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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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춘 ( 徐承春 이천인 1556~1592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릉(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서승춘 ( 字 덕보 德甫 號 춘제 春濟 ) 은 중봉 조헌 ( 趙憲 1544~1592 ) 의 문인으로 고성현령 ( 정 5품 ) 을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직 후 ( 37세 ) 증 ( 贈 ) 이조판서 ( 吏曹判書 ) 시호 ( 諡號 ) 익민열공 ( 謚愍烈公 ) 에 추증 ( 追贈 )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자신의 문하생과 지역민 등에게 국난의 위기에 분연히 일어날 것을 요하는 격문을 돌리기에 이른다

조헌의 문인이었던 서승춘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고, 그는 스승의 의기에 찬 부름에 아버지 서진걸과 함께 조헌의 막하에서 전투에 참여하였다

조헌은 자신의 문하생과 승병 등 1,70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청주를 탈환하고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으나,관군은 한꺼번에 같이 치자며 공격을 말렸다

그러나 관군은 그들의 전공을 시기하며 약속을 질질 끌었고, 결국 의병 대부분을 해산시키기에 이른다 이에 격분한 조헌은 단독으로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전투에서 왜군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끝내 그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금산전투에 임한 의병들은 왜군에 비해 수적이나 무기에서 압도적인 열세에 있으면서도 과감히 맞서 싸웠고 전략이라고는 왜적의 총칼로부터 부모와 처자식을 지키고 나아가 경각에 달린 국운을 기필코 소생시켜야 한다는 굳은 일념 때문이었다

금산전투의 막바지에 이르러 칼이 부러지고 화살이 떨어지자 마지막에는 맨주먹으로 왜적의 칼날에 맞서 분전하다가 모두 옥쇄(玉碎)한 700명의 의병의 혼을 기리고자 조헌 제자들은 칠백의총을 남겼고, 이날(1592.8.18) 서승춘은 아버지 서진걸과 함께 순직하였다

현재 전남 해남 춘정마을 입구에는 춘제공파 문중에서 조상의 충절을 기리며 지은 신도비 ( 神 道 碑 ) 가 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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