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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중건(重建)과 이건(移建)의 시기이다. 1867년(고종 4) 강릉부(江陵府)에서 일어난 큰 화재로 창건 당시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중건하지 못하다가 1921년 봄 후손들이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황영조 기념체육관 건립 계획에 따라 1995년 지금의 자리인 명륜고등학교 뒤로 이전하였다. 4차에 걸쳐 12명을 제향한 사례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제향인을 모신 사우라는 특징이 있다. 제향인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세 번째는 중건(重建)과 이건(移建)의 시기이다. 1867년(고종 4) 강릉부(江陵府)에서 일어난 큰 화재로 창건 당시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중건하지 못하다가 1921년 봄 후손들이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황영조 기념체육관 건립 계획에 따라 1995년 지금의 자리인 명륜고등학교 뒤로 이전하였다. 4차에 걸쳐 12명을 제향한 사례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제향인을 모신 사우라는 특징이 있다. 제향인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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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에서 특기할 점은 생몰년과 제향 년도가 순차적으로 대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정된 기준은 학문과 효행으로 대표되는 성리학적 사회 질서 확립에 기여한 인물로 보인다. 아울러 지역 유림의 합의로 제향된 만큼 그 지역을 대표하는 거성(巨姓) 출신이 대부분이다.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향현사의 핵심 기능은 제향이다. 본래 강릉 향현사의 제향은 매년 중춘추(仲春秋) 중정일(中丁日)에 시행했으나, 1921년 이건(移建) 뒤에는 중추(仲秋) 중정일(中丁日)에만 제향한다고 한다. 제향 절차는 다른 사원 및 사우와 비슷하다.
  
  

2022년 10월 6일 (목) 17:3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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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 Overview

한국어 / Korean

향현사는 이 지역이 낳은 인물 중에서 후세의 모범이 될만한 사람 12명을 뽑아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기 위해 건립한 사당으로 강릉시 교동 238-3번지 명륜고등학교 뒷편에 있다. [1]

영어 / English

Yongheunggung was the residence where King Cheoljong (r. 1849-1863), the 25th king of the Joseon dynasty, once lived. He lived here because his family had been exiled to Ganghwa due to his brother's involvement in treason in 1844. When the preceding king, Heonjong (r. 1834-1849), died without an heir, Cheoljong, a member of the royal Yi family, was selected to become king.

Originally, this was a thatched-roof house. But in 1853, four years after Cheoljong ascended the throne, a local magistrate, Jeong Gi-se (1814-1884), replaced it with new tile-roof buildings and named the house complex "Yongheunggung (龍興宮)," literally meaning “Palace of a Rising Dragon.”[2]

지도 / Map

해설 / Commentary

향현사 / Yongheunggung

본격적으로 향현사를 논하기 전에 지방에는 서원(書院)·영당(影堂) 등 다양한 제향 기관이 병존하고 있었으므로, 이들과 향현사를 비교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본디 향현사(鄕賢社)란 말 자체는 비단 강릉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향현사는 “한 고을의 모범이 되는 명현(名賢)을 봉안하고 있는 사당”을 가리키는 역사적 개념이었다. 현재에도 전라남도 진도군에 향현사가 있으며, 강원도 정선군에도 향현사가 있으며, 강원도 정선군에도 향현사가 있다. 보통 명사로서의 향현사를 여타 기관과 비교하자면 강학 기관과 제향 기관을 겸하고 있는 서원보다 한 단계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영당(影堂)은 본래 죽은 이의 영정(影幀)을 모시는 사당인데, 영정 혹은 화상(畫像)은 고관(高官)이나 공신(功臣)에게 수여되는 특혜이므로, 향현사보다는 영당의 위격이 높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중건되기 이전의 향현사는 영당과 서원보다 그 규모가 작았다고 이해된다.

본고에서 다루는 강릉 향현사의 연혁은 3단계로 대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초건(初建)의 시기이다. 처음에는 1645년(인조 23)에 강릉 부사 강백년(姜柏年)과 전직 관리인 김충각(金忠慤), 김성원(金聲源) 등이 논의하여 향현(鄕賢)들의 행적과 얼을 후세(後世)에 전하고자 건립하였다고 한다. 최치운(崔致雲)·최응현(崔應賢)·박수량(朴遂良)·박공달(朴公達)·최수성(崔壽城)·최운우(崔雲遇) 등 6현을 모셨다. 두 번째는 추향(追享)의 시기이다. 1682년(숙종 8), 1759년(영조 35), 1808년(순조 8)에 걸쳐 이성무(李成茂)·김윤신(金潤身)·박억추(朴億秋)·김열(金說)·김담(金譚)을 추향(追享)하게 되면서 현재의 12현을 갖추게 되었다.

