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의 실심실학(實心實學)
김동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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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 Kim Dong-geun |
전공 | 한국사학 |
과정 | 박사 수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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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은 『숙종실록(肅宗實錄)』의 그의 졸년기사(卒年記事)에
윤증은 이미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하여 사림(士林)에서 죄를 얻었고, 또 유계(兪棨)가 편수(編修)한 예서(禮書)를 몰래 그 아버지가 저작한 것으로 돌려 놓았다가 수년 전에 그 사실이 비로소 드러나니, 유계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이를 노여워하여 편지를 보내 절교하였다. 윤증은 젊어서 일찍이 유계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에 이르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윤증이 전후로 두 어진 스승을 배반했으니, 그 죄는 더욱 용서하기 어렵다.'고 하였다.[1]
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숙종은 한 번도 면식이 없는 그에게 여러 차례 고관직(高官職)을 제수(除授)하였으나 한 번도 사환(仕宦)하지 않자 그가 작고함에 이르러 조시(弔詩)를 지어 “한 유림(儒林)의 도덕(道德)을 존모(尊慕)하였으니 소자(小子) 또한 일찍이 그를 흠앙(欽仰)하였도다. 평생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한지라 죽은 날에 한스러움이 더욱 참을 수 없노라”[2] 라고 대조되는 입장을 나타낸다. 이렇게 그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는 면을 보이는 것은 격렬한 당쟁에 휩싸였던 그의 일생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쓰여 지며 새로운 해석과 평가가 내려지는 것이라 하지만 격랑의 노·소당쟁(老少黨爭) 속에 휘말린 윤증의 역사적 평가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학계에서 진행된 그간의 연구들은 주로 당쟁사의 관점에서 진행된 연구들로써, 정치사적인 사건과 노·소 분당과 관련되어 집중되어 있었다.[3] 글에서는 윤증의 생애를 통하여 ‘무실(務實)’과 ‘예(禮)의 실천’을 강조한 그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장에서는 먼저 그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는 생애 가운데 전쟁 뿐 아니라 여러 정치적인 격변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건들은 분명 그의 사상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의 생애를 고찰하여 보고 그의 학문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3 장에서는 그의 ‘무실(務實)의 실심실학’에 대하여 살펴보고 후대의 ‘탈(脫)성리학적인 실학사상’과 구별되는 ‘성리학적 실학의 전형’으로서의 그의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4 장에서는 ‘도덕적 실천’ 수단으로서의 예의 실천에 대하여 살펴보고 그의 예학관을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윤증의 생애
윤증의 집안은 尼山(지금의 논산)에 재지적 기반을 둔 유력 사족 가문이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은 그가 태어나기 2년 전의 일이지만, 병자호란(丙子胡亂)은 그의 나이 8세 때 겪은 일이다. 국내의 정계가 격변하던 사건들도 거의 그의 생애에서 겪은 것들이다. 서인의 집권을 가져온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12세), 남인이 집권하게 된 을사환국(乙巳換局, 37세), 정권이 다시 서인의 세력으로 들어가게 된 갑술옥사(甲戌獄事, 66세) 등이 다 그러한 사건들이다. 외족의 침략으로 민생은 파탄 상태에 이르렀음에도 획기적인 구제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권 쟁탈에 영일(寧日)이 없던, 당쟁이 본격화한 특징을 띤 시대가 그의 생존기였다. 게다가 그와 송시열(宋時烈)의 불화로 말미암아, 서인들 사이에서 노·소분열 현상까지 야기되었음을 보게 된다.[4]
윤증은 병자호란 때 척화신(斥和臣)으로 널리 알려진 윤황(尹煌, 八松, 1571-1639)의 손자이고, 『가례원류(家禮源流)』의 공편자인 예학자 윤선거(尹宣擧, 美村, 1610-1669)의 아들이다. 그는 또 16세기에 이이(李珥, 栗谷)와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을 행한 성혼(成渾, 牛溪)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17세기 조선 예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호서의 김장생(金長生, 沙溪)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부친을 비롯한 김집(金集, 愼獨齋), 권시(權諰, 炭翁), 송시열 등에게 사사(師事)했으므로,[5] 그의 학문은 성혼·이이에서 연원하는 이른바 ‘우율(牛栗)’의 학통을 잇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19세 때 부친의 친지이며, 그 자신이 스승의 예로 모시던 권시의 여식과 결혼하였다.[6] 이에 연혼(連婚) 관계로는 권시를 중심으로 송시열·윤선거·윤휴(尹鑴, 白湖, 1617-1680) 등이 다 서로 사돈 관계를 이루었던 속에 그가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에 이들의 당쟁 의식이 아직 본격화하지 않아 분열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사실 이들은 청년기에는 학문을 통하여 서로 친밀한 사이였다.
