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의 실심실학(實心實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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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wonk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6년 4월 15일 (금) 21: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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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은 『숙종실록(肅宗實錄)』의 그의 졸년기사(卒年記事)에

 윤증은 이미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하여 사림(士林)에서 죄를 얻었고, 또 유계(兪棨)가 편수(編修)한 예서(禮書)를 몰래 그 아버지가 저작한 것으로 돌려 놓았다가 수년 전에 그 사실이 비로소 드러나니, 유계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이를 노여워하여 편지를 보내 절교하였다. 윤증은 젊어서 일찍이 유계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에 이르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윤증이 전후로 두 어진 스승을 배반했으니, 그 죄는 더욱 용서하기 어렵다.'고 하였다.[1]

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숙종은 한 번도 면식이 없는 그에게 여러 차례 고관직(高官職)을 제수(除授)하였으나 한 번도 사환(仕宦)하지 않자 그가 작고함에 이르러 조시(弔詩)를 지어 “한 유림(儒林)의 도덕(道德)을 존모(尊慕)하였으니 소자(小子) 또한 일찍이 그를 흠앙(欽仰)하였도다. 평생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한지라 죽은 날에 한스러움이 더욱 참을 수 없노라”[2] 라고 대조되는 입장을 나타낸다. 이렇게 그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는 면을 보이는 것은 격렬한 당쟁에 휩싸였던 그의 일생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쓰여 지며 새로운 해석과 평가가 내려지는 것이라 하지만 격랑의 노·소당쟁(老少黨爭) 속에 휘말린 윤증의 역사적 평가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학계에서 진행된 그간의 연구들은 주로 당쟁사의 관점에서 진행된 연구들로써, 정치사적인 사건과 노·소 분당과 관련되어 집중되어 있었다.[3] 글에서는 윤증의 생애를 통하여 ‘무실(務實)’과 ‘예(禮)의 실천’을 강조한 그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장에서는 먼저 그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는 생애 가운데 전쟁 뿐 아니라 여러 정치적인 격변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건들은 분명 그의 사상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의 생애를 고찰하여 보고 그의 학문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3 장에서는 그의 ‘무실(務實)의 실심실학’에 대하여 살펴보고 후대의 ‘탈(脫)성리학적인 실학사상’과 구별되는 ‘성리학적 실학의 전형’으로서의 그의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4 장에서는 ‘도덕적 실천’ 수단으로서의 예의 실천에 대하여 살펴보고 그의 예학관을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출처

  1. 『숙종실록(肅宗實錄)』 권 55, 숙종 40년 1월 30일 임신, “拯旣叛背宋時烈 得罪士林 又以兪棨所編禮書 陰歸之於其父 數年前事始發露 棨之孫相基 怒移書絶之 拯少嘗師事棨 至是人謂拯前後背二賢師 罪尤難貸云.”[1]
  2. 『당의통략(黨議通略)』 숙종조(肅宗條). “儒林尊道德 小子亦嘗欽 平生不識面 恨彌深又日.”
  3. 다음과 같은 연구들이 있다.
    이은순, 「懷尼是非의 論點과 名分論」, 『한국사연구』 48집, 한국사연구회, 1985.
    이은순, 『조선후기 당쟁사연구』, 일조각, 1990.
    이성무 외, 『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이태진,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개정판), 태학사, 2003.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아름다운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