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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문화유산정보 |대표명칭 = 아차산성 (阿且山城) |지정번호 = 사적 제234호 |지정일 = 1973.05.25 |지정명칭 = 아차산성 (阿且山城) |영문명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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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과 [[아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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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삼국사기』]] 권제4, 신라본기 제8 진평왕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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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size:10pt;color:grey;margin: 20px 20px 20px 20px;">가을 8월에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쳐들어왔다.왕이 몸소 군사 1만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막았다.</div>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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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삼국사기』]] 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14년.
A.D. 603년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한 것이다. 신라의 북한산성은 지금의 아차산의 사적 아차산성으로 밝혀졌다. 시굴조사(2000년)에서 사적 아차산성 내의 유물들이 신라의 것들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특히 기와에 새겨진 北·漢·山의 글씨가 여럿 발견되어 신라의 북한산성임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강하류까지 北進한 신라의 거점은 말할 것도 없이 사적 아차산성인 그들의 북한산성이다. 이 곳을 고구려에게 빼앗긴다면 신라는 북진의 진로가 막히는 것이다. 이에 신라의 진평왕은  1만군을 이끌고 와서 고구려군을 격퇴시켰다. 얼마나 참담한 패배였는지, 자기 나라의 ꡔ삼국사기ꡕ고구려본기에서 이때의 상황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이때 고구려의 패한 장수는 고승(高勝)이었다. 기록에 비추어 보건데 고승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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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三國史記 􀀠卷4,新羅本紀4,眞平王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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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ont-size:10pt;color:grey;margin: 20px 20px 20px 20px;">왕이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왕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오니,성안에서는 북치고 소리 지르며 서로 호응하였다. [[고승]]저들이 많고 우리가 적다고 여겨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갔다.</div>
97) 三國史記 􀀠卷20,高句麗本紀8,嬰陽王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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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① 가을 8월에 고구려가 北漢山城을 쳐들어왔다.왕이 몸소 군사 1만을 이끌고 [가서]그들을 막았다.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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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② 왕이 장군 高勝을 보내 신라의 北漢山城을 공격하였다.신라왕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오니,성안에서는 북치고 소리 지르며 서로 호응하였다.[]승은 저들이 많고 우리가 적다고 여겨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갔다.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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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2-①・②는 고구려가 7세기 들어 신라를 공략하는 첫 기록이다. 고구려 영양왕(590~618)이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기습했고,신라 진평왕(579~632)이 구원군 1만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이다.그런데 2-② 기록에는 북한산성의 지리적 조건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곧 성이 한강 이북에 있었고,성안에서 한강을 건너오는 장면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조망권이 담보되어 있는 위치이다.이는 현재 아차산성의 지리적 조건과 부합한다. 이 때문인지 기왕에 이 기록의 북한산성을 아차산성으로 추정하였다.98)더구나 아차산성 시굴조사 결과 ‘北’・‘北漢’・‘漢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발굴보고서에서는 기와편을 같은 문장의 다른 부분으로 생각해 ‘北漢山□’으로 해석하였고,이것을 삼국사기 의 신라 북한산성으로 비정하였다. 7세기대 신라 북한산성이 아차산성임이 유력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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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료는 [[고구려]]가 7세기 들어 [[신라]]를 공략하는 첫 기록이다. [[고구려]] [[영양왕]](590~618)이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기습했고, [[신라]] [[진평왕]](579~632)이 구원군 1만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에는 [[북한산성]]의 지리적 조건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곧 성이 [[한강]] 이북에 있었고, 그 위치도 성안에서 [[한강]]을 건너오는 장면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조망권이 담보되어 있다. 이는 현재 [[아차산성]]의 지리적 조건과 부합한다. 더구나 [[아차산성 시발굴조사]] 결과 ‘北’・‘北漢’・‘漢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발굴 보고서에서는 기와편을 같은 문장의 다른 부분으로 생각해 ‘北漢山□’으로 해석하였고, 이것을 [[삼국사기]][[신라]] [[북한산성]]으로 비정하였다.<ref>아차산성-시굴조사보고서, 2000, 205~207쪽, 212쪽.</ref> 7세기대 [[신라]] [[북한산성]]이 [[아차산성]]임이 유력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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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성산성]]에서는 608년에 제작된 목간에서 '南漢城'이 나오는데, 목간의 제작연대와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남한성은 이성산성을 지칭한 것임을 밝혀냈다. 결국 7세기에 들어서서 [[아차산성]]과 [[이성산성]]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산성|북한성]]과 [[이성산성|남한성]]으로서 각각 한강 이북과 이남의 거점성 역할을 했던 것이다.
  