윤증은 뛰어난 학행에 힘입어, 30세 때부터 천거되다가, 36세 때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그 뒤 수많은 관직을 받았다.[7] 그러나 그는 어느 관직에도 취임하지 않았고, 면직의 상소만 올리는 것으로 일관하였다. 실로 그의 관직 사양은 ‘우의정의 경우’에는 사직소를 일 년 이상의 기간(14개월 동안)을 끌면서 8차례나 올리고서야 체직될 정도였다.[8] 그 사양의 이유는 병자호란 가운데 호병의 화를 피하기 위해 자결한 모친에 대한 효도를 하지 못한(不孝) 점과 허명무실(虛名無實)한 관리 생활[盜虛之差]보다 고결한 수기(修己) 위주의 수지(守志)를 더 중요시하여 “진실로 자신을 위하는 학문, 곧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표방하는 성리학의 정신에 충실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다.[9]
윤증이 관가(官街)를 멀리한 데에는 그의 가계가 지닌 호란과의 관련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관료 진출의 부당성을 이미 ‘모친에 대한 불효 때문’이라고 하였지만, 병자호란 때 그의 부친의 행적과도 관련이 없지 않았다. 그의 부친은 호란 중에 강화도로 피란했다가 강화도가 함락될 즈음, 그의 모친이 자결하던 상황에서, 그의 모친을 데리고 도피하지도 못하고 함께 자결하지도 못한 채, 홀로 피신한 일종의 ‘도덕적 하자’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부친은 평생 관가를 멀리하면서 수양과 학문에만 종사하였다. 그런 부친의 ‘수양과 학문태도’를 그도 이어 받아, 그는 학행(學行)의 뛰어남으로 해서 수많은 벼슬들이 주어졌지만, 다 사양하고 초야의 선비로 일생을 마쳤던 것이다.
이러한 윤증에게는 그의 높은 학식과 고매한 몸가짐으로 해서 따르는 이들과 문도가 많았다. 그 당시의 선비는 비록 관직을 받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나마 정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런 터에 부친이 별세하자, 그는 아버지의 묘갈(墓碣) 저작을 스승인 송시열에게 청탁하였다. 그 청을 받은 송시열은 그의 부친의 강화도 행실에 불만이었던지, 묘갈 저작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그는 송시열과 마침내 불화하게 되었고, 그 둘의 불화가 뜻밖의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윤증과 송시열은 다 같은 서인(西人)이었으나, 그들의 불화로 말미암아 송시열을 따르는 이들과 윤증을 따르는 이들이 각기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갈리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정치사의 시각에서는 그를 ‘소론의 영수’라고도 평가한다. 이는 처사로 불리던 그가 정계에 끼친 무관(無冠)의 영향력을 짐작케 하는 것이었다.
윤증의 학문 배경과 그 시대 상황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리학은 위와 같은 굴절의 역사를 겪으면서도, 17·18세기의 학자들은 그 성리학을 실학(實學)으로 간주하였다. 윤증 또한 성리학을 실학이라고 믿고 부른 데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10] 이러한 사실 때문에 학문의 명칭만 가지고서는 성리학과 17세기 이후에 발흥한 ‘탈(脫)성리학적 실학’이 혼동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다음 장에서는 윤증의 성리학을 고찰하여, 그가 자신의 성리학을 실학으로 간주한 근거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런 점이 밝혀질 때, 17세기 이후의 두 실학이 지닌 특성의 차이가 분명해져 그 혼동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실(務實)’의 실심실학(實心實學)
윤증은 평소에 입지(立志)와 무실(務實)을 중요시하였다. 그의 손자, 윤동원(尹東源, 1685-1741)도 윤증의 이와 같은 점을 전하고 있다.
