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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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과 아차산성
- 『삼국사기』 권제4, 신라본기 제8 진평왕25년.
가을 8월에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쳐들어왔다.왕이 몸소 군사 1만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막았다.
- 『삼국사기』 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14년.
왕이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왕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오니,성안에서는 북치고 소리 지르며 서로 호응하였다. 고승은 저들이 많고 우리가 적다고 여겨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갔다.
두 사료는 고구려가 7세기 들어 신라를 공략하는 첫 기록이다. 고구려 영양왕(590~618)이 장군 고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기습했고, 신라 진평왕(579~632)이 구원군 1만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에는 북한산성의 지리적 조건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곧 성이 한강 이북에 있었고, 그 위치도 성안에서 한강을 건너오는 장면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조망권이 담보되어 있다. 이는 현재 아차산성의 지리적 조건과 부합한다.
더구나 아차산성 시발굴조사 결과 ‘北’・‘北漢’・‘漢山□’의 글자가 새겨진 아차산성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 발굴 보고서에서는 기와편을 같은 문장의 다른 부분으로 생각해 ‘北漢山□’으로 해석하였고, 이것을 삼국사기의 신라 북한산성으로 비정하였다.[1] 7세기대 신라 북한산성이 아차산성임이 유력해진 셈이다.
또한 이성산성에서는 608년에 제작된 목간에서 '南漢城'이 나오는데, 목간의 제작연대와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남한성은 이성산성을 지칭한 것임을 밝혀냈다.
결국 7세기에 들어서서 아차산성과 이성산성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성과 남한성으로서 각각 한강 이북과 이남의 거점성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도
클래스
- 유적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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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 A는 B로 추정된다 | 아차산성 |
북한산성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삼국사기 |
북한산성 | A는 B와 관련된다 | 아차산성 명문기와 |
북한산성 | A는 B와 관련된다 | 고승 |
주석
- ↑ 아차산성-시굴조사보고서, 2000, 205~207쪽, 212쪽.
참고
장창은, 「아차산성을 둘러싼 삼국의 영역 변천」, 『사총』, 제 81집, 2014, 107-151쪽.
기여
- 김지선: 처음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