  
  
  
위 기록에 따르면 북한산성은 603년 이전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
 
다.성벽의 다짐층 출토 토기와 다짐층 및 생활면 바닥에서 채취한 시
 
료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를 통해 성벽 축조연대의 범위를 6세기
 
후반으로 추정한 것도100)이와 부합한다.또한 고구려군이 603년에 신
 
라군과의 충돌 없이 북한산성까지 쳐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7세기 전
 
반 무렵까지 한강 이북에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방어성 구축이 마련되
 
지 않았음을 반증한다.이는 6세기 후반 한강 이북의 영역 변천양상에
 
대한 앞에서의 추정이 큰 틀에서 온당한 것이었음을 보완해 준다.
 
신라는 604년에 남천주를 폐지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101)
 
그 계기는 북한산성 전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그런데 진흥왕대 북한
 
산주의 중심치소가 북한산 일대였다면 604년에 재설치한 북한산주의
 
중심지는 이것과 다른 인상을 준다.‘북한산’의 관련지명이 아차산성에
 
서 출토되었고,이곳이 북한산성이라면 북한산주의 중심치소도 아차산
 
성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곧 7세기 초반 고구려가 아차산에 있었
 
던 북한산성을 공략해 오면서 이 일대가 방어상의 거점으로 부각되었
 
고,102)그에 따라 북한산주의 치소가 기존의 북한산에서 아차산으로 옮
 
겨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103)
 
이성산성의 3차 발굴 결과 A지구 1차 저수지에서 ‘戊辰年’간지가
 
묵서된 목간이 출토되었다.104)목간에는 전면과 측면 2차례에 걸쳐 ‘南
 
100)임효재・윤상덕,「峨嵯山城의 築造年代에 대하여」 淸溪史學 􀀠16・17,2002,
 
213쪽.
 
101) 三國史記 􀀠卷4,新羅本紀4,眞平王26년.
 
102)서영일도 604년 북한산주의 설치를 한강 유역 방어 거점이 한강 이남에서
 
이북으로 전진 배치된 조치로 이해하였다(서영일,앞의 논문,2010,132쪽).
 
103)임기환,앞의 논문,2002,25쪽.아차산성의 축조연대가 6세기 후반 이전으
 
로 소급하기 어려운 점도 557~568년 북한산주의 거점성을 북한산 일대로
 
볼 수밖에 없게 한다.
 
104)金秉模・沈光注, 二聖山城三次發掘調査報告書 ,漢陽大學校・京畿道,
 
1991,441~444쪽.발굴보고서에 소개된 목간 명문은 다음과 같다.“(전면)
 
戊辰年正月十二日朋南漢城道使…결락 /(측면)須城道使村主前南漢城□
 
□…결락 /(후면)□□蒲□□□□□□…결락.”이 목간에 대한 연구는 다
 
  
漢城’이 나온다.목간의 제작연대는 608년으로 보는 견해가 대세이
 
다.105)남한성은 이성산성을 지칭한 것이다.106)이성산성에서는 다량의
 
목간과 벼루가 출토되었다.이것은 곧 이곳에서 정치・외교・군사에 관
 
한 중요한 사실을 문서로 작성해 중앙에 보고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
 
였음을 시사한다.이성산성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군사・행
 
정의 중심 거점이었을 것이다.107)결국 7세기에 들어서서 아차산성과
 
이성산성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산)성과 남한성으로서 각각 한강
 
이북과 이남의 거점성 역할을 했을 법하다.그 과정에서 아차산성은 북
 
한산주의 중심치소로서 신라가 북방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거점 지역으로 부상했을 것이다.
 
2)
 
  
  
신라는 551~553년에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557년에 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이때 북한산주의 중심치소는 북한산 일대로 추정된다.진흥왕(540~576)은 이곳을 북한산주의 거점으로 삼아 북한산을 기점으로 양 방면의 교통로를 모두 감시・통제하는 효과를 기대했고,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巡狩를 갔다.진흥왕이 북한산 서남쪽에 순수비를 세운 것은 한강수로와 서해안의 제해권 장악 의도와 연관되어 있었다.신라는 북한산주의 설치・유지를 통해 경기만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신라가 564년 北齊에 단독으로 사신을 파견한 이후 지속적으로 남북조와 교류할 수 있었던 배경이 여기에 있었다.
 
