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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헌수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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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현종 14)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철종 때 참상관이 되었다. 1865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백기호]]의 탐학을 징계하여 제주 도민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그해 가을 극심한 태풍으로 피해가 크자 조정에 진휼 요청 및 피해 복구 작업을 하기 위해 1년을 더 머물렀다.<ref>[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6%91%ED%97%8C%EC%88%98&ridx=0&tot=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ref>  
 
*1848년(현종 14)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철종 때 참상관이 되었다. 1865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백기호]]의 탐학을 징계하여 제주 도민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그해 가을 극심한 태풍으로 피해가 크자 조정에 진휼 요청 및 피해 복구 작업을 하기 위해 1년을 더 머물렀다.<ref>[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6%91%ED%97%8C%EC%88%98&ridx=0&tot=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ref>  
  
*1866년 [[어영청]]의 천총(千摠)으로 준천사(濬川司)의 도청(都廳)을 겸하다가 [[병인양요]]를 당해 [[정족산성|정족산성(鼎足山城)]]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었다. 순무중군(巡撫中軍) [[이용희|이용희(李容熙)]]의 명령에 따라 별군관(別軍官) [[이현규|이현규(李鉉奎)]]와 함께 17명의 초관(哨官)과 경초군(京哨軍) 121명, 표하군(標下軍) 38명, 포수 367명을 이끌고 [[광성보_강화도방어체계|광성진(廣城鎭)]]의 [[손돌목|손돌(孫乭)목]]을 건너 [[정족산성]]을 방어했다.<ref>[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6%91%ED%97%8C%EC%88%98&ridx=0&tot=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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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어영청]]의 천총(千摠)으로 준천사(濬川司)의 도청(都廳)을 겸하다가 [[병인양요_강화도방어체계|병인양요]]를 당해 [[정족산성|정족산성(鼎足山城)]]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었다. 순무중군(巡撫中軍) [[이용희|이용희(李容熙)]]의 명령에 따라 별군관(別軍官) [[이현규|이현규(李鉉奎)]]와 함께 17명의 초관(哨官)과 경초군(京哨軍) 121명, 표하군(標下軍) 38명, 포수 367명을 이끌고 [[광성보_강화도방어체계|광성진(廣城鎭)]]의 [[손돌목|손돌(孫乭)목]]을 건너 [[정족산성]]을 방어했다.<ref>[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6%91%ED%97%8C%EC%88%98&ridx=0&tot=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ref>
  
 
*10월 3일 프랑스함대의 [[로즈|로즈(Rose)]] 제독이 보낸 해군대령 [[올리비에|올리비에(Ollibier)]] 부대 160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 6명을 죽이고 많은 부상자를 냈으며,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세워 프랑스군이 패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6%91%ED%97%8C%EC%88%98&ridx=0&tot=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ref>
 
*10월 3일 프랑스함대의 [[로즈|로즈(Rose)]] 제독이 보낸 해군대령 [[올리비에|올리비에(Ollibier)]] 부대 160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 6명을 죽이고 많은 부상자를 냈으며,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세워 프랑스군이 패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6%91%ED%97%8C%EC%88%98&ridx=0&tot=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ref>

2019년 6월 23일 (일) 02:23 기준 최신판


내용

양헌수의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甫). 부사정 양종임(梁鍾任)의 아들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으로 무예를 익혔다.[1]

양헌수의 생애

  • 1848년(현종 14)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철종 때 참상관이 되었다. 1865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백기호의 탐학을 징계하여 제주 도민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그해 가을 극심한 태풍으로 피해가 크자 조정에 진휼 요청 및 피해 복구 작업을 하기 위해 1년을 더 머물렀다.[2]
  • 10월 3일 프랑스함대의 로즈(Rose) 제독이 보낸 해군대령 올리비에(Ollibier) 부대 160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 6명을 죽이고 많은 부상자를 냈으며,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세워 프랑스군이 패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4]
  • 병사로 재직중이던 1871년에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설한 별위사제도(別衛士制度)의 격려 방안으로 매년 도시(都試)를 시행하여 성적에 따라 우대하고 곡식과 면포로 포상하였으며, 이와 같은 치적이 인정되어 특별히 1년 더 병사로 임직 하였다. 이듬해에는 당시 황해도 연안에 출몰하던 해적 일당을 체포하여 효수하기도 하였다.[5]

강화도 방어체계와 관련

양현수는 부대를 이끌고 덕진진을 거쳐 몰래 삼랑성(다른 이름으론 정족산성이라 불린다.)으로 가서 프랑스 군을 격파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유명한 정족산성 전투이다.

멀티미디어

스틸

파노라마

네트워크 그래프

주석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헌수, 하원호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