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명륜당(明倫堂)"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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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big>萬古明倫屹一'''堂''' (<small>만고명륜흘일'''당'''</small>) 만고의 명륜당이 큰 집으로 솟아있고, <br />槐風杏雨入淸'''凉''' (<small>괴풍행우입청'''량'''</small>) 느티 바람 은행 비는 청량함이 들게 한다.<br />敬推東岳經營意 (<small>구추동악경영의</small>) 동악 선생 경영한 뜻 미루어 생각하니,<br />牖我靑衿趣向'''方''' (<small>유아청금취향'''방'''</small>) 우리 유생 나아갈 방향을 열어 주었네. <br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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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는 다음과 같다. | ○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는 다음과 같다. | ||
− | 고을에는 으레 명륜당이 있지마는( | + | |
− | 학교만은 황량하다네.( | + | 郡邑明倫例有'''堂''' (군읍명륜례유'''당''') 고을에는 으레 명륜당이 있지마는 <br />江都廟學獨荒'''凉''' (강도묘학독황'''량''') 강도의 사당과 학교만은 황량하다네.<br />禮樂詩書遵四術 (예악시서준사술) 예악과 시서는 사서를 따르고 <br />君臣父子樹三'''綱''' (군신부자수삼'''강''') 군신과 부자는 삼강을 세웠다네. <br />損貲敢愛鳩財用 (손자감애구재용) 재물을 기증하여 터전을 마련하고 <br />闕制堪羞養四'''方''' (궐제감수양사'''방''') 대궐의 제도대로 사방 인재 양성하네. <br />白頭老守經營意 (백두로수경영의) 흰머리 노인은 경영할 뜻 지키고<br />說如靑衿戒或'''忘''' (설여청금계혹'''망''') 혹시라도 선비들이 잊을까 경계하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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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물을 기증하여 터전을 마련하고( | + | ○ [[명륜당창건비명(明倫堂創建碑銘)]]은 판관 이중명(李重溟)이 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
− | 사방 인재 양성하네.( | + | |
− | + | 지금 임금님이 즉위하신 지 5년 정묘년(1627)에 임금님께서 강도에 행차하시니 선비 심숙(沈諔) 등이 하소연하되, ʻ본부의 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부윤(府尹)이 되었을 때에, 몸가짐이 청렴하고, 백성에게 은혜로움이 많았고, 직무에 임하심이 분명했고, 일을 처리함이 부지런하셨다ʼ 하니, 임금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이때에 본 강화부가 국가의 방어에 중요한 땅이라 하여 부윤을 격상하여 유수(留守)로 삼았다. 전 유수가 체임한 뒤로, 조정의 논의가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어렵다하여 이공을 으뜸으로 추천하나 아직 수습 기용되지 못했다고 계청하니, 임금이 말씀하되, ʻ이안눌이 전에도 소문난 치적이 있어 내가 아름다이 여겼으니, 지금 다시 임용함이 옳다ʼ 하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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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명륜당창건비명(明倫堂創建碑銘)은 판관 이중명(李重溟)이 | + | 공이 목욕재계하고 일을 살피면서 이르되, ʻ임금의 사랑이 심히 중한데 감히 힘쓰지 않으랴ʼ 하다. 하루는 공자의 사당을 알현하고 물러나 모든 생도에게 가서 이르되, ʻ강화부는 이름을 격상했는데, 공자의 사당에 명륜당(明倫堂)이 없으니, 나는 인재를 잃어 유교가 소홀해질까 두렵다ʼ 하고는 이에 사당의 남쪽에 짓기로 하고 유생 안종도(安宗道) 등에게 일을 독려하게 하여 전당(殿堂)과 실방(室房)이 각기 법도를 얻으니, 전당이 격식을 갖추어 아름다우나 사치스럽지 않다. 학생과 선생에게 방이 있고 주방과 창고가 차서가 있어, 모든 칸수가 48칸이다. 당이 이루어지자 술을 마시며 즐거워 하니, 어느 선비가 술잔을 들고 이르되, ʻ인류가 있은 이후로 공자의 시대보다 융성한 때가 없었은즉 공자의 끼친 풍교를 우러름이 이에 있지 아니한가. 더구나 건축을 경영함에 있어 관가의 재정을 허비하지 않으며 백성의 힘을 아껴, 철차를 줄여 꾸미면서 여러 방면을 주선하니 공의 민첩한 처사가 아니면 어떻게 이에 이르렀겠는가ʼ 한다. |
− | + | 완산(完山) 이중명(李重溟)이 대중에게 이르되, ʻ오늘의 세대가 성명한 군주를 만났고, 이 강화부는 우리 공을 만나 모든 선비가 이 명륜당으로부터 오륜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삼강의 진리를 밝혀, 세상이 태평하면 예와 악을 배워 우리 민생을 풍족히 하고 국가가 불행할 때는 아들은 효도로 죽고, 신하는 충성으로 죽으리니, 오! 우리 많은 선비들이여 어찌 스스로 힘쓰지 않겠나ʼ 하니 모두가 재배하며 머리를 조아려 ʻ그렇다ʼ 한다. | |
