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과 영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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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가 된 사건들'''==
 
=='''계기가 된 사건들'''==
===김근태 고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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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고문사건<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0405301849081#csidx782b06d67233418bbd7a0677c186f00 ]</ref>===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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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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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9월4일''' 새벽 5시30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 속해있던 김근태는 7명의 정사복 경찰에게 끌려가 차에 타게 됐다.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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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30여분을 달려 남영동 전철역 주변의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닿았고, 김근태는 5층 15호실로 끌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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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발가벗겨진 뒤 발목·무릎·허벅지·배·가슴이 혁대로 묶인 채, 9월 20일까지 모두 10차례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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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자들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현장에서 움직이는 하수인들이 누구인지를 대라면서, 폭력혁명주의자,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고 집요하게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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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는 지옥의 나락에서도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고, 고문이 잠시 멈추는 틈틈이 그는 고문자들의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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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조서 끝에 쓰인 수사관 이름과 서명도 잊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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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실을 벗어난 9월26일''', 서소문 검찰청 복도에서 아내 인재근을 만난 김근태는 스쳐지나가는 1분여 동안 그는 고문 내용을 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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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구속영장을 비밀로 청구했고 법원도 영장 발부 사실을 철저히 감췄기 때문에 인재근은 남편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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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은 인재근은 며칠 뒤 민청련과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명의로 나온 고문 폭로 유인물 ''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 ''를 통해 이런 과정을 세상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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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가 공개적인 육성으로 세상에 고문 사실을 알린 것은 '''12월19일'''의 첫공판 모두(冒頭)진술을 통해서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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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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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의 지도이념인 ''‘민족적 민주주의’''가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이유로 김태근을 잡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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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은 민청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고 상임부의장 이을호를 비롯해 김희상·김종복·최민화·권형택 등 간부들을 구속 또는 수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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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학생운동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역시 민청련의 배후조종을 받는 단체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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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총선의 결과로 전두환 체제가 동요하면서 저항의 분위기가 대중적으로 고조되는 즈음에 당국은 가장 강력한 '''전위조직인 민청련을 맨 먼저 정치적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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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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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민주세력의 단결'''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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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와 야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리는데 의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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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위는 11월8일 혜화동성당에서 보고대회를 갖기로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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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찰의 원천봉쇄 작전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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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재야인사들은 가택연금됐으며 혜화동성당과 종로 일대에는 전투지역을 방불케 하는 경찰력이 배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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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공대위는 야당을 회유하고 재야세력을 분쇄해버리는 작전을 구사하던 전두환 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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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구는 이듬해인 86년 3월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를 구성해 개헌투쟁 연대틀을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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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이 재야의 반미반핵 논리를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이 기구는 와해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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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더욱 확대발전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라는 큰 사령탑을 형성하는 모태가 됐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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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내용
 
*내용

2019년 6월 18일 (화) 01:22 판

대한민국의 1987년 6월

대한민국의 1987년 6월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시기이다.
박정희의 4.13 호헌 조치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그리고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부터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발표하는 6월 29일 까지 6월 항쟁이 벌어졌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결국 1987년 12월 16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이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사회운동의 비약적인 상승 효과를 가져왔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있다.
영화 "1987"은 박정희의 4.13 호헌조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한열열사의 죽음에 대해서 다뤘고,
영화 "남영동1985"은 같은 시대에, 박종철이 고문당했던 남영동대공분실에서의 김근태의 고문사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계기가 된 사건들

김근태 고문사건[1]

  • 내용

1985년 9월4일 새벽 5시30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 속해있던 김근태는 7명의 정사복 경찰에게 끌려가 차에 타게 됐다. 차는 30여분을 달려 남영동 전철역 주변의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닿았고, 김근태는 5층 15호실로 끌려들어갔다. 그는 발가벗겨진 뒤 발목·무릎·허벅지·배·가슴이 혁대로 묶인 채, 9월 20일까지 모두 10차례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고문자들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현장에서 움직이는 하수인들이 누구인지를 대라면서, 폭력혁명주의자,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고 집요하게 강요했다. 김근태는 지옥의 나락에서도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고, 고문이 잠시 멈추는 틈틈이 그는 고문자들의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기억했다. 진술조서 끝에 쓰인 수사관 이름과 서명도 잊지 않았다.
고문실을 벗어난 9월26일, 서소문 검찰청 복도에서 아내 인재근을 만난 김근태는 스쳐지나가는 1분여 동안 그는 고문 내용을 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검찰이 구속영장을 비밀로 청구했고 법원도 영장 발부 사실을 철저히 감췄기 때문에 인재근은 남편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이야기를 들은 인재근은 며칠 뒤 민청련과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명의로 나온 고문 폭로 유인물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 를 통해 이런 과정을 세상에 알렸다. 김근태가 공개적인 육성으로 세상에 고문 사실을 알린 것은 12월19일의 첫공판 모두(冒頭)진술을 통해서였다.

  • 원인

민청련의 지도이념인 ‘민족적 민주주의’가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이유로 김태근을 잡아갔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민청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고 상임부의장 이을호를 비롯해 김희상·김종복·최민화·권형택 등 간부들을 구속 또는 수배했다. 아울러 학생운동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역시 민청련의 배후조종을 받는 단체로 규정했다. 2·12총선의 결과로 전두환 체제가 동요하면서 저항의 분위기가 대중적으로 고조되는 즈음에 당국은 가장 강력한 전위조직인 민청련을 맨 먼저 정치적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 결과

이 사건은 민주세력의 단결을 불러왔다. 재야와 야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리는데 의견을 모았다. 공대위는 11월8일 혜화동성당에서 보고대회를 갖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경찰의 원천봉쇄 작전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부분의 재야인사들은 가택연금됐으며 혜화동성당과 종로 일대에는 전투지역을 방불케 하는 경찰력이 배치됐다. 하지만 공대위는 야당을 회유하고 재야세력을 분쇄해버리는 작전을 구사하던 전두환 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기구는 이듬해인 86년 3월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를 구성해 개헌투쟁 연대틀을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신민당이 재야의 반미반핵 논리를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이 기구는 와해됐지만,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더욱 확대발전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라는 큰 사령탑을 형성하는 모태가 됐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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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인
  • 결과

4.13 호헌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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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인
  • 결과

이한열 열사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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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영화

남영동 1985

  • 포스터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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