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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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대유현나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6년 5월 20일 (금) 21:4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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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명나라(틀:Lang, 1368년 ~ 1644년)는 중국 역대 황조 중 하나로 주원장(朱元璋)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한족 황조이다. 정식 국호는 대명(大明)이며, 모두 16명의 황제가 있었고 277년간 존속했다. 청나라의 거듭되는 침공과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였고 그 뒤에는 청나라이자성의 반군과 남명(南明)을 제압하고 중국을 지배하였다.


건국

몽골이 건국한 원나라 황조는 14세기에 들어와 제위상속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나 통치능력이 저하되었다. 거기에 천재지변과 전염병이 차례로 일어났기 때문에 백련교도1351년홍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반란은 순식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홍건군에 속한 장수였던 가난한 농부 출신 주원장(훗날 태조 홍무제)은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장강유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여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홍무제는 건국하자마자 북벌을 개시하여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대도(북경)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홍무제는 통일을 달성한 뒤에는 외정을 자제하고, 농촌의 토지조사 및 인구조사를 진행해 이갑제, 위소제를 시행하고 내정의 안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홍무제는 건국공신을 숙청하고, 재상이 있던 중서성을 폐지하고 6부를 황제 직속으로 만들어 독재체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1398년 홍무제가 죽자 의문태자 주표의 아들인 황태손 건문제와 숙부였던 홍무제의 아들들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나, 북경을 중심으로 북방의 방비를 맡았던 홍무제의 4남 연왕 주체가 반란을 일으켰다(정난의 변). 1402년 주체는 수도 남경을 점령하고 건문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다. 그가 바로 제3대 황제 성조 영락제였다. 영락제의 즉위로 인해 정치의 중심은 다시 북경으로 이동했다.

북로남왜의 위기

한편 몽골 고원에서 서 몽골의 오이라트가 힘을 얻어 몽골을 제압하고 명나라에 침공을 가했다. 1449년 영종은 측근인 환관 왕진의 부추김으로 오이라트 원정에 나섰다가 자신이 포로가 되는 대패를 맞이한 토목의 변이 일어났다.

오이라트 족장 에센 칸이 내분으로 살해되어 명나라는 위기를 벗어났으나, 후에 귀환해 복위한 영종이래 역대 황제는 자금성에서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또한 정치를 소홀히 하는 황제도 많아, 국세는 서서히 기울어지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서 왜구가 중국인 밀교역상인과 연대하여 활동을 시작해 해안 지역을 위협하게 되었다. 거기에 몽골에서는 쿠빌라이 칸의 자손이라고 칭한 다얀 칸이 즉위하여 오이라트에 대항해 몽골의 재통일을 이룩했다. 오르도스 지방에 분봉된 다얀 칸의 손자 알탄 칸은 16세기 중기부터 빈번하게 중국에 침입하여 1550년에는 북경을 포위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시대 명나라를 괴롭히던 왜구와 몽골을 가리켜 북로남왜(北虜南倭)라고 불렀다.