− | 지금 임금님이 즉위하신 지 5년 정묘년(1627)에 임금님께서 | + | |
− | + | 오! 성상께서 현명한 이를 선택하고 유능한 이에게 맡겨, 우리 공이 당을 짓고 가르침을 세웠음이 모두가 간격이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모든 선비들이 공을 위해 비를 세움은 성상을 위함이고 공자를 위함이다. 여러 선비들이 공을 위한 정성도 오! 가상한 일이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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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공은 덕수이씨(德水李氏)이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지조가 있으며 여가의 일로 문장을 하니 늙을수록 건장 강경하여 사람들을 위해 교육을 일으킴은 더구나 평소에 쌓여진 포부이다. 명(銘)을 짓되, “드높은 그 집이여 공이 경영한 바이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 있음이여 많은 선비 평안한 바이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이에 갈고 다듬고 이에 노래하고 익히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이름을 회고하고 의를 생각하여 우리 선비 많이 기르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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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았다. 전 유수가 체임한 뒤로, 조정의 논의가 거기에 합당한 | + | ○[[≪명륜당중수록(明倫堂重修錄)≫]]은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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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전현감 교수 석지형(石之珩)167)이 부임하여 학궁(學宮)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서쪽으로 50보쯤 떨어져 집을 짓고 예전의 강당을 이전하여 연이어 강당을 축조하였다. 재내(齋內) 에는 강당이 없고 마침 성전(聖殿) 안에 물린 기와와 자재가 있었기 때문에 성전이 준공되었다. 공장(工匠)을 동원하니 강당의 옛터에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엮어 뒤터에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이때 도유사(都有司)와 재임(齋任) 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 | 있어 내가 아름다이 여겼으니, 지금 다시 임용함이 옳다ʼ 하셨다. | + | |
− | 공이 목욕재계하고 일을 살피면서 이르되, ʻ임금의 사랑이 심히 | + | “각읍 향교의 위전은 고을의 크기, 농지의 수가 법전에 수록되어 있다. 강도(江都)의 학교 위전(位田)은 만력 20년(1592) 임진왜란 이후에 전복(典僕)의 무리들이 훔쳐 팔았다. 또 고려가 강도로 들어와 병화(兵火)를 피한 39년에 볼음도(甫音島)로 학교의 위전을 옮겼으니 5결은 본도에 있으며 도행장(導行帳, 농지세에 관한 장부)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임진년 큰 난리를 겪은 후에 이 섬의 백성들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대부 등이 여러 번 정문(呈文)을 보냈으나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먼저 담장 밖에 빼앗긴 전지를 환수하고, 다음으로 볼음도에 점유된 위전을 환수하기로 하였다.” |
− | + | ||
− | + |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지내는 날에 도유사 등 35인이 유상(留相)민공(閔公)에게 글을 올렸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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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엎드려 생각하건대, 학교를 세우면 반드시 위지(位地)가 있어야 하고 위지가 있고서야 그러한 뒤에 반드시 위답(位畓)이 있으며, 위답이 있고서야 그러한 뒤에 예모(禮貌)가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본부의 문묘(文廟)는 담장 아래로 4면이 모두 경작지로 옛날부터 노비 등이 대를 이어 전해서 자기의 소유물과 동일시하여 농사지어 선비를 양성하였습니다. 임진년에 병화(兵禍)가 잇따르고 계축년·갑인년에 기근이 이어졌습니다. 이때 노비를 담당한 관리들이 헐값으로 팔아치워 여러 해가 지난데다가, 팔고 되팔고 하여 문서가 이뤄지고 해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어 그렇게 내려오던 폐단들 하루아침에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명륜당(明倫堂)을 짓고서도 구차하게 좁은 땅을 빌리자니 뜰에서는 생도(生徒)가 예를 행할 수 없고 문에서는 똑바로 갈 수가 없어서 사람들 모두가 애통해 하면서도 고쳐보고자 하지만 힘이 부칩니다. 지금의 문묘는 개축하고 길을 남쪽으로 곧게 내어 담장 밖의 빼앗긴 경작지를 학교의 위전으로 환원하여 소 | |
