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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렬왕후의 혼례복 물목<ref>김남희ㅣ(2016)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노의 일습 복원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석사학위논문</ref>은 ''적의(翟衣) 일습''과 ''장삼(長衫) 3점'', 세수장삼 1점, ''마리삭[首紗只] 2점'', ''노의(露衣) 1점'', ''중삼(中衫) 1점'', ''말군(袜裙) 2점'', ''대(帶) 1점'', ''저고리[赤古里] 6점'', ''호수(胡袖) 2점'', ''치마[赤亇] 5점'', ''삼아(衫兒) 2점'',  ''속곳[裏衣] 2점'', ''너울[汝火] 1점'', ''입영(笠纓) 1점'', ''매듭[每緝] 1점'', ''이불[衾] 3점'', ''입영단추[笠纓月亇只] 1점'', ''노의대(露衣帶) 1점'', ''너울매듭[汝火每緝] 1점'', ''경의(景衣) 1점'', ''대요(帶腰) 1점'', ''면사(面紗) 1점'', ''입(笠) 1점'', ''흉배(胸背) 8척(8隻)'', ''신[鞋] 1점'', ''체발(髢髮) 68丹 5箇'', 그 외 ''빗과 비녀'' 등이 있다.<br/>
 
::1. 장렬왕후의 혼례복 물목<ref>김남희ㅣ(2016)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노의 일습 복원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석사학위논문</ref>은 ''적의(翟衣) 일습''과 ''장삼(長衫) 3점'', 세수장삼 1점, ''마리삭[首紗只] 2점'', ''노의(露衣) 1점'', ''중삼(中衫) 1점'', ''말군(袜裙) 2점'', ''대(帶) 1점'', ''저고리[赤古里] 6점'', ''호수(胡袖) 2점'', ''치마[赤亇] 5점'', ''삼아(衫兒) 2점'',  ''속곳[裏衣] 2점'', ''너울[汝火] 1점'', ''입영(笠纓) 1점'', ''매듭[每緝] 1점'', ''이불[衾] 3점'', ''입영단추[笠纓月亇只] 1점'', ''노의대(露衣帶) 1점'', ''너울매듭[汝火每緝] 1점'', ''경의(景衣) 1점'', ''대요(帶腰) 1점'', ''면사(面紗) 1점'', ''입(笠) 1점'', ''흉배(胸背) 8척(8隻)'', ''신[鞋] 1점'', ''체발(髢髮) 68丹 5箇'', 그 외 ''빗과 비녀'' 등이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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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례복물목 유형 || 관계 ||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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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형별로 분류하면 머리장식, 쓰개, 예복, 상의, 하의, 기타로 나눌 수 있다. 머리장식으로는 체발, 소첩, 빗, 비녀, 마리삭, 대요가 있고, 쓰개로는 너울과 립, 면사가 있다. 예복으로는 적의 일습, 장삼, 노의가 있다. 상의에는 중삼, 경의, 저고리, 호수, 삼아가 있고, 하의로는 말군, 치마, 속곳이 있다. 기타로 대(帶)와 신[鞋], 흉배와 이불이 있다.<br/>
 
::2. 유형별로 분류하면 머리장식, 쓰개, 예복, 상의, 하의, 기타로 나눌 수 있다. 머리장식으로는 체발, 소첩, 빗, 비녀, 마리삭, 대요가 있고, 쓰개로는 너울과 립, 면사가 있다. 예복으로는 적의 일습, 장삼, 노의가 있다. 상의에는 중삼, 경의, 저고리, 호수, 삼아가 있고, 하의로는 말군, 치마, 속곳이 있다. 기타로 대(帶)와 신[鞋], 흉배와 이불이 있다.<br/>

2020년 11월 1일 (일) 02:18 판

왕비의 대례복
(王妃의 大禮服)
김아람 컬렉션
대표명칭 왕비의 대례복
한자표기 王妃의 大禮服
이칭별칭 적의
분류 혼례복
착용신분 왕비
착용성별 여성


인조와 계비인 장렬왕후의 혼례

장렬왕후는 1638년 12월 3일 인조[1]와 혼례를 치르고, 인조의 계비가 되는데, 이 혼례시기는 1592년 임진왜란, 1598년 정유재란[2]인 왜와의 전쟁을 치르고, 또 몇 년 후인 1637년 1월에 끝난 병자호란의 전란 후에 치러진 왕실의 첫 혼례의례였다.