명의 쇠락기

장거정이 죽은 이후 명 신종 만력제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동림당의 당쟁, 국본쟁과 만력태정 등의 문제가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만력삼대정의 문제와 만주지역에서 후금이 흥기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만력제 시기에 명나라가 쇠락으로 접어든 것으로 간주된다.
1620년 만력제 사후 그의 장자 주상락(朱常洛)이 등극하여 광종 태창제가 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희종 천계제가 즉위하였다. 천계제는 즉위 초기 동림당 인사를 대거 등용하였으나 당쟁이 격렬해지자 천계제 역시 정사에 뜻을 잃었다. 그 기회를 틈타 위충현이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동림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위충현을 중심으로 결집하였고, 이들은 정적으로부터 엄당(閹黨)이라고 불렸다. 1624년 엄당이 내각을 차지하였고, 위충현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위충현은 동림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여 1625년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고 수많은 동림당 인사가 투옥되었다. 이 시기에 정부의 행정 기능이 약화되었고 각지에서 민변이 발생하였으며, 후금과 몽골이 변경을 위협하였다.
1627년 천계제가 중병이 들자 그의 동생 주유겸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마지막 황제 숭정제이다. 숭정제가 즉위한 이후 위충현의 세력을 제거하고 조정 내외의 폐단을 혁파하였다. 그러나 당쟁은 그치지 않았고 숭정제가 의도한 개혁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1629년 홍타이지가 장성을 돌파하여 북경까지 이르게 되자 숭정제는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원숭환을 사형에 처하였다.
홍타이지는 그 이후에도 6차례에 걸쳐 장성을 돌파하였으며 직예와 산동 지역을 유린하였다. 때문에 당시 직예 지역은 전란이 그치지 않고 전염병이 횡행하였기 때문에 민심이 흉흉하였다. 동북지역의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청나라의 군대가 장성을 압박하였다. 마침내 1640년 청나라가 금주(錦州) 등 지역을 점령하고 명나라의 주력 군대를 격파하였다. 홍타이지는 명나라의 주요 장수인 홍승주(洪承疇) 등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에 명나라의 전선은 산해관(山海關)으로 후퇴하였다.
이 시기에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발생하였는데 그 중에서 이자성이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자성은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으로 하고 북경으로 진격하였다. 1644년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함락시키자 숭정제가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고, 이로써 명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명나라의 황족과 관료들이 남경에서 남명을 세우고 청나라에 계속 저항했으나, 청나라의 신속한 공격 앞에 무너졌다. 마침내 1661년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가 미얀마에서 영력제를 사로잡아 남명이 멸망했다. 그 외에도 정성공(鄭成功)과 그의 후손이 타이완을 점거하고 저항했으나, 1683년 청나라에 의해 진압되었다.

디아스포라

명말청초의 변혁기 속에서 일부 한족들은 앞서 언급한 바 정씨 왕국이 지배하는 대만으로 가기도 하고, 다른 부류는 조선으로, 또 다른 부류는 일본나가사키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에도 막부가 지정해주는 장소에 모여 살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나가사키 차이나타운의 기원이 되었다.[1]

정치

원말의 해이해진 정국을 경계한 홍무제정난의 변으로 황제에 등극한 영락제는 모두 정권을 안정화하기 위해 강력한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그전까지 강력한 권세를 누리던 신하도 황제의 명령에 위반되는 경우, 그 즉시 숙청되는 일도 생겼다. 명대의 관료제는 매우 발달하였지만, 아무리 강력한 권신(權臣)과 환관(宦官)도 황제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제거가 가능하였다는 점은 명대가 이전의 한나라나 당나라, 송나라의 정치와는 확연히 다른 면을 보여준다.

역사학자들은 당시의 정치제도는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로 정의하여,[2] 황제의 전권을 견제할 수 있는 기구도 발달하였지만, 황제의 독재를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는 식으로 명대의 정치제도를 설명하였다. 하지만 명나라의 특징은 훌륭한 평가를 받았던 황제의 치세는 짧고, 나쁜 평가를 받은 황제의 치세는 길었던 현상이 아쉬운 부분이다.

홍무제는 환관의 정치 참여를 경계하였지만 정작 자신도 환관을 정치 활동에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영락제는 자신이 황제에 등극한 방법이 부당하였기 때문에, 환관을 이용하여 신하를 억누르는데 사용하였는데, 명대에 환관의 정치 개입이 횡행하였던 것은 이 때부터 비롯되었다. 제5대 황제 선덕제부터 정치 일선에 나서기 시작한 환관들은 정치를 타락시켜서 결과적으로 명나라가 멸망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들은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부정부패를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천계제 시절 대내총관태감(大內總管太監: 최고의 태감으로, 조선의 판내시부사와 같음.)으로 있던 위충현은 자신을 구천구백세(九千九百歲)로 지칭하였는데 자신을 황제인 만세(萬歲)보다 낮고 모든 사람들보다 높은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했기에 붙여진 호칭이다. 천계제의 막강한 총애에 힘입어 위충현은 공개적으로 대소 신료들에게 뇌물을 요구하였고 황궁을 사실상 장악하였다. 하지만 명대의 환관은 한나라당나라와는 달리 권세를 누리던 환관이라고 하더라도 황제의 말 한마디에 언제든지 제거가 가능하였다는 점이 독특한 점이다. 이는 명대에 환관은 한나라당나라의 환관과는 달리 권력의 기반이 오로지 황제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유근, 위충현 등 권세를 떨친 환관들 모두 황제가 제거하기로 마음 먹은 순간 목숨을 잃었다.