− | + | 속시키고 사방을 터서 정면을 바르게 하며 명륜당을 개축하여 시선을 높이는 것은 비단 여러 선비들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역시 국가에도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문묘의 터전과 위전의 규모는 모두 법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합하(閤下)께서는 특별히 영원히 행해질 정사를 펴시기 바랍니다. 전후로 이뤄진 소송이나 문건 등을 살피고 판단하여 먼저 곧은 길을 내고 그러한 뒤에 명륜당을 개축하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삼가 몸가짐을 바로해서 아룁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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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성의 힘을 아껴, 철차를 줄여 꾸미면서 여러 방면을 주선하니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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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산(完山) 이중명(李重溟)이 대중에게 이르되, ʻ오늘의 세대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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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륜당으로부터 오륜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삼강의 진리를 밝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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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많은 선비들이여 어찌 스스로 힘쓰지 않겠나ʼ 하니 모두가 재배하며 | + | |
− | 머리를 조아려 ʻ그렇다ʼ 한다. | + | |
− | 오! 성상께서 현명한 이를 선택하고 유능한 이에게 맡겨, 우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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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함이다. 여러 선비들이 공을 위한 정성도 오! 가상한 일이도다. | + | |
− | 공은 덕수이씨(德水李氏)이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지조가 있으며 | + | |
− | 여가의 일로 문장을 하니 늙을수록 건장 강경하여 사람들을 위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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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듬고 이에 노래하고 익히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이름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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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명륜당중수록(明倫堂重修錄) | + | |
− | 전현감 교수 석지형(石之珩)167)이 부임하여 학궁(學宮)의 임무를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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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하였다. 서쪽으로 50보쯤 떨어져 집을 짓고 예전의 강당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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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전(聖殿) 안에 물린 기와와 자재가 있었기 때문에 성전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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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엮어 뒤터에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이때 도유사(都有司)와 재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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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읍 향교의 위전은 고을의 크기, 농지의 수가 법전에 수록되어 | + | |