세 번째는 중건(重建)과 이건(移建)의 시기이다. 1867년(고종 4) 강릉부(江陵府)에서 일어난 큰 화재로 창건 당시 건물은 불타 없어지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중건하지 못하다가 1921년 봄 후손들이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황영조 기념체육관 건립 계획에 따라 1995년 지금의 자리인 명륜고등학교 뒤로 이전하였다. 4차에 걸쳐 12명을 제향한 사례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제향인을 모신 사우라는 특징이 있다. 제향인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위의 표에서 특기할 점은 생몰년과 제향 년도가 순차적으로 대응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정된 기준은 학문과 효행으로 대표되는 성리학적 사회 질서 확립에 기여한 인물로 보인다. 아울러 지역 유림의 합의로 제향된 만큼 그 지역을 대표하는 거성(巨姓) 출신이 대부분이다.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향현사의 핵심 기능은 제향이다. 본래 강릉 향현사의 제향은 매년 중춘추(仲春秋) 중정일(中丁日)에 시행했으나, 1921년 이건(移建) 뒤에는 중추(仲秋) 중정일(中丁日)에만 제향한다고 한다. 제향 절차는 다른 사원 및 사우와 비슷하다.



용흥궁은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내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 별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이다. 용흥궁은 창덕궁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3]

철종은 어렸을 때 이름이 원범(元範)이고, 정조(正祖)의 아우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이다. 1844년(헌종 10) 회평군(懷平君)의 옥사에 연루되어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 살았다. 당시 영조(英祖)의 혈손으로는 헌종(憲宗)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19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철종 / King Cheoljong

철종(哲宗, 1831∼1863)은 조선 제25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이변(李昪)이다. 초명은 이원범(李元範)이다.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 염씨이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純祖)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나이 19세였다.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서,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봉영의식(奉迎儀式)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농사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철종 2)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어 왕비의 아버지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하였다.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이 좌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삼정(三政: 田政·軍政·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농민들은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임시 특별기구를 설치해,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정책을 세워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관료에게는 그 방책을 강구해 올리게 하는 등 민란 수습에 힘썼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에 얽매여 제대로 정치를 펴 나갈 수 없었다.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수용(睟容: 임금의 畵像) 4본이 천한전(天漢殿)에 봉안되었다.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范氏) 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가 있어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했을 뿐 후사가 없었다. 시호는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이다. 묘호는 철종(哲宗)이다. 능호는 예릉(睿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에 있다.[4]

철종어진 / Portrait of King Cheoljong

철종의 31세 초상으로 1861년(철종 12)에 도사(圖寫)된 작품이다. 조선 후기 1861년, 이한철 작으로, 1954년 화재로 일부 소실되었다.

보물 제1492호. 족자, 비단에 채색. 세로 202.3 x 가로 107.2 cm


  • 철종어진 속 복장

왕의 군복을 입고 있다.

왕의 군복 구성은 전립, 전복, 동다리, 광대, 전대, 로 이루어진다.

시각자료 / Visual Materials

사진 / Pictures

영상 / Video

가상현실 / Virtual 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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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Sources

  1. '향현사', 솔향강릉 향현사 제향
  2. '용흥궁', Cultural Heritage Wiki,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인문학 연구소
  3. '용흥궁', 인천광역시 강화군청 문화관광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철종(哲宗)
  5. 국립고궁박물관
  6. '용흥궁',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7. '용흥궁',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8. '용흥궁',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9. '용흥궁',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10. '용흥궁', 인천광역시 강화군청 문화관광
  11. '용흥궁',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12. '용흥궁',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13. '용흥궁',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14. '용흥궁', 인천광역시 강화군청 문화관광
  15. Youtube, 채널A Home, <천일야사>
  16. 네이버tv, 채널A, <천일야사>
  17. 네이버tv, tvN, <알쓸신잡>


기여 / Contributors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년 4월 편집 및 정리 김현승 인문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