장렬왕후 혼례 당시의 상황


장렬왕후와 인조의 혼례 당시 넉넉하지 못한 왕실제정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의궤와 등록에서 보인다.
의궤는 (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3], 등록은 (장렬왕비가례계제사등록 틀:ISBN979-11-5866-25-8)[1]에 기록되어있으며,(인조실록)의 기록으로도 혼례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하는 여러 내용들이 보인다.

장렬왕후 혼례 기록

1.

  1. 장렬왕후와 인조의 혼례기록인 (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의 기록에는 1638년 10월 3일 삼간택 시행을 위해 예조에서 올린 계사에 대한 내용을 시작으로 가례도감설치, 별궁장소 결정, 혼례의 정사와 부사 임명, 왕비 최종 간택, 그리고 6례에 대해서 기록되어있으며, 12월 3일 친영과 동뢰연으로 왕실의 대혼을 마무리하는 기록이 보인다.
  1. 1왕과 왕비의 혼례절차
  1.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혼례절차는 세종실록오례의와 국조오례의의 「가례(嘉禮)」‘납비의(納妃儀)’에서 규정된다. 절차는 크게 사전의식, 본의식, 사후의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사전의식은 간택(揀擇)과 택일(擇日)이고, 본의식은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冊妃), 명사봉영(命使奉迎) 또는 친영(親迎) , 동뢰(同牢)의 육례(六禮)[4]이다. 명사봉영은 왕이 친영을 하지 않고 신하를 대신 보내 왕비를 맞아오는 것으로 중종 이전에 시행하였고, 중종부터는 왕이 친영을 시행하였다.
  1. 사후의식은 왕비조왕대비(王妃朝王大妃), 왕비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 전하회백관(殿下會百官), 왕비수내외명부조회(王妃受內外命婦朝會) 世宗實錄 「五禮」 ‘納妃儀’: “王妃朝王大妃, 王妃受百官賀, 殿下會百官, 王妃受外命婦朝會”가 있다. 왕비가 대비에게 알현하는 예인 왕비조왕대비 절차는 세종실록오례의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국조오례의에는 누락되어 있다.

2.

  1. 장렬왕후와 인조의 또 다른 혼례기록인 (장렬왕비가례계제사등록)의 기록에는 의궤의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 장렬왕후의 삼간택 시행 내용이 기록되어있으며, 전란후의 왕실제정을 알 수 있는 혼례의례의 복식을 감할것을 논의하는 기록과 여러 기물들을 줄여야한다는 내용 또한 포함되어있다.
  1. 인조는 정비(正妃)인 인열왕후(1594~1635)의 국상(國喪)을 1635년에 치렀다. 국상을 치른 그 이듬해인 1636년 12월에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1637년에 1월까지 계속되다가 그달 30일 마무리되었다. 인조와 계비의 국혼은 전란이 어느 정도 복구될 즈음 대신들이 인조에게 계비를 들일 것을 주청하는 기록이[2] 보인다.[5]
  1. 전란 후이긴 하나 물력이 충분하지 않아도 절약하면 혼례를 치를 있음을 피력하는 대신들의 거듭된 간청에 그 해 12월 22일 금혼령(禁婚領)을 내려 처녀들의 혼인을 금지하고 처녀단자를 들인다. 그 이듬해인 1638년에 처녀단자의 실적이 저조하자 인조는 다시 처녀단자를 받아 4월 29일 초간택, 5월 29일 재간택, 10월 26일 삼간택을 치르는데, 인천부사 조창원의 딸이 삼간택에 간택되었다. 훗날 장렬왕후이다.
  1. 간택처자는 이날 바로 별궁으로 나아가고, 여러 번의 습의를 거쳐 11월 4일 납채(納采), 16일 납징(納徵), 30일 고기(告期), 12월 2일 책비(冊妃), 3일에 친영(親迎)과 동뢰연(同牢宴)을 마지막으로 약 1년간의 국혼을 마무리한다.[6]

장렬왕후 혼례복

1.

