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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 거부감을 일으키는 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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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 새로운 예복에 대한 거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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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일본과 교린(交隣) 관계를 맺고 있었고, 대마도는 조선이 수여한 인장(印章)을 사용하고 있었다.<ref>김용구,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문학과 지성사, 2001, 149쪽.</ref> 그러나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일본 스스로를 황실로 칭하고, 대마도 도주의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조선으로부터 받은 인장을 쓰지 않고 새로운 인장을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변경된 정책을 조선에 알리고자 새로운 형식의 서계(書契)를 보내오지만, 조선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었고, 서계 접수를 거부하며<ref>"議政府啓, 卽見東萊府使鄭顯德狀啓, …以爲, 對馬島主平義達書啓中, 以「左近衛少將」書來者. …大違格例. 令任譯等, 嚴加責諭, 使改修正呈納, 爲辭矣. …允之." 『高宗實錄』 6년(1869) 12월 13일 庚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612013_002</ref> 갈등을 빚게 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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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일본과 교린(交隣) 관계를 맺고 있었고, 대마도는 조선이 수여한 인장(印章)을 사용하고 있었다.<ref>김용구,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문학과 지성사, 2001, 149쪽.</ref> 그러나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일본 스스로를 황실로 칭하고, 대마도 도주의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조선으로부터 받은 인장을 쓰지 않고 새로운 인장을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변경된 정책을 알리고자 새로운 형식의 서계(書契)를 조선에 보내오지만, 조선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었으므로 서계 접수를 거부하며<ref>"議政府啓, 卽見東萊府使鄭顯德狀啓, …以爲, 對馬島主平義達書啓中, 以「左近衛少將」書來者. …大違格例. 令任譯等, 嚴加責諭, 使改修正呈納, 爲辭矣. …允之." 『高宗實錄』 6년(1869) 12월 13일 庚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612013_002</ref> 갈등을 빚게 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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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갈등은 고종의 친정 시작과 함께 우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면서<ref>"右議政朴珪壽曰, …而謂以違式, 遽却其書, 至今多年, 仍無究竟。 海外異俗, 安得不致生嫌隙乎? 雖尋常朋友之間, 人遣書札, 拒之不納, 必當含慍, 而況交隣講好之地乎?" 『高宗實錄』 11년(1874) 6월 29일 庚子;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106029_001</ref><ref>"領議政李裕元曰, …聘使入送, 雖非靳施之事, 旣云書契, 更修以來, 則其相和之意, 於此可見矣。 …又曰, …而今若改修以來, 則從此可復講舊, 好矣."  『高宗實錄』 11년(1874) 8월 9일 己卯;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108009_001</ref> 덮어지는 듯 하다가 바다를 건너온 일본측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한 연향<ref>"議政府啓, …而第其積年相阻之餘, 彼旣爲此幹事, 遠勞涉海, 交修隣誼, 則在我誠信之道, 合施拔例之擧. 令府使出往館所, 別設宴餉, 以示朝家慰恤之厚意." 『高宗實錄』 12년(1875) 2월 5일 癸酉;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2005_002</ref> 준비 과정에서 복식으로 인해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ref>"議政府啓, …卽見東萊府使黃正淵狀啓, …則彼人之宴饗日諸條儀例, 預先講定云者, 俱違舊例, 亦涉叵測. …後弊所關, 有難遽行設宴" 『高宗實錄』 12년(1875) 3월 4일 辛丑;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3004_002</ref> 일본은 새로 제정한 서구식 대례복을 입고 참석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전의 규례와 어긋나는 것이라며 계속해 거부하면서 결국 정상적인 교섭은 중단되고 만다.<ref>"議政府啓, …取見東萊府使黃正淵狀啓, …故該譯官以爲「禮服不可許接, 書契無以取見」云矣." 『高宗實錄』 12년(1875) 7월 9일 癸卯;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7009_001</ref> 이후 일본측이 결렬된 협상 결과를 가지고 부산을 떠나 귀국하는 당일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ref>김원모, “운요호사건(─號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0358</ref>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된다.<ref>이원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508</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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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갈등은 고종의 친정 시작과 함께 우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면서<ref>"右議政朴珪壽曰, …而謂以違式, 遽却其書, 至今多年, 仍無究竟。 海外異俗, 安得不致生嫌隙乎? 雖尋常朋友之間, 人遣書札, 拒之不納, 必當含慍, 而況交隣講好之地乎?" 『高宗實錄』 11년(1874) 6월 29일 庚子;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106029_001</ref><ref>"領議政李裕元曰, …聘使入送, 雖非靳施之事, 旣云書契, 更修以來, 則其相和之意, 於此可見矣。 …又曰, …而今若改修以來, 則從此可復講舊, 好矣."  『高宗實錄』 11년(1874) 8월 9일 己卯;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108009_001</ref> 덮어지는 듯 하다가 바다를 건너온 일본측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한 연향<ref>"議政府啓, …而第其積年相阻之餘, 彼旣爲此幹事, 遠勞涉海, 交修隣誼, 則在我誠信之道, 合施拔例之擧. 令府使出往館所, 別設宴餉, 以示朝家慰恤之厚意." 『高宗實錄』 12년(1875) 2월 5일 癸酉;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2005_002</ref> 준비 과정에서 복식으로 인한 새로운 문제가 생기면서 다시 갈등을 빚게 된다.<ref>"議政府啓, …卽見東萊府使黃正淵狀啓, …則彼人之宴饗日諸條儀例, 預先講定云者, 俱違舊例, 亦涉叵測. …後弊所關, 有難遽行設宴" 『高宗實錄』 12년(1875) 3월 4일 辛丑;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3004_002</ref> 일본은 새로 제정한 서구식 대례복을 입고 참석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전의 규례와 어긋나는 것이라며 계속해 거부하면서 결국 정상적인 교섭은 중단되고 만다.<ref>"議政府啓, …取見東萊府使黃正淵狀啓, …故該譯官以爲「禮服不可許接, 書契無以取見」云矣." 『高宗實錄』 12년(1875) 7월 9일 癸卯;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7009_001</ref> 이후 일본측이 결렬된 협상 결과를 가지고 부산을 떠나 귀국하는 당일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ref>김원모, “운요호사건(─號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0358</ref>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된다.<ref>이원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508</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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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교린상의 연향의례에서 일본의 복색에 대해서는 특별히 규정한 바가 없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99쪽.</ref> 그런데 개항 직전 시기의 조선은 일본측이 착용하겠다고 하는 서구식 예복에 대해서 유독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병인양요(1866)<ref>김원모, “병인양요(丙寅洋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142</ref>와 신미양요(1871)<ref>김원모, “신미양요(辛未洋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961</ref>,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 도굴<ref>김원모,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589</ref> 시도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정도로 서양문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형성된 것에서 기인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에 서양복을 입고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는 일본을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99~10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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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교린상의 연향의례에서 일본의 복색에 대해서는 특별히 규정한 바가 없었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99쪽.</ref> 그런데 개항 직전 시기의 조선은 일본측이 착용하겠다고 하는 서구식 예복에 대해서 유독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병인양요(1866)<ref>김원모, “병인양요(丙寅洋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142</ref>와 신미양요(1871)<ref>김원모, “신미양요(辛未洋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961</ref>,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 도굴<ref>김원모,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589</ref> 시도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정도로 서양문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형성된 것에서 기인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에 서양복을 입고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는 일본을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f>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99~10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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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6일 (금) 14:16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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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Episode 2: 새로운 예복에 대한 거부감

