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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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정사는 1581년 공암서원(孔巖書院)이 되고, 이것이 충현서원(忠賢書院)의 모태가 되었다.

충현서원(忠賢書院)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 있는 조선 중기 충청도 최초로 세워진 사액 서원. 공주시청에서 대전 방면으로 국도 23호선을 따라 약 18㎞ 달리면 공암이 나온다. 대략 27분여의 시간이 소요되며, 충현서원은 마을의 중앙에 있다.

충현서원은 고청 서기(徐起)에 의해 건립되었다. 서기(徐起)는 출신적인 한계를 딛고 학문적 성과를 이룩한 인물로, 노년기에 이곳에 정착하여 사망하기까지 19년 동안 많은 제자를 가르쳤고, 공주의 사림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때 제자들과 당시 공주목사였던 초간 권문해가 서기(徐起)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에 서원을 세워주자, 석탄 이존오, 한재 이목, 동주 성제원을 제향하였다. 이후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중수하였고, 14년 후인 1624년(인조 2)에 공암서원에서 ‘충현(忠賢)’으로 사액받게 되었다. 당시는 서인이 인조반정을 통해 정권을 잡아, 명나라에 대한 사대가 강조되던 시기라 주자를 주벽으로 모시던 충현서원의 사액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사액을 받은 다음해 사우의 중건을 통해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790년(정조 14)에는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졌으나,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된다. 훼철 당시 주자 영정이 공주향교 존경각에 봉안되었다. 1917년에는 공주의 유림들이 단에 제향을 드리기 시작하였고, 1925년 옛터에 사우를 중건하였으며, 철폐되기 전에 제향되었던 이존오, 이목, 성제원, 조헌, 김장생,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복원하는 한편 별사(別祀)되던 서기(徐起)도 함께 제향하였다. 현재의 충현서원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사당이 복원되면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훼철되기 이전에는 사당, 신문, 강당, 진수재, 천이재, 재실, 전사실, 직사, 홍전문 등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에는 사당과 신문(삼문), 강당, 수직사가 복원되어 있으며, 뒷면에 신문을 두고 사당을 배치하였으며, 앞면에 강당을 사당과 직각 방향으로 배치한 ‘전학후묘’식 배치를 하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1고주 5량집 구조에 겹치마 맞배지붕 양식이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강당은 1989년에 중건된 것이고, 신문(神門)은 정면 3칸의 솟을삼문 형식이며, 수직사는 1995년 지었다. 수직사는 목조 한옥을 모방하여 콘크리트 건물에 기와를 올린 형식이다. 1925년 복원된 충현서원은 1969년에 사단법인이 결성되면서 이사회를 통해 운영되어 왔고, 1989년에는 강당이 중건되었으며, 1994년에는 관리사가 신축되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2기의 서원비, 하마석 등 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 충현서원은 공주와 지역의 사림 형성 과정과 사림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충청도 최초의 사액서원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 고청(孤靑) 서기(徐起)​

이천서씨 서선 공도공파 후예


가족

  • 증조할아버지: 서찬(徐讚 참봉)
    • 할아버지: 서승우(徐承佑. 남재.부인은 한산이씨)


공(公)은 조선시대 학자로서 자는 대가(待可), 호는 고청(孤靑) · 고청초로(孤靑樵老) 등으로 불리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중종 18년(1523) 귀령(龜齡)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공의 나이 7세에 서당에 나가 공부를 시작했는데 금세 통달해 버리고, 어느 날 스승에게 글을 올려 "스승님은 제 말을 허물하지 마시고 저로 하여금 성현서(聖賢書)를 읽게 해 주소서." 하였다. 스승은 이 글을 읽고 무릎을 치면서 비범한 아이임을 깨달았다. 10세가 되면서 화담(花潭)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이론과 기술까지 통달하였다. 공의 나이 20세가 넘어 토정(土亭) 이지함(李之涵) 선생을 만나 오도(悟道)의 바른 것을 배우면서 특히 스승과 뜻이 맞아 스승과 함께 한라산 등 각지를 유람하면서 민속과 실용적 학문의 연구에 전념하였다.

