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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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무반
(別武班)
대표명칭 별무반
한자표기 別武班
유형 제도


정의

고려시대 여진정벌을 위해 설치된 임시군사조직.

내용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서 거주해 오던 여진인들은 11세기 후반 완옌부(完顔部)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세력을 확장하면서 고려와 충돌하게 되었다. 여진족을 제압하기 위해 12세기 초 숙종임간(林幹)을 보내 여진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에 윤관(尹瓘)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임명하여 다시 정벌에 나섰으나, 윤관 역시 패배한다. 윤관은 여진의 주력이 기병인 반면 고려군은 보병이 주력이기 때문에 패하였다고 여기며, 이에 국왕에게 건의하여 새롭게 군대를 편성하였는데, 이 군대가 바로 별무반이다.[1]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설치동기는 당시 기존의 군사체제가 붕괴되어 대규모의 군사동원이 불가능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함이다.[2]

별무반은 당시 정식 직임을 갖고 있는 문무 관원과 과거 응시자, 일부 승려 등을 제외하면 양인 신분의 남성들을 중심으로 편제한 군사 조직이었다.[3] 말하자면 별무반은 위로는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양인 농민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계층에서 동원된 거국적인 군사조직이었던 것이다.[4] 이들 중 말을 가진 자는 기병인 신기군(神騎軍)으로, 승려는 승병(僧兵)으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으로 편성하고, 말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보병인 신보군(神步軍)이나 기타 도탕(跳盪)⋅경궁(梗弓)⋅정노(精弩)⋅발화군(發火軍) 등의 특수군으로 편성하였다.[5]

여진 정벌 계획을 실행하기 전 숙종이 승하하였으나, 뒤를 이어 즉위한 예종 역시 여진 정벌을 적극 추진하였다.[6] 이렇게 조직된 별무반이 여진 정벌에 나선 것은 1107년(예종 2) 12월이었다. 한편 별무반의 설치와 여진 정벌의 이면에는 당시 비대할 대로 비대해진 문벌귀족(門閥貴族)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예종과 윤관의 의도도 숨어 있었다.[7]

17만의 별무반은 정주관(定州關)을 떠나 기습작전으로 여진족을 소탕하고는 이곳에 9성(九城)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1108년(예종 3) 4월에 윤관 등은 일단 개경으로 개선하였다.그러나 여진족은 완옌부를 중심으로 곧바로 조직적인 무력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러던 차에 여진 쪽에서 9성의 환부를 조건으로 화친을 요구하여 왔다. 고려로서도 오랫동안의 전쟁 준비로 막대한 물자와 인명 피해의 부담을 견디기 어려웠던 데다가 개경과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 뿐만 아니라 지형 조건상 지키기도 어려웠다. 그러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화친 쪽으로 여론이 기울었다.[8]

그리하여 마침내 동북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고 강화를 맺으면서 별무반도 해체된 것으로 추정된다.[9]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별무반 윤관 A는 B가 설치하였다

시각자료

영상

주석

  1. "별무반",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이희덕, "별무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별무반",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별무반", 『두산백과』online.
  5. "별무반",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별무반",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7. "별무반", 『두산백과』online.
  8. "별무반", 『두산백과』online.
  9. "별무반",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 "별무반",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별무반", 『두산백과』online.
  • 이희덕, "별무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