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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f43889>'''한글연구'''</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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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과 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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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2월 26일 갑오내각의 주선으로 귀국한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창간을 준비하면서 배재학당의 만국지지학 강사로 출강하고있었다. 이때 주시경은 서재필을 만나게 된다. 둘의 만남은 필연적이자 운명적이었다. 서재필이 새로 창간할 독립신문은 일반 민중과 부녀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국문전용으로 발행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고, 주시경은 서재필이 귀국하기 전부터 국문법을 연구했던 당시 유일무이한 국문전용론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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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은 서재필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자 회계사무 겸 교보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서재필의 국민 계몽운동을 지원하면서 국문전용, 국문 띄어쓰기, 쉬운 국어쓰기를 실천해 갔다. 그 결과 서재필과 주시경의 국민 계몽적 논설은 일반 민중과 부녀자층에게도 광범위하게 전파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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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은 그 해 5월 '국문동식회'를 <독립신문>사내에 조직하여 한글 연구와 보급의 단초를 열었다. 국문동식회는 독립신문을 제작함에 있어 맞춤법을 정리하고 통일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주시경의 한글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07년 1월 설립된 지석영 중심의 국문 연구회 그리고 1908년 8월 주시경이 국어강습회 졸업생들과 함께 조직한 국문연구회로 그 전통이 이어졌다. 나아가 이 전통은 일제시기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어연구회와 1931년 1월 확대 개편된 조선어학회, 해방 이후 한글학회로 계승되면서 한글 연구, 정리와 보급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독립운동'''===
 
==='''독립운동'''===

2019년 6월 17일 (월) 16:02 판



정의

조선의 국어학자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

내용

인물정보

  • 황해도 봉산 출생, 아버지는 주면석, 어머니는 전주이씨. 본관은 상주.
  • 조선 중기 풍기군수로서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13대손이다.
  • 둘째아들로 태어나 둘째 작은아버지인 주면진에게 입양되었다.
  •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1887년 6월 양아버지를 따라 상경한 후에도 한문학을 배웠다.
  • 한학을 배우며 한문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 글이 있는데 왜 이토록 어려운 한문만을 배워야 하며, 우리말을 쉽게 적을 수 있는 우리글은 왜 쓰지 않는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한글을 연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 1893년 6월 배재학당의 교수인 박세양과 정인덕을 찾아가 야학으로 신학문을 지도받기 시작하였다. 이들로 부터 문명 강대국은 모두 자기 나라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말을 듣고 자국어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할 무렵에 회계사 겸 교보원(교정보는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2]

시대적배경

  • 주시경은 개항되던 해인 1876년, 근대화 시기에 태어났다.(1876)
  • 근대화 시기의 왕실은 나름대로 근대화 조치를 강구하고, 보수적인 양반유생들은 위정척사사상으로 무장하여 조국을 수고했으며, 신진관료와 시민층은 개화와 개혁사상에 입각하여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 힘이 있는 자는 힘으로, 돈이 있는 자는 돈으로, 머리가 있는 자는 머리로,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으로, 노력하듯이 주시경은 한글 연구와 보급으로 역사적 과제 해결에 헌신했다.
  • 당시 외세의 침략으로 조국의 운명이 위태롭던 시기에 국어,국사 그리고 민족 문화는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담보물이었다. 민족은 공통의 언어 집단이고,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지닌 집단이며, 독자적 문화집단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 주시경은 "자기나라를 보존하며 자기 나라를 일으키는 길은 나라의 바탕을 굳세게 하는데 있고, 나라의 바탕을 굳세게 하는 길은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존중하여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어문 민족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3]

한글연구

  • 서재필과 주시경

1895년 12월 26일 갑오내각의 주선으로 귀국한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창간을 준비하면서 배재학당의 만국지지학 강사로 출강하고있었다. 이때 주시경은 서재필을 만나게 된다. 둘의 만남은 필연적이자 운명적이었다. 서재필이 새로 창간할 독립신문은 일반 민중과 부녀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국문전용으로 발행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고, 주시경은 서재필이 귀국하기 전부터 국문법을 연구했던 당시 유일무이한 국문전용론자였기 때문이다.

주시경은 서재필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자 회계사무 겸 교보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서재필의 국민 계몽운동을 지원하면서 국문전용, 국문 띄어쓰기, 쉬운 국어쓰기를 실천해 갔다. 그 결과 서재필과 주시경의 국민 계몽적 논설은 일반 민중과 부녀자층에게도 광범위하게 전파될 수 있었다.

주시경은 그 해 5월 '국문동식회'를 <독립신문>사내에 조직하여 한글 연구와 보급의 단초를 열었다. 국문동식회는 독립신문을 제작함에 있어 맞춤법을 정리하고 통일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주시경의 한글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07년 1월 설립된 지석영 중심의 국문 연구회 그리고 1908년 8월 주시경이 국어강습회 졸업생들과 함께 조직한 국문연구회로 그 전통이 이어졌다. 나아가 이 전통은 일제시기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어연구회와 1931년 1월 확대 개편된 조선어학회, 해방 이후 한글학회로 계승되면서 한글 연구, 정리와 보급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독립운동

  •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


일화

  • '주보따리'


  • 어록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 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국어문전음학(1908)] 중에서-


멀티미디어

이미지

주시경2.jpg

▲국립한글박물관, 2017

동영상

참고문헌

기여

주석

  1. 네이버 인물검색
  2. 두산백과네이버캐스트 참조
  3. 네이버캐스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