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KU

DH 교육용 위키
Wikisisop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3월 5일 (일) 08:41 판

(비교) ← 이전 판 | 최신판 (비교) | 다음 판 → (비교)
이동: 둘러보기, 검색

Meta Data

  • 타입 : 인물
  • 이름 : 맹자(孟子)
  • 생년 : BC 372 추정
  • 몰년 : BC 289 추정
  • 역할 : 문묘(대성전)에 배향
  • 편자 : 필암서원 201313086 김원주

내용

맹자는 공자가 죽고 나서 100년 정도 뒤에 태어났다. 공자나 맹자나 정확하게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가능한 방법은 『논어』나 『맹자』에 실려 있는 그들의 행적을 추적해서, 즉 그들이 만났던 사람들이나, 목격했거나 관련되었던 사건들을 참고해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이다.

공자는 대략 기원전 551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경에 죽었으며 맹자는 기원전 372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289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들에 의해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로 분류된다. 공자는 춘추시대에 살았으며 맹자는 전국시대에 살았다.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까지이며 전국시대는 기원전 403년에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인 기원전 222년까지이다.

기원전 770년은 주(周) 왕실이 견융(犬戎)이라는 종족에게 쫓겨 수도를 동쪽인 낙양(洛陽)으로 옮긴 해이다. 그 전까지 중국은 주 왕실을 중심으로 많은 봉건국가들이 위성처럼 분립해 있었으며 이들은 혈연과 제사와 군사에 의해 주 왕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주 왕실이 동쪽으로 천도할 즈음을 전후해서 이러한 봉건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춘추시대는 패자(覇者)들의 시대였다. 패자는 주 왕실의 명목만은 존중하면서 실상은 무력으로 다른 제후들을 정복했고 그럼으로써 천하를 다스렸다. 차례로 천하를 제패했던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은 5패로 불린다. 춘추시대만 해도 ― 제후국들은 실제적으로 독립한 나라였지만 ― 패자들은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었다.

전국시대에 들어서면 주나라는 거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제후들도 더 이상 근왕의 명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춘추시대에 170여개에 달했던 제후국들은 동맹과 연맹의 결성, 외교적․군사적 전쟁을 통해 7개의 제후국으로 정리되었다. 즉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불리는 한(韓)․위(魏)․조(趙)․연(燕)․제(齊)․초(楚)․진(秦)이 이들이다. 이들은 천하를 제패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두고 약육강식의 전쟁을 전개했다.

공자는 주 왕실 중심의 봉건제를 이상적인 제도로 생각했다. 공자를 시조로 하는 유가의 눈에서 보면 이러한 춘추전국시대는 인륜이 무너져가는 윤리․정치적 혼란기였을 뿐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철기와 우경의 보급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문화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국가차원에서 생산력을 높이려는 정책도 시도되었으며, 한편에서는 상인의 세력이 커져서 상인으로서 부에 의해 진의 재상까지 된 여불위(呂不韋) 같은 사람도 등장했다.

전국시대는 또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였다. 사회의 혼란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세상을 구제할 것인가에 관한 각종 사상이 태어났으며, 사상을 통제할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중국사상사에서 가장 자유롭고 다채로운 논쟁이 전개된 시기였다. 법가, 도가, 농가, 종횡가, 명가, 음양가, 잡가 등을 표방하는 수많은 학자들이 왕성한 사상활동을 펼치고 있었으며 맹자는 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 자처하면서, 다른 학파들을 비판하고 때로는 그들과 논쟁하면서 유학의 골격을 완성해갔다.

맹자孟子, 즉 맹선생의 성은 맹(孟)이며 이름은 가(軻)이다. 추(鄒)라는 지방 출신인데 추는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에 속한 지방이라는 설도 있고 독립된 나라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교육에 열심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아들의 좋은 교육환경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거나 중도에 공부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들에게 명심시키기 위해 자신이 짜던 베를 잘랐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맹자는 인의(仁義)의 덕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가 당시의 정치적 분열상태를 극복할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왕도정치를 시행하라고 제후들에게 유세하고 다녔다. 기원전 320년경에 양(梁)나라(하남성 개봉시)에 가서 혜왕에게 왕도에 대해 유세했으나, 일이 년 뒤에 혜(惠)왕이 죽은 뒤, 아들인 양(襄)에게 실망해서 산동에 있는 제(齊)나라로 옮겼다. 그곳에서 제나라의 선(宣)왕에게 기대를 걸고 칠팔 년을 머물렀으나, 역시 자신의 이론이 채용되지 않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송(宋, 하남성 상구현), 설(薛, 산동성 등현 서남쪽)을 거쳐 일차로 추에 돌아온 뒤, 다시 문공(文公)의 초대를 받아 등(藤, 산동성 등현)으로 갔다. 역시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노魯(산동성 곡부현)를 거쳐 고향인 추로 돌아왔다. 당시의 제후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부국강병의 정치술이었다. 그러한 제후들의 현실적 관심과 맞아떨어질 여지가 없었던 맹자의 이론은 어느 제후에게도 채택되지 못했으며, 맹자는 당대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50세가 넘어서 시작했던 편력을 그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70세 가량 되었을 때라고 추정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시경』과 『서경』, 그리고 공자의 정신에 대해 토론했으며, 그 때 만들어진 책이 오늘날 전해지는 『맹자』7편이다.

참조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