− | 있다. 강도(江都)의 학교 위전(位田)은 만력 20년(1592) 임진왜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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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화(兵火)를 피한 39년에 볼음도(甫音島)로 학교의 위전을 옮겼으니 | + | |
− | 5결은 본도에 있으며 도행장(導行帳, 농지세에 관한 장부)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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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성들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대부 등이 여러 번 정문(呈文)을 | + | |
− | 보냈으나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먼저 담장 밖에 빼앗긴 전지를 | + | |
− | 환수하고, 다음으로 볼음도에 점유된 위전을 환수하기로 하였다.” | + | |
− |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지내는 날에 도유사 등 35인이 유상(留相) | + | |
− | 민공(閔公)에게 글을 올렸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 + | |
− | “엎드려 생각하건대, 학교를 세우면 반드시 위지(位地)가 있어야 | + | |
− | 하고 위지가 있고서야 그러한 뒤에 반드시 위답(位畓)이 있으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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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이 대를 이어 전해서 자기의 소유물과 동일시하여 농사지어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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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어 그렇게 내려오던 폐단들 하루아침에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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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좁은 땅을 빌리자니 뜰에서는 생도(生徒)가 예를 행할 수 없고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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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곧게 내어 담장 밖의 빼앗긴 경작지를 학교의 위전으로 환원하여 소 | + | |
− | 속시키고 사방을 터서 정면을 바르게 하며 명륜당을 개축하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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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합하(閤下)께서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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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서는 다음과 같다. | 답변서는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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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설령 학교의 위전이 백성들에게 잘못 편입되었더라도 경작지의 일은 이미 60년 전의 일이라서 지금에 와서 반환하라고 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않은 듯하다. 다른 전지로 바꾸는 것이 ʻ공사(公私)가 모두 편하다ʼ라고 하는 것이다. 살펴서 시행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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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러므로 그날로 반값으로 바꿔 수노와 정생을 환속시키고 학교 위전의 문건을 완성하여 비치하고서야 그러한 뒤에 정면의 길이 곧아지고 남쪽 밖 대문 3칸이 새로 지어졌으며 명륜당이 거듭 수리되고 강당이 수리, 단장되었다. 일을 시작한 이듬해 봄 2월 13일에 도유사·재임이 자재와 기와를 살펴 감독하였다. 매매하던 쌀과 베가 남아있는 것이 없게 되고 교수가 혁파되었기 때문에 집이 훼손되었다. 부족한 것을 메워 수리하였다. 일을 마친 것은 대체로 5월 3일이었다. 일꾼의 경우에는 김경력(金經歷)이 역군(役軍) 235명을 부조하고 유도사(柳都事)가 역군 195명을 부조했으며 서재(西齋)의 유림 303명이 각각 노비 3명씩을 부조했으니 모두 1,339명이었다. 명륜당은 거듭 새로워지고 사방을 텄으며 정면의 길은 똑바르게 하고 남향을 시원스럽게 만들었으며 시선을 높게하도록 하였다. 아! 아름답구나. | |
