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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5-9대 대통령

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

  • 출생-사망 : 1917.11.14 - 1979.10.26
  • 출생지 : 경상북도 구미
  • 관련사건 : 4·19혁명, 2·27선언, 6·3사태
  • 대표관직(경력)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제5·6·7·8·9대 대통령

생애 및 활동사항

1961년 5월 16일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재임중에 5·16군사정변을 주도하여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고, 1962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하였으며,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1969년 3선개헌을 통과시켰다. 제3공화국 재임동안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문제'를 강행하였다.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유신 초기 '근면, 자조, 협동'의 기치를 내세운 전 국민적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농어촌의 근대화에 힘썼다. 관 주도로 펼쳐진 운동인 탓에 부작용도 있었으나 이로 인하여 절대 빈곤을 해소하는 데는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점점 커져가는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 빈부 격차, 국민들의 민주화운동으로 지지도가 하락하자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정권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거센 저항에 부딪혔고 그는 국민의 저항을 돌파하고자 북한으로 관심을 돌리려 '자주ㆍ평화ㆍ민족대단결'을 민족통일의 3대원칙으로 규정한 1972년 7ㆍ4남북공동성명과 73년 6ㆍ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할슈타인원칙의 폐기)'이 제시되었다. 실제 정책면에서는 북한의 비협조와 당시의 국제정세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79년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부마사태(釜馬事態)’가 절정을 이루던 때,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측근의 한 사람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하였다. 그와 함께 유신체제도 끝났다.

어린이 대공원 설립

골프장을 옮기고 어린이를 위한 대공원으로 만들라고 지시를 내린 것은 1970년 12월 4일이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공원 조성공사를 기공한 것은 1972년 11월 초부터의 일이다. 그러나 마침 겨울철이라서 제대로 공사가 진척되지 못하다가 1973년 봄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으며, 이른바 100일 작전이라는 불철주야의 강행군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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