​ 그 후 공은 토정과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3년만에 고향에 돌아왔으나, 고향 풍속이 어지럽고 법도가 혼란함을 늘 탄식하였다. 이후 고향에 강신서당(講信書堂)을 지었는데, 마을의 못된 자들이 그 집에다 불을 지르므로 처자를 데리고 지리산 홍운동(紅雲洞)으로 들어가 제자들을 가르쳤다. 인적이 없는 곳에 집을 짓고 밭을 일구어 연명하고, 여름과 가을에는 산배<山梨> 등 열매로 배고픔을 달래면서 학문에 탐구하였는데, 각처에서 제자들이 몰려와 그 옆에다 서당과 숙소를 지었다. 문하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자, 오물이 쌓이고 흘러내려 부근에 있는 절이 폐할까 염려한 공은 지리산에 기거한지 4년만에 다시 계룡산 고청봉(孤靑峰) 아래 공암동(孔巖洞)에 자리를 옮겨 이후 18년 동안 오로지 후학 양성에 힘썼다.

​ 말년에 임진왜란이 예상되어서 의병장 조헌과 상의를 하였으며,죽기전에 아들 서홍덕,서홍도에게 임진왜란이 일어날것을 알려고, 서홍도는 부친에 말을 성실히 이행하여 목숨을 구했다. ​ 공이 69세로 별세하니 지평(持平)에 추증되고,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의 별사(別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는 『고청유고(孤靑遺稿)』가 있다.

제자로 박희성, 박희철, 민재문,허균(許筠),송이창,김장생(金長生 호는 사계(沙溪),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심의겸, 심충겸(沈忠謙) 등 

증조할아버지 서찬(徐讚 참봉)

할아버지 남재 서승우(徐承佑. 부인은 한산이씨)는 (김일손 문인)으로 역적으로 몰려서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래서, 아버지 서구령(徐龜齡)은 조선에서 시대에 앞서서 소금장수(옹기장수)를 하였는데, 조선에서 상업은 제일 천대 받아서 천민으로 오해를 받았다. 

토정 이지함(李之菡  한산이씨)선생도 소금장사를 하였는데, 서구령선생에 영향이다.

할아버지 서승우(徐承佑)에 도움을 받는 심강(沈鋼 -인순왕후(仁順王后 )아버지)선생이

신동인 서기(徐起)에 재주를 아깝게 여겨서 아들인 沈忠謙(심충겸) 과 심의겸 선생으로 집에서 기거하며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2]]


본관은 이천서씨(利川徐氏) 문목공파(文穆公派)

자는 대가(待可), 호는 고청초로(孤靑樵老)ㆍ구당(龜堂)ㆍ이와(頤窩). 서구령(徐龜齡)의 아들이다. 서경덕(徐敬德)ㆍ이중호(李仲虎)ㆍ이지함(李之菡)을 사사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물론 기술의 이론까지 통달하였으며, 선학(禪學)을 좋아하였다. 특히, 이지함을 만나면서 비로소 유학(儒學)이 정도(正道)임을 깨닫게 되었다. 홍주(洪州)와 지리산ㆍ계룡산 근처로 거처를 옮겨다니면서 오로지 학문과 강학에만 전념하였다. 말년에 임진왜란이 예상되어서 의병장 조헌과 상의를 하였으며,죽기전에 아들 서홍덕,서홍도에게 임진왜란이 일어날것을 알려고, 서홍도는 부친에 말을 성실히 이행하여 목숨을 구했다.

충청남도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의 별사(別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고청유고(孤靑遺稿)』가 있다.

 

제자로 박희성, 박희철, 민재문,허균(許筠),송이창,김장생(金長生 호는 사계(沙溪),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심의겸,심충겸(沈忠謙) 등 

참고문헌

『고청유고(孤靑遺稿)』

 

이천서씨(利川徐氏) 시조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의 세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눌(徐訥 문하시중(門下侍中). 종 1품. 국무총리)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좌복야(左僕射). 정 2품. 부총리)

서유위(徐維偉 장야서령(掌冶署令). 정 3품. 장관)

서주행(徐周行 달성군(達城君). 장관)

5세 서수(徐琇 문하시중(門下侍中) 봉 희양대군. 종 1품. 국무총리)

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참지정사(參知政事).판삼사사(判三司事).종 1품.국무총리)

​서존(徐存 태원군(太原君). 병부상서(兵曹尙書).장관)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6세 서장기(徐長己 병부시랑(兵部侍郞).종 3품.차관)

서균(徐鈞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좌복야(左僕射). 정 2품. 부총리)

서청습(徐淸習 금오위별장 동정(金吾衛別將同正).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장관)    