Synopsis

조선은 일본과 교린(交隣) 관계를 맺고 있었고, 대마도는 조선이 수여한 인장(印章)을 사용하고 있었다.[1] 그러나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일본 스스로를 황실로 칭하고, 대마도 도주의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조선으로부터 받은 인장을 쓰지 않고 새로운 인장을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변경된 정책을 알리고자 새로운 형식의 서계(書契)를 조선에 보내오지만, 조선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이었으므로 서계 접수를 거부하며[2] 갈등을 빚게 된다.

이 갈등은 고종의 친정 시작과 함께 우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면서[3][4] 덮어지는 듯 하다가 바다를 건너온 일본측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한 연향[5] 준비 과정에서 복식으로 인한 새로운 문제가 생기면서 다시 갈등을 빚게 된다.[6] 일본은 새로 제정한 서구식 대례복을 입고 참석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전의 규례와 어긋나는 것이라며 계속해 거부하면서 결국 정상적인 교섭은 중단되고 만다.[7] 이후 일본측이 결렬된 협상 결과를 가지고 부산을 떠나 귀국하는 당일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8]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된다.[9]

사실 교린상의 연향의례에서 일본의 복색에 대해서는 특별히 규정한 바가 없었다.[10] 그런데 개항 직전 시기의 조선은 일본측이 착용하겠다고 하는 서구식 예복에 대해서 유독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병인양요(1866)[11]와 신미양요(1871)[12],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 도굴[13] 시도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정도로 서양문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형성된 것에서 기인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에 서양복을 입고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는 일본을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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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용구,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문학과 지성사, 2001, 149쪽.
  2. "議政府啓, 卽見東萊府使鄭顯德狀啓, …以爲, 對馬島主平義達書啓中, 以「左近衛少將」書來者. …大違格例. 令任譯等, 嚴加責諭, 使改修正呈納, 爲辭矣. …允之." 『高宗實錄』 6년(1869) 12월 13일 庚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0612013_002
  3. "右議政朴珪壽曰, …而謂以違式, 遽却其書, 至今多年, 仍無究竟。 海外異俗, 安得不致生嫌隙乎? 雖尋常朋友之間, 人遣書札, 拒之不納, 必當含慍, 而況交隣講好之地乎?" 『高宗實錄』 11년(1874) 6월 29일 庚子;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106029_001
  4. "領議政李裕元曰, …聘使入送, 雖非靳施之事, 旣云書契, 更修以來, 則其相和之意, 於此可見矣。 …又曰, …而今若改修以來, 則從此可復講舊, 好矣." 『高宗實錄』 11년(1874) 8월 9일 己卯;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108009_001
  5. "議政府啓, …而第其積年相阻之餘, 彼旣爲此幹事, 遠勞涉海, 交修隣誼, 則在我誠信之道, 合施拔例之擧. 令府使出往館所, 別設宴餉, 以示朝家慰恤之厚意." 『高宗實錄』 12년(1875) 2월 5일 癸酉;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2005_002
  6. "議政府啓, …卽見東萊府使黃正淵狀啓, …則彼人之宴饗日諸條儀例, 預先講定云者, 俱違舊例, 亦涉叵測. …後弊所關, 有難遽行設宴" 『高宗實錄』 12년(1875) 3월 4일 辛丑;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3004_002
  7. "議政府啓, …取見東萊府使黃正淵狀啓, …故該譯官以爲「禮服不可許接, 書契無以取見」云矣." 『高宗實錄』 12년(1875) 7월 9일 癸卯;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za_11207009_001
  8. 김원모, “운요호사건(─號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0358
  9. 이원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508
  10.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99쪽.
  11. 김원모, “병인양요(丙寅洋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142
  12. 김원모, “신미양요(辛未洋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961
  13. 김원모,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589
  14. 이경미, 『제복의 탄생』, 민속원, 2012, 99~105쪽.