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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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섭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6월 23일 (일) 02:0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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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양헌수의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甫). 부사정 양종임(梁鍾任)의 아들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무예를 익혔다.[1]

양헌수의 생애

  • 1848년(현종 14)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철종 때 참상관이 되었다. 1865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백기호의 탐학을 징계하여 제주 도민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그해 가을 극심한 태풍으로 피해가 크자 조정에 진휼 요청 및 피해 복구 작업을 하기 위해 1년을 더 머물렀다.[2]
  • 10월 3일 프랑스함대의 로즈(Rose) 제독이 보낸 해군대령 올리비에(Ollibier) 부대 160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 6명을 죽이고 많은 부상자를 냈으며,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세워 프랑스군이 패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4]
  • 병사로 재직중이던 1871년에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설한 별위사제도(別衛士制度)의 격려 방안으로 매년 도시(都試)를 시행하여 성적에 따라 우대하고 곡식과 면포로 포상하였으며, 이와 같은 치적이 인정되어 특별히 1년 더 병사로 임직 하였다. 이듬해에는 당시 황해도 연안에 출몰하던 해적 일당을 체포하여 효수하기도 하였다.[5]

강화도 방어체계와 관련

양현수는 부대를 이끌고 덕진진을 거쳐 몰래 삼랑성(다른 이름으론 정족산성이라 불린다.)으로 가서 프랑스 군을 격파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유명한 정족산성 전투이다.

멀티미디어

스틸

파노라마

네트워크 그래프

주석

  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
  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
  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
  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
  5.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
  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
  7.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