명나라 중기 부터는 지식인층이 지방의 지도자로써 지위를 확립해 신사(紳士)라 불리는 새로운 신분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지식인이었고, 관위(官位)를 갖고 있거나 학위(學位)를 가진 사람들로 정의될 수 있다. 그들은 관료로써의 지위와 그 기간에 쌓아올린 재산을 가진 상층신사와, 그 아래의 생원 등의 지식인들이 구성한 하층신사들은 모두 지방의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지도자였기에 정부의 지방관과 협조하여 지방의 정치에 적극 관여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이전의 귀족과는 달리, 혈연을 기반으로 한 권세가문을 형성하지는 못했고, 신사는 세습되는 신분이 아니라서, 기본적인 진입 요건은 학위(學位)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신사였다고 하더라도 자식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료의 부족으로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신사의 족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신사로의 진입과 탈락이 대단히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당시 누구나 상류층으로의 진입이 가능했다는 것과, 사회 내에 유동성이 컸음을 보여준다.[3]

사회경제

명대에 가서 10세기 이래 곡창지대였던 강남지방에서 직물업 등의 공업이 발달했다. 쑤저우항저우 등지가 견직물업의 중심도시가 되었고, 송강(松江) 일대는 면직물업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강남이 공업중심지로 발전하자, 인구가 증가하고 농경지는 상품작물의 재배지가 되어 미곡의 생산이 부족해졌다. 명 말이 되면 양쯔 강 중류지역이 새로운 곡창지대가 되어 경제적 분업화가 이루어졌다. 상업의 발달은 상인 집단을 배출하였는데, 특히 산시 상인신안 상인의 활동이 컸다. 이들에 의해 강남의 수공업 제품이 각지로 팔려 나갔고, 각 지역의 특산물과 쌀, 면화 등의 원료가 강남지방으로 들어왔다. 쌀, 소금, 직물, 도자기, 차 등이 전국적인 교역품이었다.

명대 중엽 이후로 상업의 발달이 특히 두드러졌으며, 강남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서양의 상인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마카오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상인을 필두로 에스파냐, 네덜란드 상인들이 명나라로 와서 중국의 상품을 구입하였다. 명대의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은에 대한 수요도 증가하였기 때문에 유럽 상인들은 견직물, 차, 도자기의 대가로 은을 대가로 지불하였고, 유럽 상인들은 중국 상품을 구입하기 위한 은을 마련하기 위해 멕시코의 은을 약탈, 중국의 상품을 구입하여 유럽에 되파는 형태의 무역을 전개하였다.

명나라 시기에 조세제도인 일조편법은 조세의 일원화를 추구한 것이다.[4]

문화

명나라 초기에는 국수주의적인 풍조가 강했지만, 주자학은 관학화하여 학문적연구에서 멀어져 있었다. 명대의 사상을 대표하는 왕양명(王陽明)은 '인간의 마음이 곧 천하만물의 이법이므로 마음을 함양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학문을 연마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사물의 이치를 객관적으로 탐구해야한다는 기존 학문인 주자학의 격물치지에서 벗어난 것으로 주관적인 수양을 중시하는 양명학이 발달했다.

1582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명나라를 방문하여 서양 과학을 전해왔고, 서광계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외에 서민문화의 성행에 따라 연극 외에 통속소설이 유행하여 수호전, 삼국지연의, 서유기, 금병매 등이 널리 알려졌다.

교육

틀:참고 명나라의 학제는 ·의 학제를 계승하여 교육행정은 중앙의 국자감(國子監)과 지방의 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가 각각 관장했다. 중앙에는 국자감과 종학(宗學)의 두 학교가 있고, 지방에는 부학(府學)·주학(州學)·현학(縣學) 및 위학(衛學)이 있었다. 과거제도는 송·원의 제도를 계승하여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의 3종이 있었다. 과거제에서는 정형화된 형식의 답안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팔고문이라는 형식의 독특한 문장이 유행하였는데, 이 폐단으로 말미암아 사상이 경직되는 단점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명 중엽 이후 상업이 발달하고 서적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이에 부응하여 학문과 사상이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널리 퍼졌다.

대외 관계

명나라 조정은 1567년(융경 원년)까지, 거의 200년간 쇄국정책(海禁, 하이진)을 실시하였다. 이 해에 복건 순무 도택민이 하이진을 풀어 줄 것을 청하여, "배를 유인하는"(船引) 제도의 실시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명 조정은 단지 복건 장주월항 한 곳만을 교역항으로 개방했을 뿐이었다.