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

7세     서진부(徐振扶  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부총리)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평장사(平章事).정2품.부총리)

서영관(穎觀)은 현화사(玄化寺) □자대사(□紫大師) 

서공(徐恭 경령전판관(景靈殿判官).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평장사(平章事).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 국무총리)

서순(徐淳(徐諄) □□□동정(同正).동지추밀사(同知樞密事). 종 2품. 부총리)

서성(徐成  내시 수서랑동정(內侍 授書郞同正).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정2품.부총리)

서염(徐廉 춘방공자(春坊公子). 사복부령(司僕部令). 종2품.부총리)

서효리(徐孝理  문림랑(文林郞) 태창서승(太倉署丞). 좌복야(尙書左僕射).정 2품. 부총리)

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8세        서저(徐氐 병부낭중(兵部郎中). 종 3품. 차관)

서평(徐坪 판도좌랑(版圖佐郞).차관

서광(徐珖 예빈소경(禮賓少卿)).차관)

9세    서의(徐義 감찰어사(監察御史).정 3품.장관) 

10세      서온(徐溫.승지(承旨).정 3품.장관)  

11세      서염(徐恬 태관서령 겸 직문한서太官署令兼直文翰署)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 부총리)

12세      서진(徐璡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정 3품. 장관)

서충(徐忠 판밀직사(判密直司事).종 2품.부총리),

서윤(徐玧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 2품. 부총리)

13세     서원(徐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정 2품.부총리)

서유(徐逾 비인현사(庇仁縣事) .시장)

14세     서선(徐選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재상).우의정(右議政).정1품. 부총리)의 후예

충현서원(忠賢書院)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 있는 조선 중기 충청도 최초로 세워진 사액 서원. 공주시청에서 대전 방면으로 국도 23호선을 따라 약 18㎞ 달리면 공암이 나온다. 대략 27분여의 시간이 소요되며, 충현서원은 마을의 중앙에 있다.

충현서원유적(忠賢書院遺跡)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조선시대 학자 서기(徐起)가 주자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시도기념물.

충현서원 사적비(忠賢書院事蹟碑)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충현서원에 있는 서원 사적비. 충현서원 사적비충현서원(일명 공암서원) 안에 있는 서원 사적비로, 1712년(숙종 38) 연천의 임장서원에서 주자의 화상을 모사해와 신판 뒤에 봉안한 과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공주 충현서원 문화제

충현문화제 등은 공주시 반포면 공암 옛 장터길 충현서원특설무대 등 일원에서 열린다.

이천서씨 문목공파(文穆公派) 후손

서신일을 시조로 하고 서치운을 입향조로 하는 세종 지역의 세거 성씨.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는 이천서씨 문목공파(文穆公派) 후손들이 1800년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하봉리에 입향한 이래 현재까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이천서씨는 신라 효공왕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을 시조로 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서필(徐弼)·서희(徐熙)·서눌(徐訥) 3대가 재상(宰相)이 되었고, 이후 가문이 번성하여 문벌 귀족으로 성장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과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다. 이천서씨는 서씨의 대종(大宗)으로, 달성(達成)·장성(長城)·연산(連山)·남양(南陽)·부여(扶餘)·대구(大丘) 등 20여 개로 분파되었다.

장군면 하봉리 이천서씨는 서기(徐起)[1523~1591]를 파조로 하는 문목공파 후손 서치운(徐致運)[1812~1861]을 입향조로 삼고 있다. 이천서씨 문목공파의 세거지인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를 떠나 주변 지역인 연기면 수산리, 장군면 산학리·은용리 등지를 거쳐 하봉리에 정착하였다. 뚜렷한 입향 사유는 알 수 없다. 현재 하봉리에는 서기의 13~14세손이 살고 있다.

장군면 하봉리 이천서씨는 1960년대 하봉리 전체 100가구 중 30가구, 2019년 5월에는 20가구가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연기군의 이천서씨는 1985년 31가구 133명, 2000년 37가구 141명이다. 2015년 세종특별자치시의 이천서씨는 658명으로 남자 355명, 여자 303명이다.

장군면 하봉리 이천서씨 문목공파 문중은 매년 음력 10월 15일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에 있는 재실(齋室) 박약재(博約齋)에서 종원(宗員) 100여 명이 모여 향사(享祀)[제사를 지냄]하고 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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