+ | ==기행지도== | ||
+ | <googlemap width="800" height="570" lat="37.746287" lon="126.488011" type= "normal" zoom="13.9" icon="http://maps.google.com/mapfiles/marker.p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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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00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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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 37.733851, 126.476067, [[52. 남산동(南山洞_수록암)]] 현 강화읍 화성길 | ||
+ | (B) 37.739427, 126.482456, [[53. 구춘당(九春堂*)]] 현 강화읍 남산리 산21 | ||
+ | (C) 37.738121, 126.482706, [[54. 청송심씨(靑松沈氏*)]] 현 강화읍 부조고개길 | ||
+ | (D) 37.742052, 126.487058, [[55. 부내12동(府內12洞*)]] 현 강화읍 남문로 | ||
+ | (E) 37.734451, 126.516065, [[56. 진보 돈대(鎭堡墩臺*)]] 현 강화읍 갑곳리 갑곶돈대 | ||
+ | (F) 37.744102, 126.487152, [[57. 충신 이춘일(李春一*)]] 강화산성남문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일원 | ||
+ | (G) 37.739253, 126.474012, [[58. 남대제월(南臺霽月)]]강화읍 남산리 남산 | ||
+ | (H) 37.747762, 126.476693, [[59. 서문동(西門洞)]]강화읍 신문리 621-4 연무당 옛터 | ||
+ | (I) 37.741810, 126.459236, [[60. 국정동(國淨洞)]] 현 강화읍 국화리 349-2 | ||
+ | (J) , [[61. 맥현제단(麥峴祭壇)]] 현 | ||
+ | (K) , [[62. 사직단(社稷壇)]] | ||
+ | (L) 37.754031, 126.477765, [[63. 문묘(文廟)]] 현 강화읍 관청리 936-1 강화향교내 대성전 | ||
+ | (M) 37.753860, 126.478324, [[64. 명륜당(明倫堂)]] 현 향교길 강화군 강화읍 강화향교 | ||
+ | (N) 37.754014, 126.478194, [[65. 강당(講堂) 안연재(安燕齋)]] 현 강화읍 관청리 936-3 | ||
+ | (O) 37.755553, 126.482822, [[66. 북문(北門)]] 강화산성북문 강화읍 국화리 산3 | ||
+ | (P) 37.763184, 126.484513, [[67. 여제단(厲祭壇)]]?? 현 강화읍 대산리 1195 | ||
+ | (Q) 37.759656, 126.476231, [[68. 당주동(唐州洞)]] 현 강화군 송해면 당골길 | ||
+ | </googlemap> | ||
==인물== | ==인물== | ||
− | * | + | * 석지형(1610년 출생) 본관은 화원(花園). 자는 숙진(叔珍), 호는 수현(壽峴). |
==참고== | ==참고== |
2019년 5월 5일 (일) 15:26 기준 최신판
萬古明倫屹一堂 (만고명륜흘일당) 만고의 명륜당이 큰 집으로 솟아있고,
槐風杏雨入淸凉 (괴풍행우입청량) 느티 바람 은행 비는 청량함이 들게 한다.
敬推東岳經營意 (구추동악경영의) 동악 선생 경영한 뜻 미루어 생각하니,
牖我靑衿趣向方 (유아청금취향방) 우리 유생 나아갈 방향을 열어 주었네.
○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는 다음과 같다.
郡邑明倫例有堂 (군읍명륜례유당) 고을에는 으레 명륜당이 있지마는
江都廟學獨荒凉 (강도묘학독황량) 강도의 사당과 학교만은 황량하다네.
禮樂詩書遵四術 (예악시서준사술) 예악과 시서는 사서를 따르고
君臣父子樹三綱 (군신부자수삼강) 군신과 부자는 삼강을 세웠다네.
損貲敢愛鳩財用 (손자감애구재용) 재물을 기증하여 터전을 마련하고
闕制堪羞養四方 (궐제감수양사방) 대궐의 제도대로 사방 인재 양성하네.
白頭老守經營意 (백두로수경영의) 흰머리 노인은 경영할 뜻 지키고
說如靑衿戒或忘 (설여청금계혹망) 혹시라도 선비들이 잊을까 경계하네.
○ 명륜당창건비명(明倫堂創建碑銘)은 판관 이중명(李重溟)이 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지금 임금님이 즉위하신 지 5년 정묘년(1627)에 임금님께서 강도에 행차하시니 선비 심숙(沈諔) 등이 하소연하되, ʻ본부의 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부윤(府尹)이 되었을 때에, 몸가짐이 청렴하고, 백성에게 은혜로움이 많았고, 직무에 임하심이 분명했고, 일을 처리함이 부지런하셨다ʼ 하니, 임금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이때에 본 강화부가 국가의 방어에 중요한 땅이라 하여 부윤을 격상하여 유수(留守)로 삼았다. 전 유수가 체임한 뒤로, 조정의 논의가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어렵다하여 이공을 으뜸으로 추천하나 아직 수습 기용되지 못했다고 계청하니, 임금이 말씀하되, ʻ이안눌이 전에도 소문난 치적이 있어 내가 아름다이 여겼으니, 지금 다시 임용함이 옳다ʼ 하셨다.