1637년 6월 27일, 영국의 거상 윌리엄 커틴이 보낸, 해적에 가까운 존 원델 대령이 이끄는 4척의 중무장한 배들이 마카오에 당도하여 영국과 중국 간의 무역 관계 개설을 시도하였으나, 포르투갈 당국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이것은 영국과 중국 간의 최초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평가된다.

조선과의 관계

틀:참고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의 하나로는 중국의 왕조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취하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전부터 친명정책(親命策)을 표방하였으며, 개국하게 되어서는 즉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새 왕조의 승인을 청하고 국호도 화령(和寧)·조선의 둘을 지어 보내서, 조선이란 국호를 선택받아 사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명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란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朝鮮國王)”의 금인(金印)을 받아 정식으로 왕(王)에 책봉된 것은 1401년(태종 1)에 이르러서였다. 그 뒤로 국왕의 즉위에는 반드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죽었을 때에는 이를 알려서 시호를 받았으며, 또 종속(從屬)의 상징으로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한편 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정조사(正祖使)·동지사(冬至使) 등 정기적인 사행(使行) 및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형식적으로 정치적인 종속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직접적으로 정치의 간섭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명나라와 실질적으로 유대를 맺게 되는 것은 조공과 회사(回賜)의 형식을 통한 양국 간의 접촉에서였다. 파견하던 사행(使行)에는 일정한 액수의 공물을 바쳐야 되었는데, 그 중요한 것으로는 금은(金銀)·마필(馬匹)·인삼·저포(苧布)·마포(麻布)·석자류(席子類)·호피(虎皮)·나전(螺銓) 등이었으며 때에 따라 처녀와 환관(宦官)의 요구도 있었다. 이 중에서 국내 생산이 부족한 금은의 세공은 커다란 부담이 되어 국내에서는 함경도 단천(端川)의 금광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채광(採鑛)을 장려하며 민간의 사용을 제안하였으나 여전히 부족하였다. 때문에 금은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대신 다른 토산물을 바칠 것을 청하여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마필(馬匹)·포자(布子)로써 대납할 수 있게 되었다. 조공에 대한 명나라에 회사품(回賜品)으로는 각종의 견직물(絹織物)·약재·서적·문방구 등이 있었다. 조공과 회사는 일종의 관무역(官貿易)으로서 그 경제적인 의의도 컸다.

이와 같은 관무역 외에 사신이 서로 내왕할 때마다 북경(北京)에서는 회동관, 서울에서는 태평관에서 두 나라 사이의 사무역(私貿易)이 행해졌다. 명나라에 조공을 하기 위하여 국내의 물산을 거둬들이며, 아울러 명나라의 우수한 물산이 국내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국내 산업은 위축되고, 금은·인삼 등을 비롯한 각종 무역의 통제는 일반적으로 상업 활동을 침체케 하는 결점도 있었으나, 선진국인 명나라와의 교섭은 귀족의 생활 향상과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한 바도 많았다. 명나라와 조선 정부는 국초부터 오랜 숙제였던 종계변무문제(宗系辨誣問題)도 선조 때에는 해결됨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친선관계는 더욱더 두터워졌다.

그리하여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는 원병을 보내어 일본군을 격퇴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 전쟁을 통하여 명나라의 국력이 크게 소모된 사이에 만주 지방에서는 누루하치가 나라를 세워 국호를 후금이라 하고 명나라의 변경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에 광해군은 국내 여론에 못 이겨 군대를 파견했으나 사령관 강홍립에게 상황을 보면서 "명이 우세하면 청과 맞서고, 청이 우세하면 싸우는 척 하다가 항복하라"고 하여 조선의 국력 손실을 최소화했다. 광해군의 그러나 이는 명나라의 멸망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로 올랐으나 그 때는 조선도 청나라와 화해하자는 파와 청나라와 화해하면 안 되는 파로 나뉘었다. 중국 상황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의 국력이 세지고 말아 조선은 그 때만 해도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요, 조선은 형제의 나라요.' 이런 입장이 있었다. 그래서 청에게 화해를 안 하고 불복하자 정묘호란 등이 청나라가 조선을 침범하게 된다. 하지만 1636년 조선이 굴복하지 않자 청이 다시 쳐들어와서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는 청나라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삼전도의 굴욕) 말아 청나라의 신하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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