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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ref>[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ref>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 + |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ref>[http://news.donga.com/BestClick/3/all/20080306/8552055/1#csidx1a0490c79a33a9a82e1bcc47f8d50ec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ref>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ref>당시 현재의 국악을 아악이라고 지칭하였다.</ref>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ref>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0쪽</ref>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font color='green'><b>국악보급</b></font>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ref>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28쪽</ref> [[이복길(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ref>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ref>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문교부 편수국에 들어가 교과서 편찬의 일을 맡았고, 중앙방송국에서 국악감상 프로그램의 해설자로 활동<ref>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0쪽</ref> 하였다. 그 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ref>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40권, 2012, 362쪽</ref>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ref>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한국음악사학보』제18집, 1997, 64쪽</ref>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국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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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 *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 ||
+ | *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 ||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 ||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
2017년 6월 26일 (월) 22:11 기준 최신판
개요
성경린(成慶麟, 관제, 1911.9.18~2008.3.5)는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국악인이다.
기본 정보
- 이름 = 성경린(成慶麟)
- 아호 = 관제
- 전공 = 거문고
- 출생지 = 서울시
- 출생-사망 = 1911-2008
음악활동
고인은 생전 스스로의 삶에 대해 “풍류의 정신으로 자연에 맡기고 노을에 띄운 채 애처로운 가락으로 살아온 일생”이라며 “국악을 하려면 아주 파묻혀 이것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한다”[1] 그의 자서전의 제목도 '노을에 띄운 가락'으로 그는 평생을 풍류정신으로 무장하여 국악과 함께 살았다. 그의 회고록의 제목인 '다시 태어나도 아악[2]의 길로'라는 제목을 보아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느껴진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어느날 친척한분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시험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집이 가난하여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고, 이 학교에서 아는바가 없었지만 공부를 공짜로 시켜주고, 게다가 돈까지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3] 그러한 계기로 아악의 길로 들어온 그는 한 평생 국악을 위해 인생을 바치셨다. 광복 후 국악의 단절 위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국악보급를 통해 국악이 전승되도록 힘썼다. 해방직후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바뀌었고, 당시 당국의 제도의 미비로 인한 경제적 궁핍으로 근근히 명백만 이어져 오고 있었다.[4] 이복길(주환)과 함께 해방직후 '雅樂部國營에 關한 請願'을 제출하였고, 이 청원서가 받아들여져 1951년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치라는 필요성[5]으로 1955년 국악사양성소가 설립되는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문교부 편수국에 들어가 교과서 편찬의 일을 맡았고, 중앙방송국에서 국악감상 프로그램의 해설자로 활동[6] 하였다. 그 밖에 시조강습회를 통해 국악을 보급하였고, 이혜구 등과 더불어 한국국악학회를 1949년에 창설[7] 하였다. 그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시절 선생으로부터 "항상 빈자리는 생기게 마련인거야. 앞이 겹겹이 막혔다고 꿈을 중도에서 꺾거나 괴로와할 필요가 없더군"[8]라는 말을 듣고,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자란 그는 노후에 본인 스스로가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고, 그가 걸었던 국악의 길을 현재 많은 국악전공자들이 걷고 있다.
주요경력
- 1926년 이왕직아아부원 양성소 제3기 입학
- 193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
- 1941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사
- 1945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
-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
- 1950년 국악사양성소 부소장
-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1961년 국립국악원 원장
- 1961년 국악사양성소 소장
- 1972년 국립국악고등학교 초대교장
주요작품 및 저서
- 저서 1947년 《조선의 아악》
- 저서 1947년 《조선음악독본》
- 저서 1949년 《수상집 雅樂》
- 저서 1949년 《조선의 민요》
- 저서 1952년 《국악개론》
- 저서 1952년 《국악개설》
- 저서 1976년 《한국의 무용》
- 저서 1976년 《한국음악논고》
- 저서 1976년 《국악감상》
- 저서 1978년 《나의 人生觀: 노을에 띄운 가락》
- 저서 1979년 《韓國傳統舞踊》
- 저서 1985년 《世宗時代의 音樂》
- 저서 2000년 《국악학논총》
참고문헌
-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한국음악사학보』제18집, 1997.
- 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 40권, 2012
-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
주석
- ↑ 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명복을 빕니다-'종묘제례악'명인 성경린 선생. 동아일보 2008년 3월 6일자
- ↑ 당시 현재의 국악을 아악이라고 지칭하였다.
-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1),『한국음악사학보』제17집, 1996. 50쪽
- ↑ 박일훈, 1945년 광복부터 국립국악원 개원까지,『역대 국립국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28쪽
- ↑ 김경선, 중등전문국악교육기관 '국악사양성소'의 국악교육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20쪽
- ↑ 국립국악원, 『이왕직아악부와 음악인들』, 국립국악원, 1991, 70쪽
- ↑ 황준연, 성경린 거문고를 가르치며 국악을 지키고 가꾸다, 『한국사 시민강좌』40권, 2012, 362쪽
- ↑ 성경린, 다시 태어나도 아악의 길로(2),『한국음악사학보』제18집, 1997, 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