입지(立志)의 독실함에 있어서는 “성인의 성(性)도 나의 성과 같다. 배워서 성인에 미치지 못한다면 내 성에 힘을 다 쏟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고, 무실(務實)의 지극함에 있어서는 “모두가 실리(實理)여서 사물마다 근간이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무실은 위로도 통하고 아래로도 통하는 공부이다.”[11]
마침 윤증의 「연보」에서도 “그가 입지와 무실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곧 그의 가전지결(家傳旨訣)이었다”[12]고 한다. 이러한 점은 그의 학통이 성혼과 이이의 학문을 계승하는 우율(牛栗) 계통이었음을 상기하더라도 학통상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윤증은 초학자들에게는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성혼의 『위학지방(爲學之方)』 및 성혼이 발췌 편찬한 『주문지결(朱門旨訣)』을 반드시 추천하였다고 하는데, 이 책들에서 공통으로 역설하는 것이 성인(聖人) 지향의 입지이다.
학통과 상관없이 윤증은 이황(李滉, 退溪)의 성리학도 위기(爲己)의 측면에서 존숭하였다. 그는 “근래 퇴옹(退翁)이 편집한 『이학통록(理學通錄)』과 사우(師友) 간에 문답한 것을 읽어 보았더니, 위지기학(爲己之學)으로서 심신에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13]고 하면서, 타인에게 이황의 글을 읽도록 권하였다. 그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는 자신이 지은 재규(齋規)와 이이의 석담서원재규(石潭書院齋規) 및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걸어 두고 후학들로 하여금 익히도록 하였다.[14] 이는 모두 ‘입지를 출발점으로 한 수양’을 그가 매우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는 사례들이다.
위기의 수양을 위해서는 학통을 벗어나 이황까지도 본보기로 삼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학문적 기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는 이이였다. 다음의 글이 그 한 예증이다.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는 모두 입지(立志)로 수장(首章)을 삼았다. 왜냐하면 뜻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일을 하더라도 성(誠)의 태도로 하지 않으면, (그 일을) 성취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실(務實)하고자 하는 것이다.[15]
이것은 윤증이 ‘입지’와 ‘무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이이의 사상을 계승하는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일찍이 이이도 인생의 목표를 최고의 이상적 인간인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 두고 그 뜻을 스스로 ‘입지’의 내용으로 삼았으며, 더욱이 『격몽요결』을 통하여 남에게도 이것을 가르쳤다. 이 실천에서는 초학(初學)이나 노숙(老熟)을 가리지 않고, ‘무실’의 태도가 가장 긴요함을 역설하였다. 윤증의 풀이대로 ‘무실’이 ‘성(誠)’과 통함으로써 매사에 실제의 진실한 공효(功效)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입지와 그 성취의 요건인 ‘무실의 해석을 성과 통하는 것’으로 한 이 점은 주목할 만한 그의 사상이다.
성이 무실과 통하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은 달리 말해 그것이 바로 ‘실심(實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이는 “천도(天道)는 곧 실리(實理)이고 인도(人道)는 실심(實心)이다.”, “이른바 실리(實理) 실심(實心)이란 성(誠)에 지나지 않는다.”[16]고 하였다. 윤증은 이이의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한 마음(一心)이 성실하지 못하면 만사(萬事)가 모두 허위가 되며, 한 마음이 성실하면 만사가 모두 성실해진다."[17]라고 주장하였다. 성을 실심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실심의 태도로 학문과 수양 및 일반 사무를 행하면, 그 결과는 진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 실공(實功)·실덕(實德)·실효(實效)까지 거두게 된다. 그의 무실의 목표는 만사를 성실인 실심에 의거하여 진실을 비롯하여, 실공·실효·실용의 결실을 거두려는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결국 윤증이 이루려는 학문은 무실의 관점에서 볼 때, 성실과 같은 실심을 바탕으로 실공의 효과를 거두려는 이른바 실학(實學)이다. 그는 실제로 ‘실학’이라는 용어를 이런 맥락에서 구사하였다. 그의 실학은 헛된 이름(虛名) 또는 부실(不實)한 결과를 가져올 사무(事務) 추구로서의 외치(外馳)의 폐단을 막을 수 있는 ‘정미한 의리’와 ‘존양성찰’을 해 가는 학문이다. 다시 말해 박학(博學)에 힘쓰지 말고 오로지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마음을 닦는 실심의 학문이 바로 윤증의 학문이다. 일찍이 그의 실학이 ‘실심실학’ 또는 ‘궁경실학(窮經實學)’이라고 평가 받은 것도 이런 점에서 타당하다.[18]
예의 실천
윤증이 추구한 실학은 출발에서 무실의 구호를 내세웠고, 그 무실은 행위의 결과가 실질·실효·실용 등 실제적 효과를 거두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이런 효과를 거두기 위한 무실 추구의 과정에는 성(誠)·경(敬) 등에 의거한 ‘실심(實心)을 갖추는 일’, 곧 ‘수기(修己)의 조건에 대한 충족’이 매우 강조되고 있었다. 그리고 실심을 갖추는 그의 수기는 무엇보다도 유학의 전통적 예(禮)와 오륜(五倫) 등 ‘도덕의 실천’을 위한 수단으로 논해졌다. 이러한 것이 그의 실심을 중심에 둔 그의 ‘성리학적 실학의 특징’이었다.