1. 장렬왕후의 혼례복 물목[3]적의(翟衣) 일습장삼(長衫) 3점, 세수장삼 1점, 마리삭[首紗只] 2점, 노의(露衣) 1점, 중삼(中衫) 1점, 말군(袜裙) 2점, 대(帶) 1점, 저고리[赤古里] 6점, 호수(胡袖) 2점, 치마[赤亇] 5점, 삼아(衫兒) 2점, 속곳[裏衣] 2점, 너울[汝火] 1점, 입영(笠纓) 1점, 매듭[每緝] 1점, 이불[衾] 3점, 입영단추[笠纓月亇只] 1점, 노의대(露衣帶) 1점, 너울매듭[汝火每緝] 1점, 경의(景衣) 1점, 대요(帶腰) 1점, 면사(面紗) 1점, 입(笠) 1점, 흉배(胸背) 8척(8隻), 신[鞋] 1점, 체발(髢髮) 68丹 5箇, 그 외 빗과 비녀 등이 있다.
혼례복물목 유형 관계 관련 문서
머리장식 종류 비녀
쓰개 종류 너울
예복 종류 적의
상의 종류 저고리
하의 종류 말군
기타 종류
2. 유형별로 분류하면 머리장식, 쓰개, 예복, 상의, 하의, 기타로 나눌 수 있다. 머리장식으로는 체발, 소첩, 빗, 비녀, 마리삭, 대요가 있고, 쓰개로는 너울과 립, 면사가 있다. 예복으로는 적의 일습, 장삼, 노의가 있다. 상의에는 중삼, 경의, 저고리, 호수, 삼아가 있고, 하의로는 말군, 치마, 속곳이 있다. 기타로 대(帶)와 신[鞋], 흉배와 이불이 있다.
  1. 장렬왕후는 머리장식으로 체발, 소첩[빗접], 비녀, 마리삭과 대요를 마련한다.
  1. 장렬왕후는 쓰개로 너울과 면사를 1점씩 마련하고, 너울의 부속으로 자초립·입영·입영단추를 마련한다. 너울과 면사의 색은 자적색이다.
  1. 장렬왕후는 예복으로 적의 일습과, 장삼 3점, 노의 1점을 마련한다.
  1. 적의의 겉옷인 대삼(大衫)과, 노의(露衣)는 대홍색을 쓰고, 장삼(長衫)은 대홍색과 자적색을 쓴다.
  2. 예복용 장삼은 모두 3점으로 흉배겹장삼, 겹장삼, 단장삼이 있다.
  3. 노의는 대홍색을 사용한 금원문노의(金圓紋露衣)로 대홍필단 1필과 대홍정주 2필로 겉·안을 하고, 원문남필단 3척6촌으로 태수를 달고, 첩금 3속3첩3장을 사용하여 부금(付金)장식을 한다. 동정은 달지 않는다.

장렬왕후의 예송논쟁

장렬왕후의 상례

장렬왕후의 상례절차

『장렬왕후 국장도감의궤』
『장렬왕후 부묘도감의궤』
『장렬왕후 산릉도감의궤』
『장렬왕후 존승도감의궤』

장렬왕후의 상례복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2017)|ISBN=979=11=5866=257=8
  2.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1637) 3월 27일
  3. 김남희ㅣ(2016)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노의 일습 복원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석사학위논문

참고문헌

1.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2. 『장렬왕비가례계제사등록』
3. 『인조실록』
4. 김남희,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노의 일습 복원에 관한 연구.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