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륜당창건비명(明倫堂創建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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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明倫堂創建碑銘 判官 李重溟 撰曰 :

今 ]卽位之五年 ]啓七年丁卯, ]駕幸江都, 有士人沈諔等陳疏以本府尹李公安訥爲府尹時, 其律身也廉, 其惠民也博, 其莅事也勤, 爲辭, ]頗嘉納焉. 是時本府保障重地, 陞府尹爲留守. 故前留守遆任後, 廟議方 難其人擬以李公首薦而未蒙收敍爲啓, ]曰: “李安訥前有聲績, 予其嘉 之, 今其再臨可矣.”

公乃齋(袚?)視事曰, “ ]眷甚重 其敢不力!” 一日嘗謁 ]子廟退而進諸生曰: “府而陞號而孔廟無明倫堂, 吾懼人材放失而儒敎(??)也.” 迺營 ]廟之南命儒生安宗道等董其役, 殿堂室房各得其度, (鳥??)翬飛, 美而不侈. 生師有舍, 庖廩有次, 凡爲間架四十有八. 堂成飮而(落)之士有執爵而言者曰: “自生民以來未有盛於夫子, 則仰夫子遺風不在(前?)乎! 況營建不費官財不借民力, 縮節裘飪多方措辦, 非公幹敏何以致此!” 完山李重溟言于衆曰: “今代遭 ]明, 此府得我公, 俾多士由此堂, 踐五典之敎, 明五綱之道, 世治則譚禮樂以陶吾民, 不幸則子死孝而臣死忠, 嗟! 我多士盍亦自勗!” 皆再拜稽首曰“然.”

嗚呼! 聖上之擇賢授能, 我公之建堂立敎, 皆已無間, 則多士之爲公竪碑者, 爲 ]上也, 爲夫子也. 多士爰公之誠, 吁! 亦可尙也.

()公德水人. 爲人廉潔有志操, 餘事文章, 老健蒼勁, 作人興敎尤所平日所蓄積也. (系以?)以銘, 銘曰 : “有覺其楹, 君子攸營, 于嗟乎公! 有噦其冥, 多士攸寧, 吁嗟乎公! 於斯琢磨, 於斯絃歌, 吁嗟乎公! 顧名思義, 作我多士, 吁嗟乎公!”

번역

명륜당창건비명(明倫堂創建碑銘)은 판관 이중명(李重溟)이 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지금 임금님이 즉위하신 지 5년 정묘년(1627)에 임금님께서 강도에 행차하시니 선비 심숙(沈諔) 등이 하소연하되, ʻ본부의 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부윤(府尹)이 되었을 때에, 몸가짐이 청렴하고, 백성에게 은혜로움이 많았고, 직무에 임하심이 분명했고, 일을 처리함이 부지런하셨다ʼ 하니, 임금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이때에 본 강화부가 국가의 방어에 중요한 땅이라 하여 부윤을 격상하여 유수(留守)로 삼았다. 전 유수가 체임한 뒤로, 조정의 논의가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어렵다하여 이공을 으뜸으로 추천하나 아직 수습 기용되지 못했다고 계청하니, 임금이 말씀하되, ʻ이안눌이 전에도 소문난 치적이 있어 내가 아름다이 여겼으니, 지금 다시 임용함이 옳다ʼ 하셨다.

공이 목욕재계하고 일을 살피면서 이르되, ʻ임금의 사랑이 심히 중한데 감히 힘쓰지 않으랴ʼ 하다. 하루는 공자의 사당을 알현하고 물러나 모든 생도에게 가서 이르되, ʻ강화부는 이름을 격상했는데, 공자의 사당에 명륜당(明倫堂)이 없으니, 나는 인재를 잃어 유교가 소홀해질까 두렵다ʼ 하고는 이에 사당의 남쪽에 짓기로 하고 유생 안종도(安宗道) 등에게 일을 독려하게 하여 전당(殿堂)과 실방(室房)이 각기 법도를 얻으니, 전당이 격식을 갖추어 아름다우나 사치스럽지 않다. 학생과 선생에게 방이 있고 주방과 창고가 차서가 있어, 모든 칸수가 48칸이다. 당이 이루어지자 술을 마시며 즐거워 하니, 어느 선비가 술잔을 들고 이르되, ʻ인류가 있은 이후로 공자의 시대보다 융성한 때가 없었은즉 공자의 끼친 풍교를 우러름이 이에 있지 아니한가. 더구나 건축을 경영함에 있어 관가의 재정을 허비하지 않으며 백성의 힘을 아껴, 철차를 줄여 꾸미면서 여러 방면을 주선하니 공의 민첩한 처사가 아니면 어떻게 이에 이르렀겠는가ʼ 한다. 완산(完山) 이중명(李重溟)이 대중에게 이르되, ʻ오늘의 세대가 성명한 군주를 만났고, 이 강화부는 우리 공을 만나 모든 선비가 이 명륜당으로부터 오륜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삼강의 진리를 밝혀, 세상이 태평하면 예와 악을 배워 우리 민생을 풍족히 하고 국가가 불행할 때는 아들은 효도로 죽고, 신하는 충성으로 죽으리니, 오! 우리 많은 선비들이여 어찌 스스로 힘쓰지 않겠나ʼ 하니 모두가 재배하며 머리를 조아려 ʻ그렇다ʼ 한다.

오! 성상께서 현명한 이를 선택하고 유능한 이에게 맡겨, 우리 공이 당을 짓고 가르침을 세웠음이 모두가 간격이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모든 선비들이 공을 위해 비를 세움은 성상을 위함이고 공자를 위함이다. 여러 선비들이 공을 위한 정성도 오! 가상한 일이도다.

공은 덕수이씨(德水李氏)이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지조가 있으며 여가의 일로 문장을 하니 늙을수록 건장 강경하여 사람들을 위해 교육을 일으킴은 더구나 평소에 쌓여진 포부이다. 명(銘)을 짓되, “드높은 그 집이여 공이 경영한 바이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 있음이여 많은 선비 평안한 바이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이에 갈고 다듬고 이에 노래하고 익히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이름을 회고하고 의를 생각하여 우리 선비 많이 기르니 오! 감탄한다, 공이여.”

주석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