물론 윤증이 무실을 강조할 때, 그는 ‘무실의 적용’이 ‘모든 사물, 곧 만사(萬事)’를 범위로 두었다. 그러나 실제로 실용성과 실효성을 거두려고 지향한 것은 수기로 이룰 수 있는 ‘예행(禮行)인 도덕적 행위’였지, 경세(經世)로 표현되는 정치제도의 분야가 아니었다. 정치제도의 모순과 비리의 개혁을 통한 당시 현실 사회적 폐단의 척결에 실효를 거둘 구체적 방안은 그에게서 논의되지 않았음에 유의해야 한다. 더욱이 성리학 풍토를 벗어나는 범위에서 당시의 폐단 척결을 역설한 탈성리학적 주장은 그에게서 나오지 않았음도 주목해야 한다.
윤증이 남긴 독립적 저술 가운데에는 경세 문제를 다룬 글이 전무하지는 않지만, 그런 것보다는 예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고, 그의 저술을 대표하는 것도 예서들이다. 『상례유서(喪禮遺書)』, 『제례유서(祭禮遺書)』, 『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 「국휼중관혼상제례사의(國恤中冠婚喪祭禮私議)」, 「사례사의후식(四禮私議後識)」이 이런 점을 입증하는 그의 저술[19]들이다. 그의 이런 업적은 그가 성리학자인 동시에 저명한 예학자였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당시 17-18세기가 ‘예학시대(禮學時代)’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임을 감안하면, 그의 예 중시 경향은 시대사조의 자연스러운 영향이라 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이해하면, 그의 실학은 ‘예 실천’을 ‘실(實)의 내용’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가 예학시대였다고 해서, 또는 당쟁까지 예송(禮訟) 형식으로 벌일 정도로 예를 절대시하는 사고에 빠졌던 시대라고 해서, 그가 예학을 성리학과 대등할 정도로 중요시하지는 않았다.
“예학(禮學)이란 단지 배움(學) 가운데 하나(一事)일 뿐이다. 어찌 별도의 양상을 띤 문호를 이룰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자주 성리학(理學)과 예학을 대칭하는데, 이는 가소로운 것이다.”[20]
그는 예학을 성리학의 한 가지 일(一事)로 간주하는 데 그쳤을 뿐, 별개의 학문으로 인정하는 견해에 반대하였다. 그는 다만 일용백사(日用百事)를 행함에서 예의 내용인 절문(節文)·의칙(儀則)을 실천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역설하는 데에서 타인에 뒤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예송 같은 것에 대한 견해를 보아도, 그는 예를 절대시하는 사유에 함몰된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비록 서인의 입장에 속하였지만, 복상(服喪)의 예에 대한 남인·서인의 주장 가운데 어느 편에도 동조·지원하는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삼년의 예설(禮說)은 비록 같고 다름(同異)이 있지만, 서로의 논쟁이 십 년에 이르렀습니다. 이쪽이 옳고 저쪽이 그르다고 하거나, 저쪽이 옳고 이쪽이 그르다고 한들 무슨 큰 해로움(害)이 있겠습니까. 삼년의 설을 바꿔 기년설(期年說)로 하자고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이 일은 이미 결판이 났는데도 서로 공격하며 끝없는 화단(禍端)을 자아내고 있는데, 그 시초를 보면 매우 작고 긴요치도 않은 한 가지 일(一事)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과연 무슨 꼴인지, 가소롭고 해괴한 일입니다.”[21]
이것은 그가 예를 절대시 하지 않고, 상대적인 관점에서 융통성을 발휘할 것을 피력한 것이다. 그 상대적인 융통성이 당시의 ‘실정(實情)’에 바탕을 둔 실제적 판단으로 내린 것이라면, 이 사유 또한 그의 무실 정신의 소산일 것이다.
