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의 실심실학(實心實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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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wonk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6년 4월 15일 (금) 21:1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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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은 『숙종실록(肅宗實錄)』의 그의 졸년기사(卒年記事)에

 윤증은 이미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하여 사림(士林)에서 죄를 얻었고, 또 유계(兪棨)가 편수(編修)한 예서(禮書)를 몰래 그 아버지가 저작한 것으로 돌려 놓았다가 수년 전에 그 사실이 비로소 드러나니, 유계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이를 노여워하여 편지를 보내 절교하였다. 윤증은 젊어서 일찍이 유계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에 이르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윤증이 전후로 두 어진 스승을 배반했으니, 그 죄는 더욱 용서하기 어렵다.'고 하였다.[1]

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숙종은 한 번도 면식이 없는 그에게 여러 차례 고관직(高官職)을 제수(除授)하였으나 한 번도 사환(仕宦)하지 않자 그가 작고함에 이르러 조시(弔詩)를 지어 “한 유림(儒林)의 도덕(道德)을 존모(尊慕)하였으니 소자(小子) 또한 일찍이 그를 흠앙(欽仰)하였도다. 평생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한지라 죽은 날에 한스러움이 더욱 참을 수 없노라”[2] 라고 대조되는 입장을 나타낸다. 이렇게 그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는 면을 보이는 것은 격렬한 당쟁에 휩싸였던 그의 일생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쓰여 지며 새로운 해석과 평가가 내려지는 것이라 하지만 격랑의 노·소당쟁(老少黨爭) 속에 휘말린 윤증의 역사적 평가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학계에서 진행된 그간의 연구들은 주로 당쟁사의 관점에서 진행된 연구들로써, 정치사적인 사건과 노·소 분당과 관련되어 집중되어 있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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