공이 목욕재계하고 일을 살피면서 이르되, ʻ임금의 사랑이 심히 중한데 감히 힘쓰지 않으랴ʼ 하다. 하루는 공자의 사당을 알현하고 물러나 모든 생도에게 가서 이르되, ʻ강화부는 이름을 격상했는데, 공자의 사당에 명륜당(明倫堂)이 없으니, 나는 인재를 잃어 유교가 소홀해질까 두렵다ʼ 하고는 이에 사당의 남쪽에 짓기로 하고 유생 안종도(安宗道) 등에게 일을 독려하게 하여 전당(殿堂)과 실방(室房)이 각기 법도를 얻으니, 전당이 격식을 갖추어 아름다우나 사치스럽지 않다. 학생과 선생에게 방이 있고 주방과 창고가 차서가 있어, 모든 칸수가 48칸이다. 당이 이루어지자 술을 마시며 즐거워 하니, 어느 선비가 술잔을 들고 이르되, ʻ인류가 있은 이후로 공자의 시대보다 융성한 때가 없었은즉 공자의 끼친 풍교를 우러름이 이에 있지 아니한가. 더구나 건축을 경영함에 있어 관가의 재정을 허비하지 않으며 백성의 힘을 아껴, 철차를 줄여 꾸미면서 여러 방면을 주선하니 공의 민첩한 처사가 아니면 어떻게 이에 이르렀겠는가ʼ 한다. 완산(完山) 이중명(李重溟)이 대중에게 이르되, ʻ오늘의 세대가 성명한 군주를 만났고, 이 강화부는 우리 공을 만나 모든 선비가 이 명륜당으로부터 오륜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삼강의 진리를 밝혀, 세상이 태평하면 예와 악을 배워 우리 민생을 풍족히 하고 국가가 불행할 때는 아들은 효도로 죽고, 신하는 충성으로 죽으리니, 오! 우리 많은 선비들이여 어찌 스스로 힘쓰지 않겠나ʼ 하니 모두가 재배하며 머리를 조아려 ʻ그렇다ʼ 한다.
오! 성상께서 현명한 이를 선택하고 유능한 이에게 맡겨, 우리 공이 당을 짓고 가르침을 세웠음이 모두가 간격이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모든 선비들이 공을 위해 비를 세움은 성상을 위함이고 공자를 위함이다. 여러 선비들이 공을 위한 정성도 오! 가상한 일이도다.
공은 덕수이씨(德水李氏)이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지조가 있으며 여가의 일로 문장을 하니 늙을수록 건장 강경하여 사람들을 위해 교육을 일으킴은 더구나 평소에 쌓여진 포부이다. 명(銘)을 짓되, “드높은 그 집이여 공이 경영한 바이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 있음이여 많은 선비 평안한 바이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이에 갈고 다듬고 이에 노래하고 익히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이름을 회고하고 의를 생각하여 우리 선비 많이 기르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명륜당중수록(明倫堂重修錄)≫은 다음과 같다.