맺음말
윤증은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 받았지만 관계에 한 번도 진출하지 않은 채 재야 산림(山林)으로 생을 마쳤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생의 굴곡이 물론 연관되어 있었다. 부친인 윤선거의 이른바 ‘강화도에서의 사건[江都의 事]’으로 인하여 평생 그 변명과 명예회복에 골몰해야 했고, 그것이 관직에 진출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또한 부친의 일에 대한 명예 회복 과정에서 스승이기도 했던 송시열과의 의절이 그의 인생에 파란을 일으켰다. 한편으로는 주변 사우들과의 인간적 관계에 금이 간 것은 물론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우암을 비판하는 당파들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윤증은 우율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여 ‘무실’이라는 차원으로 발전시켜 기호학파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었다. 그가 표방했던 ‘실심실학’은 후대의 ‘탈성리학적인 실학’과 구별되는 것으로써, 성실과 같은 실심을 바탕으로 실공의 효과를 목표로 삼았고, 소론의 현실주의·합리주의적 특성을 대표하였다.
윤증의 무실정신은 예의 실천에도 적용되었다. 그는 학술적인 시비 논쟁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그것을 정쟁으로 비화시키는 개인이나 세력에 대해서는 준엄한 비판을 가하였다. 실심을 갖추기 위한 수기를 완성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로서의 ‘예의 실천’을 강조하면서도 예를 절대시하지 않았던 그의 사유 또한 무실 정신의 소산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 『肅宗實錄』
- 『栗谷全書』
- 『明齋遺稿』
- 『黨議通略』
- 김현수, 「明齋 尹拯의 禮論과 宗法思想-『明齋疑禮問答』을 중심으로」, 『儒學硏究』 제23집, 2010.
- 劉明鐘, 「明齋 尹拯의 務實學」, 『哲學硏究』 26집, 한국철학연구회, 1978.
- 윤사순, 『한국유학사』 상, 지식산업사, 2012.
- 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7.
- 이성무 외, 『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아름다운날, 2007.
- 이은순, 「懷尼是非의 論點과 名分論」, 『한국사연구』 48집, 한국사연구회, 1985.
- 이은순, 『조선후기 당쟁사연구』, 일조각, 1990.
- 이은순, 「明齋 尹拯의 生涯와 思想的 淵源」, 『儒學硏究』 제5집, 1997.
- 이태진,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개정판), 태학사, 2003.
- 韓㳓劤, 「李朝實學의 槪念에 대하여」, 『震檀學報』 19집, 진단학회, 1958.
- 韓㳓劤, 「尹拯의 實學觀」, 『東國史學』 6집, 동국대사학회, 1960.
출처
- ↑ 『숙종실록(肅宗實錄)』 권 55, 숙종 40년 1월 30일 임신, “拯旣叛背宋時烈 得罪士林 又以兪棨所編禮書 陰歸之於其父 數年前事始發露 棨之孫相基 怒移書絶之 拯少嘗師事棨 至是人謂拯前後背二賢師 罪尤難貸云.”[1]
- ↑ 『黨議通略』 肅宗條. “儒林尊道德 小子亦嘗欽 平生不識面 恨彌深又日.”
- ↑ 다음과 같은 연구들이 있다.
이은순, 「懷尼是非의 論點과 名分論」, 『한국사연구』 48집, 한국사연구회, 1985.
이은순, 『조선후기 당쟁사연구』, 일조각, 1990.
