 일본의 적산을 불하받은 것이지만 안양공장은 정헌이 염원하고 구상하던 방적부터 가공사까지 일관생산을 완성한 필생의 작품이며 자부심이었기 때문이다.

회사 운영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직원들의 애사심으로 이를 돌파해나갔다. 1956년 동일방직 창립 이듬해 사원들은 자의로 월급 일부(임원 20%, 사원 6%) 사양운동을 1년간 벌이기도 했다. 당시 박봉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회사의 권유도 아니고 자의로 벌인 이 캠페인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종업원들이 사장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로 봐야 한다.

정헌은 사원들의 애사심에 적극 보답한다. 동일방직 설립 후 그가 보유한 주식이 92.3%였는데 임원진에 32.5%, 유공사원 34명에 9.85%를 무상으로 나눠주고 본인은 32.5%만 가졌다. 그는 “주식은 내 것이 아니라 그간 고락을 함께한 사람들의 몫”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정헌은 한국 섬유업계를 대표하는 엔지니어 출신답게 새 시대에 맞는 면방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솔선해서 직물 가공공장인 동인천공장을 설립했고, 가공사의 일관생산을 위하여 안양공장을 건설하였다.

나아가 현대 섬유의 대종을 담당할 대한화섬이란 화섬원료 메이커의 설립을 앞장서서 지휘하여 면방업계가 선의의 경쟁과 합작으로 같이 살아가는 표본을 제시하였다.

화섬시대 막을 연 선각자

그는 우리나라 화섬시대의 막을 연 선각자이기도 했다. 당시 새로 등장한 폴리에스테르는 강도, 내마모성, 탄력성, 열고정성, 촉감 등에서 다른 화학섬유보다 훨씬 뛰어날 뿐 아니라 수요 증가율도 비할 바가 아니어서 선진국에서는 이미 의류용은 물론 산업용으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급증하는 수요량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을 일찍부터 예견한 정헌은 화섬의 국내 생산, 개발에 전력했지만 동일방직 단독으로는 힘겨운 사업이라는 것을 항상 강조했다. 한국 섬유공업계의 공동과제라는 점을 업계에 일깨운 것이다.

이 무렵 대한방직협회 제9대 이사장으로 선임된 정헌은 동분서주한 끝에 대한화섬을 설립하여 초대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사이 중앙염색가공회사도 설립하여 의류 염색 분야에도 기술향상과 양산화를 꾀했다. 1969년에는 재봉사 가공공장을 건설한 후 가공시스템을 도입하여 재봉사 일관생산 체제를 갖추기도 했다. 이는 수출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당시 재봉사 양산 체제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후일 대우그룹의 의류제조 수출이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란 평가도 나오고 있다.

“재봉사의 국내 판매 전개와 더불어 1971년부터 업무를 개시한 홍콩사무소를 중심으로 재봉사 판매를 시작한 동일방직은 우리나라보다 앞선 홍콩 시장에 재봉사와 심지를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소량 주문으로 만족할 만한 실적이 없었던 동남아 시장도 1973년을 맞이하여 홍콩과 싱가포르 등지에서 면재봉사 중심의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1973년 48만7000달러, 1974년 110만달러, 1975년 105만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리게 되었으며, 동수출품의 매출이익률도 1973년의 경우 50% 이상을 나타내어 유망 수출품으로 등장하였다.”(‘동일방직사사’)

정헌은 과도한 업무 탓에 건강이 항상 위태로웠다. 1968년 고혈압으로 인한 일과성 뇌허혈성 뇌졸중을 일으켰으나 다행히 적기의 치료로 안정을 되찾기도 했다. 당시 발병도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1963년 설립한 대한화섬이 6년이라는 공장 건설 지연 사태를 빚었고, 품질 불량, 투자자의 기피로 인한 증자의 부진, 이에 따른 경영권의 이양 등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거기다 안양공장의 건설까지 겹쳐 그는 늘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헌은 1973년 5월 25일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64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경기도 용인묘원에 안장되었다.

정헌은 경방 김용완 회장, 일신방직 김형남 회장, 대농 박용학 회장 등 업계에서 교유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경제부총리를 지낸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 범양사 이성범 회장, 배재고보 동창인 세브란스병원 조동수 박사 등이 친구였다.

정헌의 가계

정헌은 이영숙(작고)씨와의 사이에 3남4녀를 두었다. 장남 서민석(78·미시간대학원 졸업·산업경영학 석사)씨는 DI동방 회장으로 여경주(74·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 졸업·대한적십자 여성봉사특별자문위원장 역임)씨와 결혼하였으며, 중남미국가인 벨리즈 명예총영사, 대한방직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장인 여석기 교수(작고·도쿄제대 입학·서울대 영문학과 졸업)는 고려대 대학원장, 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 국제교류진흥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정헌의 차남은 서대석(76·미 퍼듀대 공학박사)씨, 삼남은 서준석(72·미시간대 MBA)씨다.

정헌의 장녀 서금원(86·세브란스병원 소아과)씨는 김광덕(세브란스병원 외과)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녀 서융자(80·이화여대 가정과 졸업)씨는 조정완(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과학원 교수와 결혼하였다. 정헌의 3녀 서혜석(70)씨는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하였으며, 4녀 서은석(67)씨는 조지워싱턴대 상업디자인 석사이다.

정헌의 장손 서태원(47·보스턴칼리지 경영학과 졸업)씨는 DI동일 대표이사 사장이다.

정헌의 부인 이영숙 여사는 남편의 인재 육성 뜻을 이루기 위해 사재를 출연, 1979년 정헌재단을 설립하였다. 정헌재단은 중·고·대학생 290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며, 대학교수 등에게 연구용역비도 지급하고 있다. 또 1980년부터 매년 정헌섬유산업상을 시상하고 있다. 2003년에는 정헌메세나를 창립해 유럽에서 활동 중인 한인 및 프랑스인 화가를 선정하여 창작활동 및 개인전을 지원하고 있다.


가족

  • 본인: 서정익(동일방직 창업자)
    • 아들: 서민석(동일방직 회장)
      • 손자: 서태원(동일방직 대표)
      • 손녀: 서승현 변호사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1]] [[2]]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이섭대천종합예술제(利涉大川綜合藝術祭)

새아침의 여명이 밝아오듯이 “빛으로” 찬란하게 예술인들은 자신만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또는 자신만의 색채로 우리 이천의 예술을 꽃피우고자 합니다. 우리 이천을 문화예술의 도시로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문화와 예술이듯이 이천의 혼불로 르네상스를 이천예총 각협회가 만들어 가겠습니다. 이천예총은 8개협회(국악협회/무용협회/문인협회/미술협회/사진작가협회/음악협회/연극협회/연예예술인협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천예총이 창의적 생각과 열린마음으로 예술인들의 끼와 혼을 발산시키고 시민들에게 감동과 희열을 느끼게 하는 자리가 바로 이섭대천종합예술제입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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