  
603년 고구려 영양왕(590~618)은 신라 北漢山城을 기습하였다.전쟁의 결과는 진평왕(579~632)이 구원군 1만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함으로써 신라가 승리하였다.이때의 북한산성은 아차산성에서 ‘北漢’・‘漢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면서 아차산성임이 유력해졌다.신라는 604년에 남천주를 폐지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그런데 진흥왕대 북한산주의 중심지가 북한산 일대였다면,604년에 재설치한 북한산주의 중심지는 아차산성이었다.곧 7세기 초반 고구려가 아차산의 북한산성을 공략해 오면서 이 일대가 방어상의 거점 지역으로 부각되었고,그에 따라 북한산주의 치소를 북한산에서 아차산으로 옮겼다. 한편 이성산성에서는 608년에 제작된 목간에서 ‘南漢城’의 실체가 드러났다.결국 7세기에 들어서서 아차산성과 이성산성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산)성과 남한성으로서 각각 한강 이북과 이남의 거점성 역할을 했던 것이다.
 
  
  

2016년 6월 14일 (화) 13:25 판

북한산성아차산성

가을 8월에 고구려북한산성을 쳐들어왔다.왕이 몸소 군사 1만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막았다.
왕이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왕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오니,성안에서는 북치고 소리 지르며 서로 호응하였다. 고승은 저들이 많고 우리가 적다고 여겨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갔다.

두 사료는 고구려가 7세기 들어 신라를 공략하는 첫 기록이다. 고구려 영양왕(590~618)이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북한산성을 기습했고, 신라 진평왕(579~632)이 구원군 1만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에는 북한산성의 지리적 조건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곧 성이 한강 이북에 있었고, 그 위치도 성안에서 한강을 건너오는 장면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조망권이 담보되어 있다. 이는 현재 아차산성의 지리적 조건과 부합한다. 더구나 아차산성 시발굴조사 결과 ‘北’・‘北漢’・‘漢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발굴 보고서에서는 기와편을 같은 문장의 다른 부분으로 생각해 ‘北漢山□’으로 해석하였고, 이것을 삼국사기신라 북한산성으로 비정하였다.[2] 7세기대 신라 북한산성아차산성임이 유력해진 셈이다.

또한 이성산성에서는 608년에 제작된 목간에서 '南漢城'이 나오는데, 목간의 제작연대와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남한성은 이성산성을 지칭한 것임을 밝혀냈다. 결국 7세기에 들어서서 아차산성이성산성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성남한성으로서 각각 한강 이북과 이남의 거점성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도

아차산성 연지아차산성 우물지아차산성 동문지아차산성 장대지아차산성 남문지 배수시설아차산성 대형초석건물지아차산성 원형수혈유구아차산성 온돌 건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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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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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온돌 건물지 A는 B에 속한다 아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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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온돌 건물지 A는 B에서 조사되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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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온돌 건물지 A는 B에서 조사되었다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아차산성 온돌 건물지 A에서 B가 행해지다 아차산성 시발굴조사

갤러리

주석

  1. 문화재청 문화재검색 아차산성
  2. 아차산성-시굴조사보고서, 2000, 205~207쪽, 212쪽.
  3. 그림출처: 최종택, 「아차산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성과와 과제」, 『사총』, 제 81집, 2014, 15쪽.
  4. 그림출처: 최종택, 앞의 책, 2014a, 23쪽.
  5. 그림출처: 임효재 외, 앞의 책, 2000a, 283쪽.
  6. 그림출처: 임효재 외, 앞의 책, 2000a, 283쪽.
  7. 그림출처: 임효재 외, 앞의 책, 2000a, 283쪽.
  8. 그림출처: 임효재 외, 앞의 책, 2000a, 284쪽.
  9. 그림출처: 임효재 외, 앞의 책, 2000a, 284쪽.
  10. 그림출처: 임효재 외, 앞의 책, 2000a, 284쪽.
  11. 그림출처: 임효재 외, 앞의 책, 2000a, 296쪽.
  12. 그림출처: 임효재 외, 앞의 책, 2000a,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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