이성무 외, 『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이태진,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개정판), 태학사, 2003.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아름다운날, 2007. - ↑ 이은순, 「明齋 尹拯의 生涯와 思想的 淵源」, 『儒學硏究』 제5집, 1997, 32쪽.
- ↑ 그의 학문 수업을 「年譜」와 「行狀」에 따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피면, 그는 일찍이(14세) 그의 부친과 절친했던 兪棨에게서 수학하였고, 장성해서는 한때 송시열 문하에서도 학문을 익혔지만, 그것은 29세 때 金集의 권유로 송시열에게서 朱子書를 수개월 배우고 돌아온 정도였다. 그가 尤庵에게 공부한 기간은 길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 『明齋遺稿』 「明齋年譜」附錄, 卷1, 家狀.
- ↑ 『明齋遺稿』 「明齋年譜」附錄, 卷1, 家狀. 世子翊衛司 翊贊(38세), 全羅都事(39세), 司憲府 持平(40세), 世子侍講院 進善(43세), 司憲府 執義(45·46·47·52·53·54세), 漢城府 右尹(55세), 大司憲(56·62세), 吏曹參判(66·67세), 工曹判書(67세), 成均館 祭酒(68세), 吏曹判書(69세), 大司憲(69·70세), 右參贊( 70·72·73세), 右議政(81세), 判中樞府事(82세) 등의 관직을 받았다.
그리고 별세 11년 후(1723)에는 文成이라는 시호가 주어졌고, 龍巖書院·魯岡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 ↑ 『明齋遺稿』 「明齋年譜」附錄, 卷2.
- ↑ 『明齋遺稿』 「明齋年譜」附錄, 卷1, 二十三年條. 윤증은 이러한 사례의 모범으로 송나라의 劉韐과 그의 아들 子羽·子翬의 예를 들고 있다.
- ↑ 윤증의 성리학을 실학의 관점에서 살핀 연구로는 韓㳓劤, 「尹拯의 實學觀」, 『東國史學』 6집, 동국대사학회, 1960; 「李朝實學의 槪念에 대하여」, 『震檀學報』 19집, 진단학회, 1958.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劉明鐘, 「明齋 尹拯의 務實學」, 『哲學硏究』 26집, 한국철학연구회, 1978.이 있다.
- ↑ 『明齋遺稿』 「明齋年譜」附錄, 卷1, 家狀.
- ↑ 『明齋遺稿』 「明齋年譜」卷1, 四十九年條, “又必以立志務實爲本 此乃先生家傳旨訣爾.”
- ↑ 『明齋遺稿』 卷18, 答崔主一, “近讀退翁所編理學通錄 師生朋友間所問答 無非爲己之學切於身心者.”
- ↑ 『明齋遺稿』 「明齋年譜」卷1, 四十八年條.
- ↑ 『明齋遺稿』 卷26, 答或人, “擊蒙要訣及聖學輯要 皆以立志爲首章 蓋有是志 然後方可爲其事故也 雖爲其事 不以誠則不能成 故欲其務實.”
- ↑ 『栗谷全書』, 拾遺.
- ↑ 『明齋遺稿』 別集 卷3, 「擬與懷川書」 辛酉夏, “一心不實 萬事皆假 一心苟實 萬事皆眞.”
- ↑ 韓㳓劤, 「尹拯의 實學觀」, 『東國史學』 6집, 동국대사학회, 1960.
- ↑ 김현수, 「明齋 尹拯의 禮論과 宗法思想-『明齋疑禮問答』을 중심으로」, 『儒學硏究』 제23집, 2010, 116쪽.
- ↑ 『明齋遺稿』 卷25, 「答鄭萬陽葵陽」, “禮學則只是學之一事 有何別樣門戶 世人往往以理學禮學 對擧稱之 亦可笑也.”
- ↑ 『明齋遺稿』 卷9, 「上炭翁」 丙午條. “三年之禮 雖同異互爭 至於十年 或彼是此非 或此是彼非 亦何大害之有也 非欲請變三年之見 而爲期年之見也 大抵此事已成大判 互相攻擊 釀出無限禍機 環視其初 特一小無關緊之服制一事而已 此果何樣可笑可怪事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