전현감 교수 석지형(石之珩)167)이 부임하여 학궁(學宮)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서쪽으로 50보쯤 떨어져 집을 짓고 예전의 강당을 이전하여 연이어 강당을 축조하였다. 재내(齋內) 에는 강당이 없고 마침 성전(聖殿) 안에 물린 기와와 자재가 있었기 때문에 성전이 준공되었다. 공장(工匠)을 동원하니 강당의 옛터에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엮어 뒤터에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이때 도유사(都有司)와 재임(齋任) 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각읍 향교의 위전은 고을의 크기, 농지의 수가 법전에 수록되어 있다. 강도(江都)의 학교 위전(位田)은 만력 20년(1592) 임진왜란 이후에 전복(典僕)의 무리들이 훔쳐 팔았다. 또 고려가 강도로 들어와 병화(兵火)를 피한 39년에 볼음도(甫音島)로 학교의 위전을 옮겼으니 5결은 본도에 있으며 도행장(導行帳, 농지세에 관한 장부)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임진년 큰 난리를 겪은 후에 이 섬의 백성들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대부 등이 여러 번 정문(呈文)을 보냈으나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먼저 담장 밖에 빼앗긴 전지를 환수하고, 다음으로 볼음도에 점유된 위전을 환수하기로 하였다.”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지내는 날에 도유사 등 35인이 유상(留相)민공(閔公)에게 글을 올렸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학교를 세우면 반드시 위지(位地)가 있어야 하고 위지가 있고서야 그러한 뒤에 반드시 위답(位畓)이 있으며, 위답이 있고서야 그러한 뒤에 예모(禮貌)가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본부의 문묘(文廟)는 담장 아래로 4면이 모두 경작지로 옛날부터 노비 등이 대를 이어 전해서 자기의 소유물과 동일시하여 농사지어 선비를 양성하였습니다. 임진년에 병화(兵禍)가 잇따르고 계축년·갑인년에 기근이 이어졌습니다. 이때 노비를 담당한 관리들이 헐값으로 팔아치워 여러 해가 지난데다가, 팔고 되팔고 하여 문서가 이뤄지고 해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어 그렇게 내려오던 폐단들 하루아침에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명륜당(明倫堂)을 짓고서도 구차하게 좁은 땅을 빌리자니 뜰에서는 생도(生徒)가 예를 행할 수 없고 문에서는 똑바로 갈 수가 없어서 사람들 모두가 애통해 하면서도 고쳐보고자 하지만 힘이 부칩니다. 지금의 문묘는 개축하고 길을 남쪽으로 곧게 내어 담장 밖의 빼앗긴 경작지를 학교의 위전으로 환원하여 소 속시키고 사방을 터서 정면을 바르게 하며 명륜당을 개축하여 시선을 높이는 것은 비단 여러 선비들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역시 국가에도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문묘의 터전과 위전의 규모는 모두 법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합하(閤下)께서는 특별히 영원히 행해질 정사를 펴시기 바랍니다. 전후로 이뤄진 소송이나 문건 등을 살피고 판단하여 먼저 곧은 길을 내고 그러한 뒤에 명륜당을 개축하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삼가 몸가짐을 바로해서 아룁니다.”
답변서는 다음과 같다.
“설령 학교의 위전이 백성들에게 잘못 편입되었더라도 경작지의 일은 이미 60년 전의 일이라서 지금에 와서 반환하라고 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지 않은 듯하다. 다른 전지로 바꾸는 것이 ʻ공사(公私)가 모두 편하다ʼ라고 하는 것이다. 살펴서 시행하라.”
그러므로 그날로 반값으로 바꿔 수노와 정생을 환속시키고 학교 위전의 문건을 완성하여 비치하고서야 그러한 뒤에 정면의 길이 곧아지고 남쪽 밖 대문 3칸이 새로 지어졌으며 명륜당이 거듭 수리되고 강당이 수리, 단장되었다. 일을 시작한 이듬해 봄 2월 13일에 도유사·재임이 자재와 기와를 살펴 감독하였다. 매매하던 쌀과 베가 남아있는 것이 없게 되고 교수가 혁파되었기 때문에 집이 훼손되었다. 부족한 것을 메워 수리하였다. 일을 마친 것은 대체로 5월 3일이었다. 일꾼의 경우에는 김경력(金經歷)이 역군(役軍) 235명을 부조하고 유도사(柳都事)가 역군 195명을 부조했으며 서재(西齋)의 유림 303명이 각각 노비 3명씩을 부조했으니 모두 1,339명이었다. 명륜당은 거듭 새로워지고 사방을 텄으며 정면의 길은 똑바르게 하고 남향을 시원스럽게 만들었으며 시선을 높게하도록 하였다. 아! 아름답구나.
기행지도
인물
- 석지형(1610년 출생) 본관은 화원(花園). 자는 숙진(叔珍), 호는 수현(壽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